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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자녀에게 물려 줄 진정한 기념비 (수 4: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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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녀에게 물려 줄 진정한 기념비 (수 4:19-24)


중국의 한나라의 절색 미녀였던 왕소군이란 후궁이 남긴 시 중에 한 구절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말이 있습니다. “봄이 왔어도 봄과 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당시 중국의 한나라가 국력이 약해지자 자신들이 오랑캐 정도로 알던 흉노족에게 조공을 바치는 굴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흉노족의 왕이 왕비를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례한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힘이 없으니까 결국 후궁 가운데 왕소군이란 여인이 바쳐지는데 뭐, 마음에 내키겠습니까? 결혼을 했지만, 불행한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처지를 시 중에 한 구절에 담았는데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란 말입니다. “봄이 왔어도 봄과 같지 않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일생에 있어 여인에게 가장 소중한 결혼인데 마음에 없는 정략적인 결혼을 하는 그의 심정을 담은 이야기가 아닙니까?

요즘 우리 역시 이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인 3월이 성큼 다가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봄이 오는지 마는지 마음이 얼음장처럼 녹을 줄을 모릅니다. 요즘 분위기를 살펴보면 ‘춘래불사춘’이란 말이 딱 알맞은 표현입니다. 3월은 만물이 소생하고 새 학년이 시작되어 흔히 ‘희망의 계절’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그 희망을 짜르는 소식들이 주변에 하루가 멀다하고 들려옵니다. 작년 말부터 몰아닥친 경제 위기가 점차 거세어지는 느낌입니다. 
환율이 계속 상승하고, 기름 값도 오르고, 금값은 또 왜 그리 오르는지 요즘 금값이 금값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월급이 깎이고 취직도 안 되고 실업자가 늘어나고 ... 3월 위기설 운운 하는 루머도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치인들은 이전투구를 일삼고, 북한은 민간 항공기를 격추하겠다고 작심한 듯 섬뜻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내뱉는 온통 뒤숭숭한 이야기뿐입니다.

그러나 이럴 때 일수록 우리 성도들은 세상에 휩쓸려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희망을 노래 할 때입니다. 실망하고 포기하면 뭐, 우리 역시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어려울수록 희망을 이야기하며 힘을 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천신만고 끝에 200백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 앞에까지 왔지만, 이때가 바로 봄의 계절입니다. 모맥을 거두는 이 희망의 계절에 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길목의 요단은 우리로 말하면 홍수로 범람하는 한강물 처럼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건널 수가 없는 절망의 현장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까지 어떻게 이들이 왔습니까? 
분명 그들에게 계절의 봄은 왔지만, 그들의 마음은 더욱 얼어붙는 절망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 사실이 아닙니까? 저들에게 범람하는 요단을 건너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무지 일어날 수없는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여호수아는 제사장을 앞세우고 언약궤를 바라보고 요단강에 발을 잠그는 순간 요단강은 갈라지고, 이 강을 마른 땅처럼 건널 수 있었습니다. - 할렐루야!!

이제 광야 40년의 마침표를 찌고 마침내 그들의 앞에 놓인 범람하는 요단을 건너는 감격을 맛보게 됩니다. 이 감격의 순간, 이스라엘 백성은 그 고생스럽게 요단강을 빠져 나온 다음, “이제 살았다”라는 안도의 숨을 내쉰 것이 아니라 이 고생 속에서 그들은 두 개의 기념비를 세웁니다. 먼저 9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 있더라” 그리고 19,20절을 보십시오. 
“정월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치매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여기 공통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돌 열둘을 세워 기념비로 남긴 것입니다. 하나는 요단강을 빠져 나오자마자 제사장의 발이 섰던 그 장소에 세웠고, 또 하나는 여리고 성에서 동쪽으로 약 3.2km떨어진 길갈이라는 안전지대에 도착을 해서 열두 돌을 기념비로 세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단강을 건너는 긴박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기념비를 세우도록 시키신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그들이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4:6을 보면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표징”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 “오트”(Oth)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오트”란 말은 표시, 증거, 징조 등의 뜻으로 쓰인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이 열두 돌을 바라볼 때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요단강물을 멈추게 하셔서 자기들의 앞길의 장애물을 제거해 주셨음을 다시금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단강물을 멈추게 하셨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자기들과 함께 하셔서 앞길을 인도하시고 계심을 믿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열두 돌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내 인생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 그 분만이 내 인생에 유일한 구주와 주님 되심을 확신하고 내 인생 전부를 그 분에게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까? 여러분! 인생의 크기는 내가 믿는 하나님의 크기에 따라 결정됩니다. 내 인생의 크기는 내가 누구인가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의 크기는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우리가 큰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나의 능력이나 나의 경력이나 나의 세상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기 때문에 내가 큰 자라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사가 나타나고 그런 기적이 있었습니까? 그들이 원래부터 큰 민족이었기 때문입니까? 그들이 원래부터 그렇게 대단한 족속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알았습니다.

인간이 없는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없어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인간이 없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광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천군 천사로부터 영광을 받으십니다. 내가 없으면 하나님은 누구로부터 영광을 봅니까? 그것은 우리 생각입니다. 영원부터 그분은 영광을 받으실만한 분이십니다. 내가 없어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장 위대한 결정은 하나님을 인도를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때로는 행동하는 모험입니다. 인생 광야를 걸으면서 수많은 역경과 환난이 다가오지만 그때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러나 내가 그만큼 하나님을 신뢰할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다. 믿음의 결단을 갖고 하나님 앞에 행동해 나가는 것을 우리는 신앙이라고 합니다. 순간의 안정감에 인생을 내맡기지 않습니다. 비록 벼랑 끝에 설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삶을 우리는 믿음의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삼중고의 장애였던 헬렌켈러가 이런 말을 합니다. "안정이란 대개의 경우 미신이다. 우리가 안정을 참 좋아하잖아요? 안정적인 성장, 안정적인 부흥, 이런 것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안정자체가 미신이란 말입니다. 장기적으로 우리가 내다보면 몸을 내맡기는 것보다 위험을 회피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위험하니깐 여기 지금 있는 것이 안전하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가 위기를 향해서 몸을 내맡기는 것이 오히려 더 안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전함 때문에 위기를 회피하거나 모험을 회피해버리면 그것은 안정감이 아니라 그것은 미신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대담하게 나서는 모험이다.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 헬런켈러의 이야기입니다.

둘째로 요단강을 건너는 긴박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기념비를 세우도록 시키신 것은 다음세대를 향한 신앙 교육 때문이었습니다. 20절에 보면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하나님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후손들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확실히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당장 덮칠 것 같은 요단강을 일초라도 빨리 건너는 것이 급하건만, 하나님은 그 위급한 상황 가운데 강 한복판으로 되돌아가서 12개의 돌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념하고 자녀들에게 대대로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순간의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전부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당장 잘 먹고 잘살고,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급급하건만 하나님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한 신앙 교육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강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경제 발전을 위해 정신없이 달려온 한국, 이제는 먹고 사는 문제에서 어느 정도 해방된 오늘 날, 우리 다음 세대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가 얼마나 정확한가를 절감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돈과 시간을 들이며 공부에 매달리는 우리 아이들이 학교 시험은 기가 막히게 잘 치는지 몰라도, 갈수록 그들의 정신은 황폐히지고 있음을 결코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요즘 '첫 아시아인 아이비리그 총장'이라는 역사를 새로 쓴 김 신임 총장에 대해서 사람들이 엄청난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비리그라는 말은 미국 동부에 있는 8개 명문 사립대학의 총칭을 말하는데 우리 한국 사람들이 미국 유학을 가서 꼭 들어가고 싶은 학교들입니다. 여기에는 브라운, 컬럼비아, 코넬, 다트머스, 하바드, 펜실베니아, 프린스턴, 예일 대학이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조사한 통계가 있는데 미국의 명문 아이비리그에 재학하고 있는 한국 대학생들의 70%가 성적 하위권에 속한다고 합니다. 분명히 입학할 때는 성적이 백인 학생들과 비등한데, 입학 후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성취 수준이 낮아진다고 합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는 낙제를 하면 일년 정학을 시키는 제도가 있는데, 수년 전 10명의 아시아계 낙제생 중 9명이 한국인이었다고 합니다. 놀란 하버드대학교 학자들이 연구해 본 결과, 이들 한국계 낙제생들은 하버드 대학교 입학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지 그 이상의 장기적인 인생의 목표와 꿈이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가르쳐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꿈과 약속을 심어주지 못하면, 그들의 인생은 아무 의미와 가치가 없는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다음 세대에게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신앙의 힘을 체험케 하는 것,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지금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들의 각 분야에서 늘 톱클래스의 다수를 차지해 온 민족은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의 우수성의 비결에 대해 스탠포드 대학교 심리학자 잰슨이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들의 기본적인 IQ는 백인과 동등하며, 오히려 일본계나 한국계보다 다소 낮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무슨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부모에게서 교육 받은 신앙의 힘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께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특별한 자부심을 전수 받는데, 그것으로 인해 그들은 어느 곳에서 어떤 천대를 받아도 기죽지 않고 당당한 꿈을 갖고 산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살면 어디에서든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해서 무슨 분야에 뛰어들든지 머리가 되겠다는 비전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결정체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우리의 다음 세대에 ‘영적 부흥의 불길’이 필요합니다. 20세기 초는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던 민족의 수난기였지만, 그 당시 우리의 다음 세대는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을 배웠고, 기도를 배웠으며, 결코 꺽이지 않는 자유와 사랑의 정신을 배웠습니다. 그 당시 이렇게 교육 받은 코흘리개들이 현대 한국을 일으켜 세운 핵심 리더십이 되었습니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 교회는 다시 한 번 다음 세대의 메마른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불붙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분명한 사상과 도덕성, 따뜻함과 포용력을 품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정신이 고갈된 교육에 시원한 생명수를 붓는 길입니다. 고생을 모르고 풍요 속에 자란 한국의 다음 세대에게 우리는 길갈에 세운 열두 돌의 메시지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셋째로, 체험 신앙을 들려주기 위함입니다.

미국의 대참사 9.11 테러가 일어난 뉴욕의 쌍둥이 타워가 서 있던 곳에는 숨진 수천 명의 사람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인천항에 가 보면 인천 상륙 작전의 영웅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노르망디 해안에 가 보면 연합군의 상륙 작전을 기념하는 위령비가 서 있습니다. 길갈의 열두 돌도 엄청난 역사의 현장을 기념하는 상징적인 건축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기념비 자체만 가지고는 의미가 없습니다. 거기에 각자의 살아 있는 경험, 감동의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남의 얘기가 아닌, 나의 가슴에서 우러나온 내 체험담을 들려줘야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우리 솔직히 우리 속내를 한번 털어 놓을까요? 우리가 부모님을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습니까? 조금은 하지만 뭐든지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그러나 제 자식들을 향해서는 뭐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 아닙니까? 우리 자식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만약 그 자식을 잘 가르쳐서 그 자식이 좋은대학 들어가서 좋은 성공이 보장되어 있다면 우리가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파출부를 못하겠어요? 종살이를 못하겠습니까? 그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지난번에 어떤 TV에서 요새 노래방에서 노래불러주는 여성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분들을 취재를 했습니다. 제가 그것을 관심 있게 봤습니다. 독특한 부업 아닙니까? 노래방 가서 남성들 가운데서 노래 불러주고, 탬버린 쳐주고 그런 일만 해주시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한 시간에 이만 원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몇 분에게 PD가 질문을 했습니다. "왜 꼭 이 일을 하십니까?"했더니 모두가 한결같이 "내 자식 가르치려고 합니다. 과외시키고 학원 보낼려면 우리 남편 월급같고 안되고 내가 이렇게 벌어야만 그 자식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거기 나가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향한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저는 그 마음만은 이해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유학은 못 보내겠습니까? 나는 초근목피를 먹고 살아도 유학 보내서 그 자식이 잘된다면 우린 유학 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못해서 한이지요. 조금만 가능하면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팔 학군에 이사를 못 가겠습니까? 이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역대상 28장 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유언입니다. 마지막 자기의 아들 솔로몬에게 한 유언입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찌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여러분! 다윗이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유산으로 물려준 것이 뭔지 아십니까? 왕위였습니까? 부귀와 영화였습니까? 그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마지막 그가 그 아들에게 유언하면서 물려준 것은 유산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솔로몬아! 너는 내가 섬긴 하나님을 그 유산으로 물려받고 그 하나님을 정말 온전히 섬겨라. 그것이 이 아비의 간곡한 소망이다." 다윗의 유언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나중에 솔로몬이 그 부귀와 영화를 한몸에 누리지 않습니까? 그보다 더 높은 지혜, 그보다 더 영광을 누린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정말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그는 그 하나님을 잃어버리기 시작합니다. 부귀와 영화 때문에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방종합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 때에는 나라가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 아버지 다윗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기뻐 받으시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에는 아버지 때문에도 나라를 갈라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자기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나라가 갈라지는 비운을 맛봅니다. 믿음이 유산으로 상속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권력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백년 갑니까? 부귀와 영화가 백년 가겠습니까? 명예가 백년 가겠습니까? 좋은 가문 얼마나 가겠습니까? 수세기, 몇 세기 가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절대적이고 나머지는 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우리 자녀를 그렇게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무엇을 물려줘야 되겠습니까? 신앙의 유산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전 인생 속에 기념비를 세우십시오. 정말 우리 자녀들이 나를 보았을 때 '하나님을 저렇게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저렇게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내가 위기를 당할 때 저렇게 기도해야 되는거지..' 이런 신앙의 기념비를 우리가 매일매일 보일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극동방송국에 부사장으로 계셨던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인 주광조 장로님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순교한 지 1년 4개월만에 이 나라에 8. 15해방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 때 가족과 교회는 돌아가신 목사님을 생각하며 흐르는 눈물을 수없이 닦아가며 감사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 당시 그의 어머니는 위암으로 언제 돌아가실 지 모를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는데, 하루는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찾아와 어머니에게 돈과 남산동의 적산가옥문서 그리고 논밭문서를 내놓았다고 합니다.

항일투사인 주기철 목사의 숭고한 정신에 감복해 김일성이 보낸 포상금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완곡하게 사절을 하며 ?주목사님은 이 세상의 포상을 받기 위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순교했으니 하나님의 상을 받기를 바랄뿐이요!“ 완강하게 거절을 했습니다. 옆에 있던 자신은 마음에 커다란 갈등이 왔다고 합니다. “언제 돌아가실 지 모르는 어머니, 그렇다면 이 험한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기 위해서는 저 돈이 저 재산이 필요한데…” 어머니는 그런 자기를 의식하였는지 그들이 돌아간 다음 아들을 앉혀놓고 성경구절을 찾아 읽으라고 했답니다. 시37:25-26절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의롭게 산 자가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들이 구걸 당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저는 항상 은혜를 베풀므로 그 자손들이 복을 받았도다? 사실 주 목사님이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 주었습니까? 그렇다고 가르치기를 했습니까? 남겨준 물질적인 유산이라고 배고픔과 원망과 좌절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놓치지 않았던 것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엔 세상이 주지 못하는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엄청난 유혹 앞에서도 그 집문서를 뿌리 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묻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가난한 게 문제가 아니예요. 실직이 문제가 아닙니다.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를 만날 때마다 그 문제에 가려져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게 문제요, 감사가 메말라 가는 게 문제입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싶습니까? 잠언 14장 26절의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꿈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교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우리의 자녀들이 인생을 살면서 폭풍우와 비바람을 직면하게 될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삶의 폭풍우와 삶의 파도 앞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보라고 가르쳐야 합니까? 탈무드에는 이런 흥미 있는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재산을 남기고 양식 있는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지식을 남기고, 지혜로운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신앙을 남긴다."

이제 우리 교회는 수요일부터 이런 저런 자식들을 끌어안고 기도하려고 합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이 땅에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모든 어머니들과 함께 자녀를 위해 기도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누가 예외가 있겠고, 여기에 누가 기도 없이도 살아갈 자신만만한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머니 기도회가 빨리 교회에 시작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바로 세워지기를 원하는 사랑입니까? 이 어머니 기도회는 누구나 다 와서 기도하는 자리입니다.

자녀 교육은 대충대충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들여야 하고, 정성을 쏟아야 합니 다. 부모가 열정으로 거듭 가르치는 믿음의 훈련 없이는 이 세상의 가치관과 문화의 영향력에서 자녀들을 지켜 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화급을 다투는 요단강 도하 한가운데서 길갈의 열두 돌을 가져오게 하실 정도로 자녀 교육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당장 바쁘고 힘든 현실의 일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십시요. 오늘 자녀에게 어떤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까? 자식의 장래 기도하는 어머니의 무릎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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