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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독립이 필요한가? (행 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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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독립이 필요한가? (행 24:1~9)


1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2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3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4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6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6하반-8상반 없음) 8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1. 시작하면서

오늘은 20세기 초엽에 우리나라가 일본의 강제 합병으로 주권을 잃은 것에 항의하여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킨지 9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날은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고 옥사한 고통의 날이지만(기소자 6417명, 기독교인 1561명, 24.3%/ 조선근대사료), 우리나라 민족혼을 드러낸 역사에 매우 귀중한 날입니다. 저는 이 시간 이 사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한 가지를 갖고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왜 독립은 필요한가? 국가 체제나 통치권이 누구에게 있든지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할까? 싶은 생각도 있지 않습니까? 나라만 잘되고 국민들만 잘산다면 누가 통치하든 중요하지 않다는 실용주의 역사관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 분문에는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당신을 힘입어

바울 사도를 체포하여 총독 앞에 끌고 온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변호사 더둘로를 앞세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3절)

우리나라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통치하면서 여러 많은 근대문명의 이기들이 도입되었습니다. 철로가 놓이며 항만들이 근대화 되었고 교육 시설들이 세워졌고, 근대 병원들도 선교사들을 통하여 세워졌습니다. 당시 이조 시대 말기에 당파싸움으로 국민들은 도탄에 빠지고 먹고 사는 것이 힘든 시대였었는데, 일본이 우리를 자기네와 합병시켜 나라를 통치함으로 근대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절로 많은 국민들이 혜택을 보게 되었습니다. 

통치자가 같은 민족이든 외국인이든 상관없이 국민의 입장엔 잘살고 안전하면 더 나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가치관이 당시 나라를 일본에 합병시키는데 공헌한 이완용을 비롯한 소위 매국노들이 품었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얼핏 보면 합리적이고 그래서 좋은 판단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자녀들을 더 나은 환경에서 양육하고 교육시켜 출세시키기 위하여 내 아내와 자녀들을 돈 많은 다른 남자에게 넘겨주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이 실용주의가 갖는 위험성입니다. 국민을 잘 살게 해주기만 하면 좋은 통치자라고 여기는 물질주의 가치관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은 도움을 주는 강자에게 비굴해지고 맙니다. 본문의 더둘로는 로마 총독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4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소위 변호사란 사람이 재판관에게 이런 저자세라면 옳은 판결이 나오겠습니까? 일제 식민지 당시 친일파들이 일본사람들의 비위에 맞추어 동족을 팔고 괴롭게 한 것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래서 스스로 조선인들은 하루에도 열 두번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 말을 퍼뜨리며 일본인에 비해 우리 조선인들을 하류로 비하시켜버렸습니다.   

더둘로는 더 나아가 5절에 보면 바울을 “전염병(같은 자)”이라고 사회를 소요케 하는 버러지라고 욕하고 있습니다. 이 송사는 더둘로의 말이라기 보다는 사실 그를 앞세운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생각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의 말 끝에 “나사렛 이단의 괴수”(5b)라고 한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즉 바울이 송사를 당하고 있는 핵심 이유는 곧 나사렛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때문인데, 그 복음의 핵심이 로마가 아닌 다른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로마의 우산 아래서 안전하게 살고 싶은데 또 다른 나라와 그 나라의 왕 예수님을 전하고 있으니 정치적인 불안을 조장한다는 우려에서 바울을 체포하여 죽이려 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율법에 약속된 메시아에 관한 믿음보다는 정치적인 안정만 추구하면서 불안 요인들을 제거시키려는 독립불필요주의자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이런 가치관은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해온 것들입니다. 진리보다는 현실 안정, 자유보다는 물질의 풍요를 추구하는데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출애굽의 과정에서도 배고픔과 위협이 나타날 때마다 그들은 애굽이 더 좋았다고 노래를 했었습니다. 가난한 자유보다는 배부른 노예를 찬양한 것입니다.

이 때 모세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창세기를 쓴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어떤 존재였으며, 우리 조상이 어떤 분들이었는지, 그리고 왜 우리가 힘들지만 애굽을 떠나야 하는지를 밝힌 것이 창세기입니다. 

4~50년 전에 우리사회에 식모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딸을 남의 집에 식모로 보낸 것입니다. 말이 식모지 그 현실은 하녀였습니다. 딸을 보낸 부모 생각에 ‘우리 집에서 잘 못 먹느니 남의 집에 가서 잘 먹고 살라’고 하며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배고픔은 면했으나 대부분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았고, 그들의 삶이 결국 평생을 하류로 산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힘들지만 끝까지 함께 살자고 한 가정들에서 ‘개천에 용 났다’는 신화 같은 소리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3. 독립 정신과 복음

우리는 오늘 3.1절 90주년을 맞으면서 또 다른 질문 하나를 던져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독립 정신을 기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당시 기독교회와 성도들이 많이 동참했다는 사실 때문에 단지 그것을 기념하는 것인가? 아니면 독립 정신과 복음이 어떤 함수관계를 갖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독립정신은 단순한 정치적 분리주의 가치관은 아닙니다. 즉 민족주의로 인하여 우리가 아닌 너희에게 속할 수 없다는 그런 배타적 분리주의가 아닙니다. 복음적 독립정신은 피아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존엄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높이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여기서 ‘하나’란 말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피차 복종하라”(엡 5:21)고 가르쳤습니다. 노예 해방을 위하여 싸운 링컨과 그 동지들의 믿음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결혼에 관한 교훈에서도 이것을 강조했습니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엡 5:31)

성인(成人)의 출발은 부모로부터의 독립에서 시작되며, 남편과 아내가 한 육체가 된다는 것은 주종관계의 둘이 아니라 동등한 하나의 연합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오늘 가정에서의 갈등은 근본적으로 서로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주지 않은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과잉보호는 위험한 일입니다.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사람은 부부 상호 간에도 독립하지 못하여 어른 아이가 되고 맙니다.     

4. 마무리 하면서

우리는 민족지상주의나 인류 통일주의도 아닙니다. 우리는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에 한 몫을 감당해야 합니다. 다른 나라 혹은 타민족이 할 수 없는 역사적 특명을 이루며 자유롭게 사는 것이 복음적 독립정신입니다. 그런 바탕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명을 느끼며 찾아 봉사해야 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 날 때 까지 우리는 대한민국민으로써 자긍심을 갖고 살며, 이웃 나라와 세계 평화를 위하여 공헌하는 일등 나라가 되도록 애국해야합니다. 결코 함부로 포기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주권을 지켜가야 합니다. 

출애굽하던 당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모세를 통하여 미래 온 세상의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기쁨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겠다고 약속을 맺었습니다. 노예에서 금방 풀려난 사람들이 그런 꿈을 갖고 출발했듯이 우리나라의 교회와 성도들이 그런 민족애를 갖고 나라위해 충성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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