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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왕상 1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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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왕상 19:1~18)

의사요 심리학자인[폴 트루니에]는 현대인에게는 공통된 시대적인 병이 있는데 그것은 고독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많은데 고독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어울려 살지만 철저하게 혼자처럼 살아가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학교도 직장도 함께 모여서 우정을 나누고 진정한 사랑을 나누던 시대는 지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옛날에는 친구의 기쁨이 곧 내 기쁨이고 동료의 출세가 곧 내 즐거움이었었는데 지금은 친구가 성공했다는 것이 곧 내가 실패 했다는 것이고 동료가 출세했다는 것이 곧 내가 패배했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으니 여기에 무슨 인간미가 있고, 사랑인들 있겠습니까? 이게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요, 이게 바로 현대인의 고독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고독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기 때문에 고독하다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부터 기대치가 너무 컸습니다. 남을 짓밟고라도 올라서려고 했던 고지가 애초에 높았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그만큼 실망도 큰 것이지요. 그다음에는 자기 자신을 누군가에게 주면서 살아야 되는데 아무에게도 나를 줄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에서 실망하고 삽니다.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할 만한 사람이 없고 내 사정을 드러내놓고 말할만한 사람도 없어서 누군가를 만나지도 못하고 마음 편히 전화를 걸 만한 그런 대상도 없는 이것이 곧 고독입니다. 

[폴 트루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실제로 사람은 누구도 자기 혼자서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현대인의 이 고독의 원인은 지나친 경쟁과 비교의식에서 자기존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나 일 뿐입니다. 남하고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 비교할 것이 못됩니다. 또 젊은이와 나이든 사람, 역시 비교할 것이 못됩니다. 전혀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인데도 불구하고 아니 비교할 필요도 없는데 우리는 은연중에 비교하면서 사는 가운데 진정한 자기존재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 삶이 나 혼자만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데에서 고독에 빠지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스스로 고독하려고 하는 극단적 개인주의입니다. 그리고 이미 모든 삶에 있어서 그 스스로의 고독 속에 빠졌으면서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어느 날 부인이 남편에게 묻습니다.“당신은 다시 태어나면 누구랑 결혼하고 싶어?”그러자 남편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합니다.“아, 그거야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하고 결혼하지 누구랑 하겠어?”그러자 아내가 정색을 하면서 대답합니다.“아니, 누구 맘대로? 당신은 왜 매사에 당신만 생각해! 내 생각은 조금도 안 해?” 하더랍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이럴 때 하는 말이<동상이몽>이라고 합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정말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본적이 얼마나 됩니까? 같이 사는 부부라 하더라도 저 사람이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대부분이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게 서로 함께 있지만 고독한 것입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있기는 하지만 실상은 외로움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지나친 탐욕이 때로는 고독하게 만듭니다. 어떻게 보면 적당한 욕심은 목적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분에 넘치는 지배욕이나 탐욕, 그리고 지나친 소유욕이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만족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합니다. “조금만 더...조금만 더...”라는 욕심에 빠져서 현재 처지에 대해서 만족해하지 못할 때 그것이 곧 자기만의 고독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반항과 비판과 질투에 자기 자신을 빼앗길 때 그 결과로 인간은 고독 할 수밖에 없고 그 고독 속에서 고생하며 살고 있다고[트루니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것들이 우리를 고독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스스로 고독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고독 속에 빠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고독한 사람이 나옵니다. 현대판 고독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오늘 엘리야가 왜 고독할 수밖에 없었느냐를 보면 몇 가지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도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가장 먼저는 배가 고팠습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앞에 놓였습니다. 사람이란 게 좀 독특합니다. 배가 고프면 배만 고픈 게 아니라 이상하게 슬퍼집니다. 그리고 배가 고프다 고프다가 나중에는 배가 아파집니다. 그런데 배만 아픈 게 아니라 요상하게도 눈물이 납니다. 정말로 배고프면 아무생각도 없고 다만 인생이 슬퍼집니다. 오늘 엘리야가 몹시 배고픈 시간이 왔습니다. 먹을 것에 주리고 목마른 상황에서 힘들어하다가 그것이 영적고독으로 이어집니다. 

또 하나는 무기력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고 하더라도 내가 극복할만한 그런 능력만 있다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런데 내가 아무래도 쓸모없는 존재요, 살아 있을 아무 의미가 없다는 무기력을 느끼는 순간 인간은 한 없이 약해집니다. 내가 쓸모없다는 걸 내가 알고 많은 사람에게까지도 귀찮은 존재라고 생각 되면 그때부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내가 무엇을해도 반갑게 여기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엘리야가 지금 그러고 있습니다.“나 혼자뿐입니다. 다 죽고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라는 말을 보면 사방을 둘러보아도 오로지 홀로 있다는 그 깊은 고독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으로 이어지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고독의 징후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허탈감입니다. 엘리야의 현재 상황을 가만히 보면 엘리야가 가난하고 어렵고 병들고 그래서 고독해진 게 아닙니다. 사실은 갈멜산에서 아합의 선지자들과 싸워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큰 사건 뒤에 고독해진 것입니다. 혼자 나가서 바알신의 선지자들과 아세라 목상 선지자 850명과 대항을 해서 이겼습니다. 그랬더니 아합왕의 부인 이세벨이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이를 갑니다. “내일 이맘때면 너도 시체가 되어 있을 것이다.”며 반드시 죽이겠다고 협박하자 엘리야가 광야로 도망을 가서 지금 이렇게 고독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세요. 지금 엘리야는 큰 승리 다음에 찾아 온 고독 속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실패할 때 고독할 것 같지만 오늘 성경을 보니까 성공할 때 더 고독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패도 사람을 고독하게 하지만 성공이 사람을 고독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말은 인간은 언제든지 고독할 수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자, 이렇게 엘리야는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결국“하나님 나 죽여주세요. 더 살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자기 생명을 포기하는데 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빅터 프랭클]이라는 의사가“사람은 살아가면서 가치결정을 하고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인간의 가치를 말하고 있는데 첫째가 창조적 가치입니다. 사람은 뭔가 새로운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새로운 것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구태의연하게 살아가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인간의 가치란 계속해서 창조하는 거기에 그 삶의 가치가 있다고 했고, 두 번째는 경험적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인생이란 경험을 넓혀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경험도 저런 경험을 하고 이런 사람도 만나고 저런 사람을 만나면서 성숙해가고 배워가는 것이라는 경험이 아주 중요하다고 합니다. 세 번째가 태도 적 가치입니다. [프랭클린]은 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마지막 태도 적 가치라고 합니다. 태도 적 가치란 무엇이냐 하면 어떤 사건을 만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건 앞에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가 오느냐 하는 것도 나중의 문제입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건을 소화하느냐 하는 태도 적 가치가 그 인간됨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고민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이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 외에는 누구나 고민한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 고민 앞에서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 얼마나 적극적으로 얼마나 긍정적으로 얼마나 신앙적으로 사느냐가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지요. 

오늘 이 시점에서 엘리야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스스로  자신이 쓸모없다 생각하면서 고독에 빠져서 죽여 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엘리야가 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15절을 보세요“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형편을 한탄하며 절망하고 고독해하는데 하나님은 중요한 일을 시키십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엘리야는 세상에 홀로 남았다고 고독해하는데 하나님은 오묘한 말씀으로 그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18절입니다.“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자, 보세요. 엘리야는 자기혼자라는 생각을 푸념하듯이 내뱉고 있는데 하나님은 엘리야 외에 칠천 명이 더 있다 하십니다. 또한 엘리야는 그 동안 자신이 감당해왔던 선지자의 일, 곧 하나님의 일이 자기에게서 끝나는 줄 알고 더 허탈해 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엘리사라는 후계자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계속됩니다. 사람의 일은 중단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일은 절대로 중단이 없습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나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라고 낙심할 것도 아니요, 절망할 것도 아니며 더 더욱이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나에게서 끝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로 연결 지어질 수 있도록 내가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나만 잘 믿다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내 자식의 자식 또 그 후손까지 이어지도록 하기위해서는 지금 내가 잘 믿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나를 통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고 싶어 하십니다. 나는 절대로 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실패로 얼룩진 과거마저도 버려진 과거가 아닙니다. 지금의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위한 과거입니다. 모세가 홀로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그때 나이가 80세입니다. 80년 동안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지난 80년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버려진 80년이 아니라 오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과거였음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과거에 얼룩지고 패배한 많은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오늘이 있게 하셨고 현재도 아파하는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고독합니다. 함께 어울려 사는 것 같은데 돌아서면 외롭습니다. 신앙생활이 힘들고 무거워서 왠지 혼자인 것 같습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서 도무지 헤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해도 아직도 어렵습니다. 언제나 내 사정이 나아질까 해봐도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고 곧 절망에 다다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결코 혼자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속에서 또한 내일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나를 통해서도 중요한 일을 하시려고 합니다. 나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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