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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가 사는 법 (빌 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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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사는 법 (빌 2:6~11)

  
로마서는 바울의 여러 편지들 중에서 분량도 가장 많을 뿐 아니라 그의 신학을 가장 잘 표현한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구원론은 당시의 분위기에서 생각해보면 전혀 새롭고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내려주신 율법을 지키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폐기하고, 예수를 통해서 열려진 새로운 구원의 길...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고 말하는 그의 주장은 이방인들의 입장에서는 문자 그대로 복음이었지만, 율법을 자랑하던 유대인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바울은 가장할 수 있는 여러 질문을 전제로 해서 체계적으로 조리 있게 자기의 신학을 펼쳐 나갑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 그는 이런 질문을 가정하면서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창세기 15장 6절 -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는 대목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그의 행위가 아니라 그가 가진 믿음이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스스로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얻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구원론을 전개하면서 가정하는 질문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우리들 모두가 오로지 예수 한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 세상 모든 사람이 오직 예수 한 사람을 믿는 일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되는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문제이지요. 그는 이렇게 문제를 가정해 놓은 다음에 자기 스스로가 해답을 제시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이 문제에 대해서 대답을 할 수가 있을까요? 만약에 이 질문에 대답을 잘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엉터리라는 말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우리에게 사망이 어떻게 오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망은 오직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함을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사망이 들어오게 되었고,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죽음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그 반대도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담을 통해서.. 그 한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망이 세상에 이르게 되었다면... 바울이 ‘제 2의 아담’이라고 말하는... 예수를 통해서 죽음을 넘어선 생명이 우리들 속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 그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다면, 넘치는 은혜와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지배할 것이 아닙니까?’(로마서5:17-표준새번역) 
  
이렇게 아담과 예수를 대조하는 사도 바울은 참으로 천재적인 통찰력으로 우리의 믿음의 길을 비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아담과 예수를 비교하면서 아담에게는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길이 담겨 있고, 예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게 되는 생명의 길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담기에도 잔인하고 참혹한 이야기들을 많이 접하였습니다. 은퇴한 프로야구 선수가 힘없는 한 가족 네 모녀를 살해하고 끝내는 자기도 죽음을 선택한 이야기를 접하고 참으로 당혹스런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지난 성탄절 오후에 안양에서 없어진 두 소녀 중에서 한 아이가 아주 참혹한 상태로 죽음을 당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것인지... 생각하기조차도 싫은 일입니다. 저는 이 사람들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들 배후에 숨어 있는... 결국 모든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 몰게 되는 아담의 모습을 이들 가운데서 발견하였습니다. 아담 한 사람이 불순종할 때... 그 결과는 그 자신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과 극복할 수 없는 아픈 상처를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담은 하나님이 지으신 최초의 인간입니다.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으며, 하나님의 동산을 다스리며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이러한 아담에게 어느 날 유혹이 찾아 왔습니다. 뱀은 아담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구분하는 나무의 열매를 금하신 것은 네가 죽을까봐 그런 것이 아니야... 네가 눈 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까봐 그러신 거야...’ 아담의 귀가 활짝 열렸습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니...’ 

오늘을 만족하면서 살아가던 그에게 하나의 욕망...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그동안 가까이만 가도 두렵게 느껴지던 선악과가 얼마나 아름답고 탐스럽게 보이는지... 그는 그만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선악과를 움켜쥐고는 그것을 입에 넣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지요. 이것이 결국 최초의 인간들을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일이 되고 말았지요. 하나님은 그들을 동산에서 추방시키셨습니다. 다시는 그들이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천사들을 시켜서 화염검으로 그 길을 지키도록 명하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렇듯 아담이 보여주었던 행동양식을 오늘 우리들을 통해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아담이 오늘의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듯... 만약에 우리에게도 그런 기회만 있다면... 우리들도 얼마든지 사단의 제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한 가족을 살해한 사람은 그 직업이 프로야구선수였습니다. 지난 냉전시절에 야구는 자본주의 적인 성격이 가장 강하게 배어있다고 해서 일부 사회주의 국가들이 야구를 금지했던 시절이 있었지요. 야구가 올림픽 종목에 정식 채택된 것도 얼마 되지를 않습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주 잘 나가는 야구선수였습니다. 그러다가 은퇴를 하였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결혼식장을 했었나봅니다. 만약에 그의 욕심이나 사업에 대한 의욕이 거기서 머물렀더라면... 이런 비극은 생기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가 남긴 부채가 무려 270억원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소위 스크린 경마라고 하는... 저는 잘 알아도 못하는 것인데... 아마도 사람들의 요행심리를 자극하는 도박성이 강한 사업인 모양입니다... 거기에 손을 댔다가 그만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되었으니 그 자신 뿐 아니라 그를 통해서 파멸의 길에 이르게 된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더 높아지려고 하고... 더 많은 것을 움켜쥐려하는 욕망... 그러한 욕망이 급기야는 하나님의 정하여주신 인간의 법도나 갈 길을 버리고 다른 길을 선택하는 불순종하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많은 피해를 입히는... 결국 아담 한 사람이 잘못된 길을 선택함을 통해서 나타는 결과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이야기는 오늘 우리들을 통해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사도 바울이 소개한 옛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이신 예수를 찬양하며 불렀던 찬송시입니다. 말씀을 잘 살펴보면 그들은 정말 주님이 추구하셨던 삶을 잘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간결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예수는 어떻게 세상을 살았는지... 예수가 사는 법은 어떠했는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v. 6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는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똑같으신 분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자신의 특권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에 우리가 새벽 시간을 통해서도 말씀을 생각한 것이지만...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조롱하는 이야기들 중의 하나는 예수가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마가복음15:31) 사람들은 예수를 조롱하려 이 말을 하였지만... 여기에는 예수의 삶에 대한 참된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않은 사람... 그가 바로 예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유독 자기에게만 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독특한 능력을 그는 철저히 남을 위하는 일에만 사용하였지, 자기를 위해서는 조금도 사용하지를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그에게는 자신이 사십 일 동안을 굶주리면서 기도하신 후에 돌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사단의 권유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단호하게 이런 제안을 뿌리치셨습니다.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었습니다. 후에 예수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도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기도 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살지 않으려하시는 예수... 이러한 예수의 정신이 하나님과 같은 대접을 받아서 마땅하지만 그 모든 것을 포기하시는 행위를 통해서 잘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은 또 이렇게 예수의 삶을 소개합니다. 

v.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함을 취하려 하지 않으시고는 오히려 그런 모든 특권이나 영광을 다 버리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는 아담과는 정반대 편에 서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아담의 마음을 움직인 동기는 무엇입니까? ‘너는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하나님도 그것을 부담스러워 하고 두려워하고 계셔...’ 아담은 인간이지만...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에 눈이 어두워지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는 달랐습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처럼 높아지고 대접받는 것을 버리셨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선택이 사람들과 같이 되는 행위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예수가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는 대목이 참 좋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의 삶을 인정해주시고 사랑하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것이지요. 한 젊은 남녀가 있다고 칩시다. 서로가 사랑하고 결혼을 했는데 그만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고서 결혼을 하였습니다. 화가 난 부모는 그들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고는 연락도 없습니다.  j처음에는 이렇게 완강하지만... 결국에는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서 부모들이 노여움을 풀고 그들이 사는 집을 찾아옵니다. 그러면 다 되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는 우리는 이제 너희들을 다 용서했어... 너희들을 부부로.. 너희들을 내 자녀로 인정해준 거야... 예수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것 속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셨던 모든 분노와 노여움을 푸시고 우리들을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로 맞아 주시는... 생각해보면 이것처럼 우리에게 감동적이고 기쁜 일은 없습니다. 그가 하늘에서 내려오셨기에... 그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밝아지게 되었고, 우리들의 삶은 잃어버렸던 존엄성과 가치를 다시금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인생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하여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세상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이 더 이상 우리를 버리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비로소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일은 결국 예수가 자기를 비우는 일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곧 자기를 희생한다는 듯이 담겨 있습니다. 더 이상 자기를 고집하거나 내세우지 않고 자기를 희생함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심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가 사는 인간 세상이 천국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예수는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살길이 있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들의 문제나 비극은 우리는 언제까지나 자기를 비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끝없이 자기를 채우려는 욕망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예수는 자기를 비우심을 통해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었고, 그를 통해서 모든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욕심 때문에 나와 너의 관계를 파괴시키며 상대방을 파멸의 길로 이끌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 예수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v.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는 높고 존귀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자기를 비우심을 통해서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것... 이것만해도 굉장한 일인데... 예수는 이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없으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을 하고 나타난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낮고 겸손한 삶을 추구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신 삼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탄생이야기부터 극적인 것이었지요. 동방의 박사들은 왕으로 태어 나셨으니 당연히 왕궁에 게시겠지... 이런 생각을 했지만 예수는 베들레헴 변방의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여기서부터 예수의 독특한 인간 여정이 시작된 것이지요. 당시 사람들에게 인격적인 대접도 받지 못하던 세리나 죄인들... 예수는 일부러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이 예수에게는 붙여졌습니다.
  
이렇게 예수가 걸어간 길을 생각하며 사람들은 그의 삶을 ‘자기를 낮추시고 복종하신 삶’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복종하셨다는 것... 여기서 연결되는 요즘 한창 각광을 받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섬김’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추구하신 삶을 섬김이라는 단어보다 더 잘 설명할 말은 없습니다. 그분은 또한 누구처럼 ‘나는 섬기는 자가 되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었지만.. 묵묵히 섬기는 자로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는 이것 때문에 제자들과 다투기도 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남을 섬긴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없는 일이었던 것이지요. 그래도 예수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막10:43)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세상에 온 목적도 섬기는 일에 있음을 밝히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는 자가 되고...’(막10:45) 
   
아마도 섬기는 자로서의 예수의 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것은 바로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일이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한 자리에 있었지만, 그들의 발을 씻어 주면서 그들을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씼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한복음 13:14) 서로가 서로위에 군림하려 하지 말고 겸손하게 섬기는 자가 되려하는 것... 바로 여기에 우리가 살 길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해보면 예수가 추구하신 삶은 최초의 인간 아담의 걸어간 길하고는 정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담은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하나님과 같은 분이셨지만, 스스로 마음을 비우시고 그 자리를 버리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되고 싶었고, 예수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가 선택한 삶의 방식은 비움과 낮아짐과 섬김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비움으로써 진정 사람이 되시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셔서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 주시고 진정한 위로자가 되어 주시는... 정말 예수는 누구보다도 사람답게 세상을 상아 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비해서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 했던 아담은 결국에는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려 하는... 그럼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도 멀어지고 사람으로부터도 멀어지는 소외된 존재로 세상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예수가 추구한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복종하고 사람을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비해서 아담은 하나님의 법도를 어기고 불순종함으로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예수가 섬기고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면... 아담은 불순종하는 길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예수는 우리들 모두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되었지만, 아담은 우리들 모두에게 사망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우리들에게는 아담의 길 아니면 예수의 길... 이 두 가지의 길이 우리의 앞에 주어진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우리들이 이제까지 어떤 길을 선택해 왔는지... 어떻게 세상을 살아 왔는지... 우리들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 가운데서 우리는 더 철저하게 아담이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높아지기 위해서 몸부림쳐야하고... 자기를 비우기는커녕 더 많은 것을 움켜쥐기 위해서 몸부림쳐도 시원치 않은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섬기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살겠습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에 복종하면서 사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껏 아담의 후예로서 아담처럼... 아담보다 더 지혜롭고 현명하게 살아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정도 살아왔으면 아담처럼 사는 일이 그렇게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자기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길을 선택했던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 스스로에게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이웃과의 관계도 무너져버리고 마는... 우리는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더 살기 좋은 낙원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오히려 낙원과는 상관이 없는 곳으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그런 결말이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 그런 자리에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지만, 오늘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십자가로 끝이 난 것이 되고 말았는데... 이제 우리는 고난 주간을 맞이하며 한번쯤은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 십자가에 이르는 길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서 있습니다. 오늘 초대 교인들이 고백한 예수의 삶은 결국 십자가로 이어집니다.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가장 매력 없는... 아무도 그렇게 살려 하지 않는 길을 하늘에서 오신 예수는 걸어  가신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가 걸어가신 십자가에 이르는 고난의 길은 자신과 모든 사람을 위한 진정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가 사는 법은 지금 당장은 손해를 보는 일이고... 자기를 죽이는 일이고... 자기가 가진 꿈이나 소중한 생각들을 포기하는 일일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십자가가 마지막은 아닙니다. 오늘 예수를 향한 초대교회성도들의 찬양은 단지 십자가에서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의 찬양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남다른 길을 걸어갔던 예수의 삶의 결말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완전히 파멸로 그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그렇게 끝나는 것처럼 보였던 예수의 삶이었는데... 그는 돌연 모든 이름들 중에서 가장 존귀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물론이고... 그를 멸시하고 배척했던 사람들까지도... 이제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당신이 우리의 구세주라고... 당신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삶의 기쁨과 감동을 누리며 살게 되었노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의 운명을 바뀌게 하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라고 그렇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생각해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려 하였던 아담... 그러기 위해서 불순종의 길을 택하며 하나님을 등졌던 아담... 그에게 돌아온 것은 낙원에서 추방을 당하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선택은 오늘도 하나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비우고, 낮아지고, 종이 되어서 섬기는 자의 길을 선택하신 예수... 그는 스스로 낮아지는 길을 선택하셨고 그 결과로 가장 비참하고 낮은 모습으로 세상을 살았지만... 그를 통해서 세상은 밝아지고... 모든 사람들은 진정한 생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지를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누구보디도 존귀하고 높은 자리로 그를 올리셨습니다. 
  
저는 우리가 보내는 이번 한 주간이 예수가 제시하시는 진정한 삶의 길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를 비우는 일로부터 전혀 다른 길을 보여주셨던 예수... 그가 걸어가셨던 삶이 우리들 모두의 것이 될 수 있기를...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한 없이 낮아져야하겠고... 그리고 우리의 삶에 결말은 오로지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나 스스롤 높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목적에 자신을 복종시키면서... 예수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새로운 생명을 전파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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