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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 살전 5: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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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금년에도 내가 원하고 바라는 계획과 일들이 그대로 이루어 졌으면 좋겠다. 내 기도가 내 생각대로 다 이루진 다면 정말로 하나님께 넘치도록 감사하겠다......” 이런 소원을 가지고 금년을 시작한지 벌써 한 달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하신 기도와 소원을 보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들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시103:3-5절에 보면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의 소원을 들으시고 또한 만족케 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소원 그대로 다 들어주신다면 아마 이 세상은 대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 집도 아들을 원하고, 저 집도 아들을 원하고 모두가 가 다 아들만 원한다고 합시다. 우리의 소원 그대로 다 된다면 이 세상은 온통 남자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 적년 기가 된 처녀들의 결혼 대상자에 대한 소원을 보면 키는 175센지 이상에다가 신체 건강한 남자....등등입니다. 만일 이러한 소원대로 다된다면 키 작고 몸이 좀 약한 총각들은 평생 총각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원을 갖되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혹 어떤 일이 내 소원대로 되어지지 않았을 찌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에 대하여 묵묵히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옛날 미국의 남북 전쟁 때 일입니다. 남군, 북군은 모두가 다 하나님을 섬기는 한 민족입니다.그러나 노예 문제로 남과 북이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북전쟁 중에 아브라함 링컨이 이끄는 북군과 온 백성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하나님! 이번 전쟁에서 꼭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리 장군이 이끄는 남군도 역시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의 기도와 정성은 동일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북군은 승리하였고 남군은 패하고 말았습니다.
 북군과 그 백성들은 개선가를 부르며 하나님 앞에 감사였습니다. 그러나 더욱더 놀라운 것은 남군의 리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음에 대하여 하나님께 원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에 대하여 조용히 하나님 앞에 감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불행이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의 뜻을 억지로 성취하려 할 때 생기는 부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인간의 행복이란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존중히 여기며 그 뜻에 순종하는 삶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복되심을 믿고 순종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진실하심을 믿고 순종하는데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determined will'---결정적 의지와 'desired will'---소원적 의지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하나님의 뜻이 있고 소원적인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정과 섭리, 지혜와 능력과 권능’... 등등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절대적 주권은 결정적인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이것은 의도적이며 포괄적이며 무조건 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변하며 불가항력적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의지로 그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반면에 소원적 의지가 있는데 그것은 인격적이고 개인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원 적이고, 선택 적이며, 조건 적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우리 모두가 각각 소원을 가지고 금년을 시작했습니다. ‘금년에는 온 식구가 건강하게 하옵소서’ ‘문제 하나 하나가 해결되고 사업에 번성을 원합니다’ ‘자녀들이 주안에서 믿음도 잘 자라게 하옵소서’..등등 소원이 있습니다. 어떤 여건에 준한 것이 아니오 처음부터 가진 소원입니다. 이것이 소원적 의지입니다. 우리는 그 소원에 맞도록,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고자 이를 위해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소원이 무엇입니까? 본문에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은 기쁨과 기도와 감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소원적 의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이 말씀을 보면서도 그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소원은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환경을 초월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어떤 경우에서든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지극히 환경 적입니다.
조건적이요, 종속적입니다. 그러므로 있으면 기뻐하고 없으면 슬퍼합니다. 성공하면 좋아하고 실패하면 원망합니다. 잘되면 기도하고 안되면 그만둡니다. 기도도 답답하면 하고 조금 열리면 하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를 보든지 연초에는 다른 때 보다 새벽기도에 많이 나옵니다. 어느 때보다 문제가 많고 소원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고3 자녀를 둔 부모들이 너도나도 나옵니다. 만일 떨어지기라도 하면 엄마, 아빠가 기도 안해서 털어졌다고 할 판이니 적어도 그 원망은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하여 열심히 나와서 애를 쓰는 것까지는 고마운 일이고, 잘하는 일인데, 시험이 끝나면 그 다음날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럴 때 기도하고, 저럴 때 안하고, 이럴 때는 조금 진실하게 하고 저럴 때는 건성으로 하고 ----사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단순히 원하시는 것이 아니오 나아가 이 소원적 의지를 결정적 의지로 바꾸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그런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여러분! 어느 때에 기쁨이 있습니까? 어느 때에 기도합니까? 어느 때에 감사합니까? 실제적으로 보면 이것은 아주 조건적이요, 상대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었다가 빼앗고, 성공했다가 실패하고, 건강했다가 병들게 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고는 기뻐할 줄도 모르고, 기도 할 줄도 모르고, 감사 할 줄도 모르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못 가졌다가 가지면 기뻐합니다. 모르다가 알게 되면 기뻐합니다.
좀더 가지게 되면 좀더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간적입니다. 다시 원망이 생깁니다. 더 못 가진 것을 원망하게 되고, 더 배우지 못한 것을 원망하게 됩니다. 본래 인생들의 기쁨이란 이런 것들입니다. 지극히 찰나적이고 가변적입니다. 잃어버렸다가 얻고, 혹 병들었다가 낫게 되는 거기에 기쁨이 있다는 말입니다.
 감사도 그렇습니다. 어느 때 감사합니까? 가만히 보면 자동차 사고라도 크게 나서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야 감사를 합니다. 병에 걸려도 감기 정도는 어렵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다가 겨우겨우 살아나야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랬다 가도 얼마 지나고 나면 ‘그때는 아마 그 약이 효험이 있었나 봐’그래 버리고 말지요. 사람이 이토록 간사하고 변덕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죽을 지경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감사 할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나라의 공산권이 무너짐에 따라서 그곳 여행이 상당히 자유스러워 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여행하고 돌아왔는데 현격하게 다른 점 하나가 있다면 그들은 ‘고맙다’,‘감사하다’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혁명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혁명이란, 그 말 자체의 개념을 깊이 상고해 보면 나 아닌 다른 사람, 나 아닌 사회에 그 책임이 있다는 사고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이러한 철학을 근거로 혁명을 일으키고 공산주의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가난한 것은 부유한 사람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가 고생하는 것은 부르주아와 때문이다. 사회가 혼난 한 것은 정치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진 자, 아는 자, 높은 지위에 있는 자는 다 죽여야 한다.----이것이 혁명 철학입니다. 혁명하는 사람 치고 모든 잘못이 내게 있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합니다. 이를테면 사회 구조니, 정치 구조니 하는 것에 원인을 두고 투쟁하려 듭니다. 투쟁하여 얻은 것에는 감사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예에게도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뿌리」라고 하는 영화를 보면 물건처럼 팔려 다니면서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모릅니다. 죽을 수 없어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사는 그들에게 감사가 있겠습니까? 누가 빵 한 조각을 준들, 누가 따뜻한 옷 한 벌을 줄들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것을 받아도 노예이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노예라고 하는 것 때문에 평생을 감사 없이 살아갑니다. 또 감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식민지 백성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나라를 빼앗겼다는 서러움 때문에, 또 그 원한 때문에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식민지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정배 당한 사람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그 사실 하나로 그는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예나 머슴, 혹 품삯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내가 수고한 대가를 당연히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돈벌이 위해서 일한다. ---- 이런 보수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예).어느 미국에 사는 교포의 가정 이야기입니다 만은, 만일 이러한 가정이 있다면 정말 불행 할 것입니다. 아내가 무엇을 하다가 돈이 좀 부족해서 출근하는 남편에게 조릅니다. 남편은 월급 가져다주었는데 무슨 돈이 더 필요하냐, 달라, 못 준다 실강이가 벌어집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돈이 있어야지요. 하는 수없이 감추어 둔 비상금을 꺼내 주며 투덜거립니다. ‘결혼한 이후로 빼앗기기만 하니 아침마다 강도 만난 기분이다. 나는 이 식구들 벌어 먹이느라고 고생만 하는 머슴이다.’ 이 소리를 들은 아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 집 식모다. 밥해 주고, 청소해 주고, 아이 낳아 키워 주고....월급 한푼 못 받으면서 이 고생을 한다.’ 이렇게 서로 아옹다옹 다툽니다.
 사실 이 집은 머슴과 식모가 사는 집과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머슴 노릇하지는 않습니까? 혹 나는 이 집의 식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는 한 아무런 기쁨이 없습니다. 영원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 생각해 봅시다. 빌립보서를 보면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애매히 로마 감옥에 투옥이 됩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볼 때에 절망과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빌립보서에는 ‘기뻐하라’는 말이 무려 열 세번이나 나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의 별명이 ‘희락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사도 바울의 기쁨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의 처한 환경에 연유한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로 그는 충분히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주님과 함께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으로 아주 만족해하였습니다. 이제는 거꾸로 가든지, 바로 가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절대적 감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의 근원이 되시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의 경우를 놓고 생각해 봅시다. 결혼이란 본래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고 행복해야 하는 것이 결혼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다이야 반지를 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집이 크니, 작으니 하는 문제들로 결혼이 아주 복잡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상대적입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저 배우자가 건강하니 고맙고, 먹고 살 수 있으니 고맙고, 그리고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니 고마운 것입니다. 이 밖에 더 바라지 않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철학을 가지기 위해서는 큰 일을 격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고난 속에서, 시련 속에서, 많은 변화 속에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사람이 되도록 오늘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약1:2-4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연단 속에서 기쁨과 감사의 참된 비결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벧전1:7절에 보면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그랬습니다.

 성도는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마지막 날에도 영광과 존귀를 얻을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성숙한 자리에 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기뻐하라 하신 것입니다.
 로마에는  카타콤(catacomb)이라고 하는 유명한 지하 묘지가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수많은 성도들이 극심한 박해를 피해 살다가 그곳에 그대로 죽어 묻힌 곳입니다. 그 카타콤 벽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고 합니다. ‘이 어두움 속에 빛이 있습니다. 이 무덤 속에 아름다운 음악이 있습니다’----이러한 신앙적 낙천주의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철저하게 훈련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찬양입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유를 얻은 사람은 그 자유 하나로 만족합니다. 지금 쏘련 국민들은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묻기를 ‘자유화된 후 경제적으로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우냐’고 위로의 말을 하면 그들은 하나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자유를 되찾은 것으로 만족한다’고 합니다. 전에는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탄광으로 끌려가기 일수요, 심지어는 숙청 당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마음대로 말할 수 있어서 좋다는 것입니다.‘일년에 백만 명씩 숙청 당하면서 유지해 온 체제가 아닙니까? 되찾은 자유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굶어도 좋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자유 하나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자유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가끔 식당에 가보면 중국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부부가 식당에서, 혹은 아내는 파출부로 남편은 막노동판에서 일하고들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대학을 졸업하고 교편생활을 하던 분들도 있습니다. 오히려 중국에서보다 더 많은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그들은 정말 만족해합니다.
 얼마 동안 더 고생하면 본국으로 돌아가서 집도 사고, 가게도 낼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자동차 부럽지 않습니다. 좋은 집이 있어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이 자유로운 나라에 와서 마음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그 자유 하나로 그들은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더 바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고, 더 귀한 것은 우리의 본향 저 천국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중국 교포가 여기선 좀 고생하더라도 그들이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살이가 좋다 할 지라도 천국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기쁨과 감사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지나간 모든 일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앞으로 다가올 무든 사건을 신앙 적으로, 소망 적으로, 긍정 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이 뜻을 따라 살 때에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면 모든 일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 없는 기쁨 있을 수 없습니다. 감사 없는 기도는 진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쁨 없는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성도, 쉬지 않고 기도하는 성도,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서 금년이야말로 하나님의 복된 뜻을 크게 이루어 드리는 진정으로 복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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