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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늦지 않았습니다 (룻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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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지 않았습니다 (룻 1:6~13)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 오려 하여 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저의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한다. 아내와의 정신 데이트는 대학 3 학년 때라고 기억된다. 3 학년 학기를 끝내고 어떤 여름이었다. 첫 데이트를 신청할 때에 참으로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정말로 어렵게 얻어낸 첫 데이트였다. 저는 당시에 city에서 intern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신학은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던 때였다. 그 날 따라 일이 많아서 그만 데이트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기다리지 않고 갔으면 어쩌나, 혹은 기다린다고 해도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등등… 머리가 많이 복잡하였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도착을 해보니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려 한 시간 반을 늦었는데도 아내(될 사람?)는 기다리고 있었다. 어렵게 시작된 교제였고 인생의 동반자이며 사역의 길을 함께 걷게 될 지도 모를 사람이었는데, 그녀는 늦었지만 늦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받아주는 그 사람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일은 참으로 큰 축복이고 은혜가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message도 이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 돌아오면 된다. 지금 돌이키면 된다.’라고 말씀하신다. 고린도후서 6:2을 보자.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오늘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구원이 있다. 늦은 것이 아니다. 

지난 주부터 룻기 강해를 시작하면서 엘리멜렉을 소개하였다. 큰 흉년이 찾아와서 그들은 모압 땅으로 이주하게 된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땅과 관련시키셨다. 그러므로 당시에 이주라는 개념은 믿음의 결단이었다. 그런데 그는 믿음의 결단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가정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성공을 꿈꾸면 이주했고 잘 살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그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그 가정의 남자들은 그 땅에서 모두 죽게 되었다. 

이제 세 여인들만 남았고 룻기는 그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듯 보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너무 늦었다고 이야기하였을 것이다. 정말로 그들은 너무도 늦었고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나오미는 남편과 아들들을 모두 잃었고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 자신도 어려움 속에서 모든 것이 늦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늦지 않았다. 
속히 return하라’는 message를 계속해서 주고 있었다. 6절을 보자.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 오려 하여’ 7절도 다시 보자. ‘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 그리고 10절을 보자.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성령은 ‘아직 늦지 않았으니 돌아오라’는 말씀을 주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룻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이다. 물론 겉으로는 다 늦은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신다. ‘아직 늦지 않았다. 바로 지금 return하라’고 말씀하신다. 나오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녀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It is not too late, never too late. 지금이라도 가면 된다.’라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never too late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탕자도 돌아갈 소망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된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우리의 상황이 힘들고 어려워도, 그리고 잘못된 선택을 하여 많은 것이 망가졌다해도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 분이 아닌가? Chaos에서 order를 창조한 분이 아닌가?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아무리 망가졌다해도 곧 고칠 수 있는 분이다. 그 분은 충분히 회복시키실 수 있는 분이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천지 창조의 장면이 나오고 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의 천지창조 원칙은 캄캄한 밤 이후에 새 날이 온다는 것이었다. 밝은 아침이 다가오게 하는 것이 바로 천지창조의 원칙이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을 믿는다면 늦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으라. 아무리 어려워지고 다른 사람들이 ‘too late’이라고 말해도 우리는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나오미의 가정은 정말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믿음은 무엇인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첫째는 그냥 주저 앉는 것이고, 둘째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향해서 믿음의 눈을 돌리는 것이다. 가뭄이 오면 어떤 나무는 말라 죽는다. 하지만 어떤 나무는 resource를 향해서 더욱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분을 만나고 오히려 더욱 견고하게 자라게 된다. 지금 기근이 찾아왔는가? 
기도와 믿음과 영성의 뿌리를 더욱 내리기를 바란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 견고하게 설 수 있게 된다. 결코 늦지 않았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방향을 그 분께 돌리면 된다. 회복과 치유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결단을 통해서 절망의 소리를 듣지 않게 된다. 지금 나오미는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리고 그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와같이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신앙의 자세는 크게 두 가지이다

1. 아픔 속에서도 주권자을 향한 초점을 잃지 않는 자세이다.

13절 후반을 보자.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그녀는 자신의 아픔을 솔직히 들어내고 있다. 그 말씀을 자세히 보면 나오미는 주권자를 향한 자신의 초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녀는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치셨다고 말한다. 너무도 힘들고 괴롭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그녀의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창조하셨고, 나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분명히 선한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녀는 회초리를 들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부모님이 허락하신 회초리였다. 빠져 나갈 길이 전혀 없어도 이 아픔이 하나님의 손에서 허락된 것이라면 그림이 달라질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오직 주권자를 향해야 할 것이다. 룻 1:21을 보자.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이 말씀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아픔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허락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징벌이 언제까지인가를 질문할 수도 있고, 실망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주권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이름 중에 ‘야훼’는 언약에 충실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 언약 때문에 그 분은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의 보혈을 모두 흘리셨다. 그리고 또 다른 이름, ‘엘쉐다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모든 상황 속에서 나를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신 전능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누가 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 을 당해도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큰 아픔 속에서도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장미꽃을 감사하고 즐기지만 그 가시는 즐기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는 장미꽃과 함께 가시도 즐기며 가시를 주신 주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바란다. 장미꽃과 가시는 항상 함께 온다. 가시로 인해서 간혹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오더라도 하나님의 선하고 온전하신 뜻이 이루어 질 것을 믿으라. 욥 23:10을 보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나의 가는 길을 주님이 아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고 온전하신 뜻으로 우리를 단련하시고 우리를 정금과 같이 만드신다고 하신다. 정금이 되려면 반드시 단련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불도 허락하시고 단련도 허락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아시고 주관하시는 분이다. 그 불은 우리를 정금과 같이 만들기 위한 불이다. 그저 단순한 발이 아니다. 욥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지금의 아픔이 누구의 손에서 온 것인가를 생각하라. 그리고 그 분의 섭리를 믿고 나아가라.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그곳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2. 나의 부끄럽고 연약한 모습을 숨기지 않는 자세이다.

나오미는 돌아오기 위해서, 숨기고 싶은 모습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보여줄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는 돌아올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하며 다시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의 연약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겸비하고 낮은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 우리의 상황은 회복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눅 19장을 보면 삭개오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부자이고 세리이며 매우 작은 자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작은 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로부터 조롱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hurt와 anger에 빠져 성장했을 것이고, 그것을 폭발시키기 위해서 당시 로마 정부를 이용하여 막강한 세리의 power를 얻게 되었다. 그는 세리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철저히 토색하였다. 그래도 그의 마음은 항상 양심의 가책과 허전함으로 가득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예수 그리스도가 그 곳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뵙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미움의 대상이었던 삭개오를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뽕나무 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당시에 나무 위로 올라가는 사람은 아이들과 지위가 낮은 사람들 뿐이었다. 삭개오는 단 한번이라고 주님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주님은 나무 위에 있는 그를 만나주셨고, 변화시켰으며, 회복시켜 주셨다. 수치스러운 삶을 살던 삭개오가 조용히 주님의 얼굴을 뵙고 싶었지만 주님은 오히려 그를 찾아주셨고 그와 함께 그의 집에 머무르셨다. 뽕나무에 오른 것 자체가 또 한번의 수치가 되었지만 예수께서는 바로 그 수치의 현장에서 그를 만나신 것이다. 
그리고 이후로는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제자로 변화시키셨다. 우리의 뽕나무는 무엇인가? 우리를 아프게 하고 연약하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숨기고 싶어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때로는 원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 연약함이 완전히 노출되기도 하더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로 나오면 그 분은 우리를 만나주신다.

8복의 내용은 무엇인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한 조건들이다. 

우리가 이같이 힘들고 아플 때에 그 현장에서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축복하실 것이다. 나아만 장군을 보라. 그는 문둥병을 가지고 엘리사를 찾게 되지만 그저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는 말에 기분이 상하여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부하들의 권면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문둥병이 치유되었다. 그 치유는 언제 이루어졌는가? 그가 자신의 감투와 갑옷을 벗어 내려놓을 때에 이루어졌다. 우리가 회복과 치유를 원한다면 우리도 모든 인생의 것을 내려놓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와야 한다. 

삭개오와 나오미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연약하고 부끄럽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 그리고 감투를 모두 내려놓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회복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늦지 않았다. 소망이 없다는 세상의 목소리를 듣는가? 결단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too late’이란 없다. 방향을 돌리고, 무릎을 꿇어 순종하며, 영적인 뿌리를 깊이 깊이 내리기를 원한다. 어려움과 아픔 중에서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것이 피조물들의 가장 적절한 모습이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끄러움을 그대로 가지고 우리의 뽕나무로 올라가자.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와서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부흥을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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