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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 (삼상 2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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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 (삼상 23:1~14)


지난시간에 우리는 삼상22장을 중심으로 다윗이 아둘람 굴에 피신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윗 주변에 400여 명의 무리가 몰려왔습니다. 

삼상22:2절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그렇다면 그 집단의 성격은 무엇일까요? ‘이 더러운 세상 차라리 잊고 말겠다.’는 도피자들일까요?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는 가지 않는다.’는 은둔자들일까요? ‘이 모순된 세상 뒤엎어버리겠다.’는 혁명가
들일까요?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주먹 하나 믿고 설치던 깡패들일까요? 
그 집단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그 집단의 성격을 살펴보던 중 시편 57편을 만났습니다. 
시편 57편은 사울 왕의 칼을 피해 아둘람 굴에 은신해 있던 다윗의 심경을 담은 시편입니다. 
시편57:8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새벽’은 긴 밤중에서 가장 춥고 어두운 순간입니다. 

그들은 그 어두운 역사의 새벽을 깨우려고 모였습니다. 지금은 캄캄한 어두움이지만 곧 밝아올 아침을 준비하자고 모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둘람 동굴의 400명의 공동체를‘비전공동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자기 한 몸 숨길 곳을 찾는 사람들이 ‘새벽을 깨우려는’비전을 품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면 이렇게 상황에 관계없이 비전의 사람이 됩니다. 큰 인물은 돈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큰 인물은 배경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큰 인물은 비전으로 만들어집니다. 주먹만 한 이 가슴에 비전을 품을 때 큰 인물이 됩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비전의 인물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우리 교회는‘아둘람 동굴’같은 비전의 동산이 되길 기대합니다. 

오늘의 말씀입니다 
다윗의 도피생활은 계속됩니다. 다윗의 도피생활은 B.C. 1020-1010년까지 대략 10년 간 계속됩니다. 
다윗이 사울 왕의 박해로부터 도망 다닌 십여 년의 세월은 그에게는‘고난학교’였습니다. 
그가 그 학교를 통해 확실하게 배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련이 매서울수록 하나님의 사랑은 더 살가웠다는 것, 시련이 날카로울수록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더 든든했다는 것, 시련이 깊을수록 하나님의 은
혜는 풍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도피생활이란 고난학교를 통하여 그 믿음이 성숙되어져 갑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1)‘묻자와’ 2)‘그일라 사람들’이라는 소제목을 붙여 시련 가운데 성숙되는 다윗의 믿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시련은 금보다 더 귀한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킨다.’는 본문의 메시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1.‘묻자와’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여기서 ‘묻자와’라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싸알’인데, 아랍어로는‘쏘알’입니다. 
같은 셈족언어이기 때문에 발음이 비슷하지요? 본문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묻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4절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11절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주의 종의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12절“다윗이 가로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다윗은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묻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된 비결은 범사에 하나님의 인도를 구한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사울왕의 사적에 그 어디에도 하나님께 물었다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사울 왕은 끊임없이 인간적인 계교를 부립니다. 

9절에 보면, “다윗이 사울의 자기를 해하려는 계교를 알고.........” 
여기에 ‘계교’라는 말이 나옵니다. 
다윗과 사울왕의 다른 점은 ‘하나님께 묻느냐’ 아니면 ‘인간의 계교를 부리느냐’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뛰어날까요? 아니면 인간의 계략이 뛰어날까요? 

사울 왕이 아무리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도 하나님을 당해낼 수가 없어요. 
이 태도가 그들의 삶을 가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교우들의 어려운 사정을 듣게 됩니다. 
그 때 그 교우가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매어달리면 목회자의 마음은 안심이 됩니다. 
걱정이 되지 않아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면 살 길이 열린다. 회복은 시간문제이다. 빨리 회복되느냐 아니면 좀 더디냐의 문제일 뿐 반드시 회복된다.” 

그러나 기도가 가장 필요한 그 순간에 기도하지 않는 교우들이 있어요. 어디에 가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
다. 그러면 목회자의 마음이 불안해요.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자꾸 지역장에게, 속회인도자에게 물어봅
니다. ‘그 집사님 어떻게 됐느냐?’고 범사에 하나님께 묻는 교우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내게 세 번째이십니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 당신은 내게 세 번째이십니다. 
첫 번째는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일, 두 번째는 내가 해야 하는 일, 세 번째는 하나님 만나는 일.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해야 할 일 다 마치고, 그 후에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내게 세 번째이십니다. 

어려운 일 생길 때도 하나님은 내게 세 번째이십니다. 
내 힘으로 한 번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그래도 안 될 때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은 내게 세 번째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는 항상 첫 번째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부르기만 하면 첫 번째로 도와주십니
다. 내가 괴로워할 때는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오십니다. 
아무도 내 곁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면 어느새 내 곁에 오셔서 나를 위로해주십니다. 
나는 언제나 하나님께 첫 번째입니다. 
나도 하나님을 첫 번째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당신을 만나고, 작은 고비마다 당신의 손을 꼭 붙잡는, 내게 첫 번째이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항상 첫 번째로 여기시는 하나님을 나도 첫 번째로 모시고 싶습니다. 


참 좋은 글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작은 고비마다 하나님의 손을 꼭 붙잡는 첫 번째로 여기길 바랍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잠3:6절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하늘이 무너져도 범사에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책임져주십니다. 
‘묻자와’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고난을 통하여 달라지는 다윗의 신앙자세를 보여줍니다. 


2. ‘그일라 사람들’ 

본문에는 ‘그일라’라는 지명이 유독 많이 나옵니다. 본문으로 읽은 부분에만 12번이나 나옵니다. 
‘그일라’라는 지명을 통해 독자에게 뭔가 교훈을 주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일라’는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5km에 있는 곡창지대로서 블레셋과 가까운 지역입니다. 
추수기에는 항상 블레셋의 공격목표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에게 은혜를 원수로 갚았습니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추수기에 그일라를 쳐서 타작마당을 탈취했습니다. 
1절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이로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마당을 탈취하더이다.” 

다윗이 그일라 사람들을 구했습니다. 
5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니라.” 

그런데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배신하고 다윗의 은신처를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사울왕에게 고발하였습니다. 
12절 “다윗이 가로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붙이리라.”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왕에게 고발한다는 말이지요. 그일라 사람들이 자신들을 구해준 다윗에서 
몹쓸 짓을 했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았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비난받아야 마땅할 파렴치한 행동이었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고발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추측해보건대 그일라 사람들은 놉 땅에 대한 사울왕의 보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삼상22:6-23절에 보면,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보호해줬다가 85명의 제사장들을 비롯하여 젖 먹는 아이들까지, 심지어 나귀와 양까지 학살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사울왕의 만행을 잘 아는 그일라 사람들이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은신처를 사울 왕에게 고발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그일라 사람들의 처신에 대하여 다윗의 반응이 어떠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일라 사람들에게 아무런 비난이나 보복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이런 반응은 그일라 사람들의 입장을 배려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입장이 곤란했으면.........’   ‘오죽 했으면 배은망덕한 짓을 하겠는가?’ 

우리도 그런 말을 하잖아요. 무슨 일로 한 사람이 흥분하면, “참게. 오죽했으면 그랬을까?”라고 다독거립
니다. 그게 다윗의 마음이었습니다. 
사울왕 같았으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보호했다는 이유로 제사장 일족 85명뿐만 아니라 그들의 어린 자식들, 심지어 나귀와 양까지 학살한 사울 왕이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지요? 
사울왕과 현저히 비교되는 장면입니다. 백성을 보호해야할 사울 왕은 백성을 학살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한 몸조차 가릴 수 없는 처지의 다윗은 오히려 백성을 보호합니다. 

사울왕은 자기의 욕심 때문에 백성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백성을 위해 자신이 조용히 그일라 성을 떠났습니다. 
다윗의 넉넉한 품성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그일라’라는 지명은 고난을 통하여 깊어지는 다윗의 신앙인격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묻자와’라는 단어와 ‘그일라’라는 지명을 반복하면서 ‘고난학교’를 통하여 성장해가는 다윗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고난의 현장에서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체험하게 됩니다. 시련을 겪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복음성가-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고난학교를 통한 다윗의 영적인 성숙은 시63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편 63편은 다윗이 ‘유다광야에 있을 때에’고백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삼상23장이 이 시의 배경이지요. 
시63:1절에 보면,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물이 없어 말라 먼지가 푸석푸석 일어나는 유다 광야가 바로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있는 자기 심정과 같다는 의미이지요.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참 보호자로 고백합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7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8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나의 도움’, ‘주의 날개’, ‘주의 오른손’......... 

그의 입에서 쏟아낸 단어들입니다. 다윗은 도망자로 살아가는 동안 뼈저리게 느끼고 확인했습니다. 
‘주님만이 나의 보호자 되신다.’ 

지난 금요일 ‘메디칼앰버서더 선교회’의 정 선교사님이 방문했습니다. 
그 분이 간증을 했습니다. 
선교지에서 현지인들을 양육하자면 목소리를 많이 써야 하는데 목소리가 쉽게 쉬더라는 거지요. 
그래서 목소리를 내기 위하여 힘을 주니까 더 쉬게 되고....... 
서울에 오는 길에 어느 개인 이비인후과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는데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는 거지요. 

그러던 차에 일본에서 의료선교에 관련된 회의가 있었답니다. 
어렵사리 연사로 초청받아 발표를 했는데  발표 후에 영동 세브란스에서 온 이비인후과 의사선생님이 좀 보자고 하더랍니다. 
‘당신 목소리를 들으니까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한국에 들어오면 병원에 들려라. 그런 상태로는 사역하기 힘들 것이다.’ 

정선교사님과 이 이비인후과 의사 선생님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답니다. 
영동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내시경 검사를 받아보니까 양쪽 성대에 물방울 같은 혹이 하나씩 붙어 있더라는 거지요. 
현미경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제 6개월이 지났는데 찬송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말하는 데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이 이비인후과 의사는‘성대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권위자였습니다. 

정선교사님이 고백했습니다. 이번 일은 기적이라는 거지요. 
연사로 일본에 가게 된 것도 사실은 기적이었고, 그곳에서 일면식도 없는 이비인후과 의사선생님을 만난 것도 기적이었고, 그런가보다 하지 않고 그 의사선생님이 자기 목소리에 관심을 가진 것도 기적이라는 거지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대답해보십시오. 
누가 일본에 가게 하셨습니까? 
누가 이비인후과 의사선생님을 만나게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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