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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안목으로 바라보자 (창 42:36~38, 롬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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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안목으로 바라보자 (창 42:36~38, 롬 8:28)


사람들은 주어진 인생의 길을 가면서 여러 가지 잃어버리는 사건을 만난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사건은 자식을 잃어버리는 사건이다. 우리교회에 와서 가슴 아픈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고기 잡으러 가자고 조르는 아이를 데리고 아버지가 따라 나섰다. 고기 잡는 족대를 들고 아이는 고기 담는 그릇을 들고 냇길에서 고기를 잡는데 뒤돌아 보니 고기 그릇을 들고 있어야 할 아들이 없어졌다. 냇길에 파놓은 웅덩이에 들어가서 아이가 물에 빠졌는데 아버지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그 길로 아이는 물 속에 사라지고 익사하고 말았다. 얼마나 안타깝고 얼마나 사무치는 아픔인가? 

나는 그때 여름 수련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짐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다급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문을 열어주니 “종필이가...종필이가 물에 빠졌어요!”라며 알려주는데 하늘이 노랗게 되고 정신없이 개울가로 뛰었다. 냇길 쪽에 엄마도 달려와 울며 땅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는 물 속에서 찾지 못하고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동네 사람들이 가져온 배를 타고 들어가 아이를 찾는다고 장대를 가지고 보이지도 않는 물 속을 휘저었다. 그리고 아이를 건져냈다. 교인 가정이 자식을 사고로 잃어버리게 된 슬픔, 그것은 내 목회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한 광경으로 남아있다. 

오늘 야곱은 자식을 연거푸 잃어버리게 되었다.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쌀을 구하러 간 야곱의 아들들이 거기서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나나 자기 동생인 줄 모른 채 쌀을 구하여 온다. 그러나 정탐자의 누명을 쓰고 시므온을 인질로 남겨둔 채 돌아온다. 정녕 정탐자가 아니라면 신원을 보증할 자를 남기고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베냐민을 데려오는 조건으로 풀려나 아버지께로 온다. 흉년의 날에 먹고 사는 일도 힘들지만 야곱은 이와 같은 보고를 듣고는 탄식하며 슬피 운다. 

창42:36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야곱은 요셉을 잃어버린 지 20년이 훨씬 넘었다. 그 아픔의 기억이 아문 것처럼 살아왔는데 다시 두 아들을 더 빼앗기게 되는 사건 앞에서 한꺼번에 뒤얽혀 어찌할 줄을 몰랐다. 아니 스올로 내려가는 심정이 되었다.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은 고통이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사실 하나님의 섭리의 안목으로 보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지는 사건이었다. 인간을 향해 행동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의 관점으로 보면 야곱의 가족 전체를 애굽으로 이주시켜 횃불 언약을 성취하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창세기 46장을 보면 제단 쌓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이상 중에 나타나신다. 창46:3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또한 목전에 벌어진 사건으로는 아들 세 명을 다 잃어버리는 것 같았지만 20년 전에 잃어버린 요셉을 만나게 해주려는 사건이었다. 그것도 애굽의 재상이 되어 늙은 아버지의 노후를 보장해 주는 권세있는 아들을 대면케 하려는 축복의 사건이었다. 7년 동안의 흉년의 삶 속에서 쌀을 구하지 못하여 고통을 받을 때 열방의 복을 움켜 쥐고 7년 동안 쌀을 쌓아둔 위대한 정치가가 되어 있는 아들을 찾게 되는 신나는 사건이었다. 

사람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산다. 내일 일을 모르고 오늘의 슬픔이 내일의 기쁨이 되고 오늘의 기쁨이 내일의 슬픔이 되는 것을 모르고 산다. 그래서 인생들은 사건 그 너머를 알지 못하기에, 보이는 것 그 너머를 볼 수 없기에 벌어지는 사건을 따라 판단하고 만다. 야곱도 마찬가지다.
 

1. 잃어버렸다고 탄식하는 것이다. (창42:36上)

창42:36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라고 탄식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보자. 지금 탄식하는 것은 아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재물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투자한대로 이익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차게 살기가 어렵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으로 보라.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시면서 야곱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야곱아! 요셉은 총리가 되어 있어. 잘 지내고 있어. 시므온도 인질로 잡혀 있지만 잘 지내고 있어 요셉이 베냐민을 만나고 바로 너를 만나려고 하는 것이야.” 창세기의 뒷부분을 읽어보아도 요셉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잃어버렸다고 탄식하는 것은 육신적인 판단이다.
  

2. 사건을 해롭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창42:36下)

창42:36下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남편이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데 세 명의 자식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다가왔으니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해로운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다. 조금만 지나고 나면 시므온만이 아니고 총리가 되어 있는 요셉을 대면하는 사건이다. 유익하고 축복이 될 사건이다. 

우리는 사건을 항상 단편적으로만 해석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목으로 바라보자. 새옹지마(塞翁之馬)란 고사성어가 있다. 할아버지의 집에 어느 날 말 한 마리가 들어왔다. 신이 난 할아버지는 말을 키우는데 아들이 그 말을 타고 놀다가 발이 부러졌다. 그래서 속이 상해서 할아버지는 어쩔 줄 모르는데 그 나라에 전쟁이 났다. 젊은이들을 전쟁에 데리고 나가려고 건강한 청년들을 모병하는데 다리를 저는 할아버지와 아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다 끌려갔다. 전쟁이 끝나고 나니 마을에 살아남은 젊은이는 이 할아버지의 아들뿐이었다. 말 때문에 다리가 부러져 병신이 되는 바람에 아들이 살아남았다. 그때서야 할아버지는 다시 감사했다고 한다. 이렇게 인생은 ‘새옹지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면 사건은 해로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못하면 야곱처럼 사건을 해롭다고 말하는 것이다. 
  

3. 무조건 포기하며 안된다고 고집을 부린다. (창42:38)

창42:38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으리라.”

야곱은 베냐민을 애굽으로 가도록 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린다. 잃어버린 아들, 요셉을 대신하여 더욱 사랑하게 된 베냐민이기에 그 아들을 내어줄 수 없다고 심경을 밝힌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고집부릴 필요가 없다. 어서 속히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는 것이 모든 것을 다 찾는 길이다.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필요에 따라 내려놓을 수 있다. 붙잡고 있는 것을 포기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신뢰한다면 소중하고 가장 아끼는 것을 내어주는 것이라도 수용할 수 있다. 우리는 미련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모른다.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하나님의 안목을 가지고 살 수만 있다면 만인이 다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다. 다 넘어져도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육신의 몸 안에 제한 받고 사는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슬픈 일이 있을 때도 슬퍼할 일이 아닌 것처럼 살 수 있을까? 절망할 때도 낙심할 때도 낙심할 일이 아닌 것처럼 살 수 있을까? 모든 일을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며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건을 대하며 살 수 있을까?

첫째, 하나님을 믿는 일이다.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다. 그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다. 나의 안고 일어섬을 다 아시고 내가 어디에 거하든지 거기 와 계시고 함께 하신다. 이것은 어떻게 하면 알게 되는가? 바로 말씀에 서라. 말씀은 하나님의 의지이며 뜻이다. 말씀은 그 하나님의 명예와 인격이 부어져 있다.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다. 

히11:6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자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말씀을 믿고 그가 살아계심을 알게 된다. 응답 주심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이 먼저다. 알기에 믿는 것이지만 믿기에 아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믿으면 하나님의 안목으로 삶을 해석할 수 있다. 고난의 끝도 알게 된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섭리하신다. 나를 내버려두지 않고 나를 간섭하신다. 내가 넘어져 있을 때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나를 최선의 것으로 만들어 가신다. 내 가는 길을 나는 몰라도 연단 받은 이후에 정금같이 나온다고 욥에 노래하듯 다듬어지는 아픔도 있다. 연단도 있다. 하지만 섭리를 믿고 내 삶을 맡겨야 한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인생의 희비애락,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삶의 최선이 됨을 믿고 다 맡겨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 신앙이 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그때 섭리 신앙은 위기를 해석한다. 아픔을 해석한다. 섭리 신앙은 희망의 에너지고 용기의 에너지다.


셋째,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다. 

야곱은 애굽으로 올라가는 것은 언약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애굽으로 이주해 가는가? 막연히 요셉이 총리가 되어 있다고 무조건 애굽으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창세기 46장에서 예배를 드린 후 이상을 본다. 거기서 애굽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가라는 곳에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이다. 시간, 공간에 지배받는 우리가 시간, 공간의 현실을 뛰어넘는 초자연적인 삶의 비결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는 것이다. 

샨 볼츠라는 예언 사역자는 집회에 가기 전에 가야 될 그 교회를 미리 본다. 한 달에 한 두 번씩 입신을 해서 세미나를 갈 교회를 미리 보게 되는 은혜를 맛본다. 그래서 그는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을 하나님의 안목으로 본다. 우리도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단을 쌓고 기도를 드리면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예배는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고 하나님의 안목으로 사건을 보게 한다. 예배를 잘 드리면 우리는 변화된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 우리는 육신에 속한 감각적 판단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잃어버렸다고 울던 내가, 다 해로운 사건이라고 불평하는 내가, 절대 안된다고 고집부리던 내가 달라져서 잃어버리고도 괜찮다고 너그러울 수 있다. 해로운 사건을 만나고도 괜찮다고 할 수도 있다. 고집만 부리던 내가 괜찮다고 수용하게 되는 상식을 뛰어넘는 삶을 보낼 수 있다. 환경을 뛰어넘는 삶,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서 가능하다. 살아야 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매일 울고 탄식하며 슬퍼하는 환경뿐이라면 더욱 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자.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신뢰하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귀를 열자. 

여기 기록된 말씀들이 깨지고 무너진 삶이 깨진 것이 아니고 무너진 것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다 잃어버렸어도 천국에서 다 찾는 것이라고 증언한다. 끝장났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을 신뢰하자.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안목으로 사건을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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