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분노 다스리기 (막 11:15~18)

  • 잡초 잡초
  • 405
  • 0

첨부 1


분노 다스리기 (막 11:15~18)
 

1. “전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지난 2월 마지막 주간에 한 텔레비전 아침 프로그램에 미국계 한국인(韓國人)인 인요한(미국명 존 린튼) 박사가 출연했습니다. 그는 현재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 외국인 진료소 소장입니다. 그의 진외증조부, 즉 아버지의 외할아버지는 1895년 한국에 온 미국 남장로교 ‘유진 벨’ 선교사이며, 그의 할아버지인 윌리엄 린튼 선교사, 아버지(휴 린튼)와 어머니(샤롯) 모두 우리나라에서 평생 선교하시다가 고인이 되신 분들입니다. 인요한 박사는 순천에서 태어나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한국 의사’로서 ‘응급의학 전문가’로도 유명합니다. 이런 배경을 가진 그가 그날 방송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TV 뉴스에서,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한국인들의 모습은 전부 화내는 것뿐입니다.” 

정말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이러저러한 일들로 분노한 시민들은 연일 항의 농성과 촛불 시위를 벌리고 있고, 시위하는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불을 내지르고, 연쇄살인범에 의해 사람들은 계속 죽어나가고, 국회의원들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국회라는 싸움터에서 국민들에게 돈 받아 가면서 싸우고, 그런가 하면 분노한 시민들이 국회의원을 구타하고, 소위 ‘막장 드라마’에서는 고함과 폭언과 폭력적인 행동이 여과 없이 쏟아져 나오고, 또 막말을 해대는 개그맨들의 인기가 높고 …. 정말 우리 사회 전체가, 우리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 국민들이 이렇게 분노하고 있을까요? 누가 이들을 화나게 만들었을까요? 그리고 누가 이들의 분노를 잔잔하게 가라앉힐 수 있을까요?

2. 분노(憤怒)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화”, 즉 “분노가 무엇인가?”부터 정의를 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화”란 것이 무엇입니까? “분노”가 무엇입니까?

‘노여움, 화’를 뜻하는 ‘분노’란 한자로 ‘분할 분(憤)’ 자에 ‘성낼 노(怒)’ 자를 씁니다. 먼저 ‘분할 분(憤)’ 자는 심방변(忄=心, 마음, 심장) 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분(賁)으로 이루어진 말인데요, 여기서 소리를 결정하는 “분(賁)”이라는 글자의 뜻은 ‘솟아오른다’입니다. 따라서 “분할 분(憤)” 자는 ‘마음이 솟아 오른다’, 혹은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거나 뭉쳐 있는 것이 일시에 솟아오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노(怒)” 자는 음(音)을 나타내는 노(奴)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마음(心)이라는 뜻이 합한 것입니다. 이러한 한자에 따른 “분노”의 정의는 ‘자신의 욕구, 요구, 혹 뜻하는 바가 막히거나 거부당했을 경우 마음과 생각에 있던 것들이 울컥 치솟아 오르는 것’인데요, 문제는 그것이 마음속에만 뭉쳐있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순식간에 울컥 치밀어 올라 밖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울컥 치밀어 오른 화는 신체적으로는 ‘입술을 깨문다’ 든지, ‘눈 꼬리를 치 뜬다’ 든지 하는 얼굴 표정으로 나타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분을 참다못해 스스로를 자해하거나 그 분으로 인하여 몸이 부르르 떨리는 등의 행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상대방에게 ‘등을 돌린다’거나 ‘공격 한다’는 등의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반응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런 분노는 건강이 좋지 못할 때, 피로할 때, 공복일 때, 수면부족일 때, 긴장하고 있거나 흥분하고 있을 때 더 크게 일어난다고 하니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러한 분노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분노를 다섯 단계로 보는데요. 첫째는 가벼운 ‘짜증(irritation)’의 단계입니다. 이것은 ‘불쾌감’ 정도로서 스스로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분개(indignation)’의 단계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당한 것에 대해 상대를 용서하지 못하고 앙갚음을 하려고 하는 단계입니다만, 대개의 경우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잘 극복해냅니다. 세 번째는 ‘격분(wrath)’의 단계입니다. 사람이 이 격분의 단계에 이르면 보복하려는 강한 욕구가 생깁니다. 
이 단계에 있을 때는 당한 대로 갚지 않으면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야말로 어떤 형태로든 분을 풀어야 편안해 지는 단계입니다. 네 번째는 ‘격노(fury)’의 단계입니다. 사람이 격노(激怒)하게 되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급기야 그것이 폭발하게 됩니다. 다섯 번째는 ‘광분(rage)’의 단계입니다. 이 광분(狂奔)의 단계는 말 그대로 미쳐버리는 것입니다. 가장 위험스런 분노로서 아주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결과를 일으키는 단계입니다. 가능하면 이 단계까지 가기 전에 분노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가능할까요? 

제가 ‘가능할까요?’라고 물은 이유는 “분노”라는 말의 한자 의미처럼 마음속에 있던 것이 자신도 모르게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이기 때문에 화를 내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 그렇게 화가 나면 걷잡을 수 없는 단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화를 내지 않는 분이 계십니까? 사람은 누구나 화를 냅니다. 화를 안 낼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화를 내는 것도 사람의 본성이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화를 내어서 득을 본 적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화낸 후에 후회를 안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화 낸 후에 후회를 안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중에도 위로가 되는 것은 성경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는 표현이나 예수님이 ‘화를 내셨다’는 기록이 생각보다는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도 화를 내시는데, 우리가 어찌 화를 안 낼 수 있겠습니까? 또 하나, 성경에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한 말씀 때문에 그나마 위로가 됩니다(엡4:26,27). 왜 그렇습니까? 이 말은 절대로 화를 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 또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을 주님께서 인정해 주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화를 낼 수 있습니까? “화를 내되 그 화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3. 분노 다스리기

1) 분노하시는 예수님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화를 내셨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어지간해서 화를 내지 않는 온유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신양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몇 가지 사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❶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것을 보시고, 채찍을 휘두르시고, 상을 엎으시면서 분노하신 경우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최소한 두 번은 있었던 일로 보입니다(마21:12~13, 막11:15~17, 눅19:45~46). ❷ 또 다른 경우는, 예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해 주기를 바라는 어린아이들을 제자들이 꾸짖어 내어좇을 때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내쫓던 그 어린 아이를 안아주시면서, ‘너희들이 이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마18:3). ❸ 그리고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것으로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을 향하여 "화있을찐저"라고 분노하신 경우입니다.

그 가운데서 오늘 본문에 있는 사건은 예수님의 분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기는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 즉 유월절 때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와 여리고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 왔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 올 때,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영했고, 그 중 어린이들은 “호산나!”를 외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찬양했고, 어른들은 길바닥에 겉옷을 깔고 경배했습니다. 그야말로 왕의 행차와 같았지요. 

그 후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머물기를 좋아하셨던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신 성전은 엉망진창, 그야말로 난장(亂場)판이었습니다. 성전 전체에 거룩함과 신령함이 배어있고, 예배자들의 찬양과 기도 소리로 가득해야 할 텐데 엉뚱하게도 양을 비롯하여 짐승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성전 안에 일종의 시장이 형성되어 그야말로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당시가 유월절을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구정이나 추석처럼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을 앞두고 ‘제수마련’을 위한 ‘대목’이라, 성전은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 남자들은 매년 세 차례 반드시 성전으로 와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출23:14,17). 그 세 번의 절기는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소위 이스라엘의 3대 명절입니다. 이러한 명절이 되면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가야만 했는데요. 그 제물들은 “소, 양, 비둘기” 등이었습니다(요2:14). 이러한 제물을 가지고 성전으로 가야하는 이유는 그 짐승을 자신의 죄를 대신하는 희생제물로 드려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짐승들을 데리고 성지로 향한 여행을 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아열대성 기후인 이스라엘 지역에서 그 엄청난 더위 속에서 사람이 혼자 여행하는 것도 무리일 텐데, 며칠 혹 몇 달을 짐승을 이끌고 여행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여행 기간 동안 짐승에게 줄 먹이와 잠자리를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리를 해서라도 자신이 키웠거나 고향에서 준비한 짐승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다가, 도중에 짐승들이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물로 쓸 짐승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당시 법에 의하면 제물이 없는 사람들은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택한 방법이 제물 대신 돈을 준비해 와서는 성전에서 그 제물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시작된 성전 시장으로 인하여,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을 앞둔 성전의 상황이 어떠했을 지는 짐작이 되시죠? 

성전은 멀리서 온 예배자들에게 팔 송아지, 양, 비둘기들로 가득 차 있었고, 먼 지역에서 온 사람들을 위하여 로마화폐나 헬라 돈을 성전 세겔로 환전해 주는 사람들까지 붐비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때 성전에 들어와 있던 짐승들이 거기가 성전인 줄 알고 아주 경건하게 침묵하고 있었겠습니까? 연신 울어댔을 것입니다. 똥오줌은요? 성전인 줄 알고 똥오줌을 가렸을까요? 거기다가 “깎아주라, 안 된다” 하면서 흥정하는 소리와 함께 서로 돈을 주고받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전은 거룩하고 신령한 곳이 아니라 명절 특수를 노리는 ‘대목 시장’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전 시장의 뒤에는 또 다른 것이 숨어 있었습니다. 당시 성전에서 장사하던 상인들은 대제사장 등 지도자들에게 뇌물을 상납해서 그 자리를 따냈습니다. 처음에는 선한 의도로 시작된 장사가 나중에는 경건한 예배라는 구실로 돈을 벌려는 상인들과 그들을 통하여 잇속을 챙기려는 지도자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주님께서 분노하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정말 화가 많이 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자리에서 환전상들과 제물용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엎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더 이상 성전에서 매매할 수 없도록 채찍을 만들어서 그들을 쫓아버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난장판이던 성전이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을 노리고 있던 자들에게 아주 좋은 구실을 제공하고, 기회를 주는 것이며,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이 더욱 빠르게 진행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렇게 위험하기 짝이 없는 ‘성전 청소’를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즉 보는 이들과, 제자들과,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고자 이렇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다름이 아닌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이 한 마디로 충분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 그리고 이 집에서 사람이 해야 할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 즉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 외에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분노하신 이유는 바로 이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성전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성전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성전을 시장으로 만들고 있는 상인들과 그것을 허락한 대제사장 등 유대 지도자들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느냐?’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이 떠들썩한 성전 시장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이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욕심’이었습니다. “탐욕은 우상숭배니라(골3:5)”라는 말씀대로 그들은 성전을 하나님 대신에 탐욕으로 채우고 있었던 것이죠. 결국 예루살렘 성전에는 인간들만, 절기와 예배를 이익의 수단으로 만들어 자기 배를 채우려는 사람들의 욕심만 있었지, 하나님과 그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예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분노는 단순한 화냄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대상을 향해, 목적을 가지고서 화를 내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2) 분노를 이용하기

‘레오 메도우’라는 사람이 『분노의 극복』이라는 책에서, “분노를 건설적으로 사용하면, 신체와 정신에 힘을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화를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적절한 대상에게, 적절한 시기에, 올바른 목적으로, 올바른 방법으로 화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님께서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화를 내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성도는 그것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원한이나 질투로 인하여 분노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그러나 불의나 죄악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올바른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설사 그와 같은 올바른 분노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분이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시기에, 올바른 목적과 올바른 방법으로 표출되어서, 그 사람을 깨우치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1800년대, 독일에는 ‘비스마르크’라는 재상이 있었습니다. 그를 ‘철혈재상’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냉혹하고 차갑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청년이었을 때 친구와 함께 사냥을 갔습니다. 그런데 함께 간 친구가 그만 수렁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친구의 몸은 서서히 수렁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비스마르크에게 ‘살려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그때 비스마르크는 난데없이 그 친구의 머리에다 총을 겨냥했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자네를 건지려고 하다가는 나까지 빠져 죽을 것이네. 그렇다고 그냥 두면 엄청난 고생을 할 테니, 그것은 친구의 도리가 아니지. 내가 자네의 고생을 덜어 주겠네. 천국에 가서도 내 우정을 잊지 말게나.”하면서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습니다. 친구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 순간 친구의 마음에는 비스마르크를 향한 불같은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친구는 소리쳤습니다. “이런 나쁜 놈. 네가 친구냐? 내가 밖으로 나가면 반드시 너를 죽일 것이다.” 그러고는 죽자고 그 수렁에서 기어 나와서 비스마르크에게 자신의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때 비스마르크가 황급히 그를 말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친구! 내가 겨냥한 것은 자네의 머리가 아니라 자네의 생각이었네.” 

여러분, 비스마르크의 지혜가 놀랍지 않습니까? 만약 비스마르크가 친구를 자기 힘으로 구하려 했다면 함께 죽었을 것입니다. 그는 일부러 친구를 분노하게 만들었고, 그 분노는 큰 힘을 발휘하여 친구 스스로 수렁에서 빠져나오게 만든 것입니다.

어느 겨울, 모녀가 숲에서 길을 잃고서는 헤매다가 그만 동사(冬死)할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던 운전자가 그들을 발견했습니다. 운전자가 살펴보니 엄마는 거의 체온이 식은 상태였고, 아기는 엄마가 꼭 껴안고 있어서 살아있었습니다. 이것을 확인한 운전자는 아이만을 차에 태우더니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의식이 가물가물하던 아이의 엄마는 자기 아이를 태우고는 냅다 달리는 운전자를 보고서는 그가 아이를 납치해 간다고 생각하고 본능적으로 자동차를 따라 뛰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달리던 운전자가 갑자기 차를 세웠습니다. 차를 따라잡은 엄마는 ‘훔쳐간 아기를 달라’고 울부짖으면서 운전자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여기에 운전자의 지혜가 있었습니다. 운전자가 자기 아이를 유괴한다고 생각한 엄마는 기진맥진해 했다가 벌떡 일어나서 뛰기 시작했고, 그렇게 뛰니까 그 몸에 열이 나고 땀이 나서 살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단순히 ‘분노는 나쁜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맙시다. 사람인 우리로서는 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을 활용해야지요. 지금까지 살펴본 예수님처럼, 예로 들었던 사람들처럼, 화를 내되 그것을 삶의 또 다른 에너지,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좋게 만드는 기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편으로 만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는 결론입니다.

4. 분노, 잘 다스리면 득이 된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분노를 자제하라’는 내용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성전에서 맘껏 분노를 터뜨리셨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고 그것을 휘둘러서 장사치들과 짐승들을 내쫓았습니다. 돈을 바꿔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상을 뒤엎었습니다. “온유하심”의 대명사인 우리 예수님이 분노를 그대로 표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분노는 성전의 원래 정신과 참된 예배, 그리고 사람들 속에 사라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되살리려는 분노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화를 내지 않으면 좋겠지만, 어떤 경우는 화를 내지 않으면 죽습니다. 즉 분노의 에너지를 자신이 먹으면 독이 되고 병이 됩니다. 그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먹이면 폭력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를 잘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죠.

어떻게 하면 분노를 잘 이용할 수 있습니까? 전문가들은 “화가 나면 운동을 하라”고 권합니다. 옛날에 화가 나면 지나가던 동네 강아지를 발로 걷어찼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화가 나면 운동하라는 말은 이 옛말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합니다. 요즘 남의 강아지를 찼다가는 신문에 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시고요, 그 대신에 화가 날 때마다 운동으로 그것을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주의사항, 제가 운동할 때마다 화가 나서 그렇다는 편견을 갖지 마십시오! 두 번째 방법은 화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화를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베토벤은 아버지로부터의 학대와 자신의 장애 등으로 인한 분노를 음악으로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이 강렬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그와 같이 여러분들도 화가 나면 예술가가 되십시오. 그리고 때로는 기도의 아름다운 음악도 만들어 보시고요. 교회당 청소도 한 번 해 보십시오. 분노를 이용하는 세 번째 방법은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의 분노를 통하여 사람들의 잠들어 있는 양심과 신앙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성도로서는 반드시 본받아야할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움으로 시작해서 미움으로 끝나는 분노가 있습니다. 이것은 파괴적인 분노입니다. 자기 인격과 남의 인격을 파괴시키고, 자기 생명과 남의 생명도 무너뜨립니다. 사랑으로 시작해서 미움으로 끝나는 분노가 있습니다.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서 내는 분노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명분이 있고 의를 갖고 있어도 미움으로 끝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다음은 사랑으로 승화되는 분노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이요,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분노가 비록 감정적인 충동과 인간적인 이유로 시작했을지라도 예수님처럼 마무리를 잘 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화를 내되, 그것이 주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 사람들의 양심과 신앙을 일깨우는 도구가 되게 하는 “분노의 선한 활용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