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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 운동의 특징 (단 2: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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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운동의 특징 (단 2:31~35)
 
 
얼어붙은 지면에 생명이 약동하는 새봄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오늘은 90년 전 일제 식민치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3.1절이기도 합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상에 모든 폭력과 죽음의 세력을 견제하시고 정의와 생명의 질서를 회복하시는 분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꿈에 본 신상을 소개하였습니다. 이것은 불신앙적인 인공문명의 상징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치고 태산을 이룬 바 있는 뜨인돌의 정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운동을 상징합니다. 

1. 역사의 거울

느부갓네살이 본 신상은 머리는 순금이고 가슴과 두 팔은 은이며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고 그 종아리는 쇠며 발은 쇠와 진흙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벨론 이후의 나라들 곧 메대, 바사와 헬라와 로마에 이르는 4대 강국을 뜻합니다.

1) 인간 역사의 악순환

인간의 역사는 원시시대부터 현대의 문명사회에 이르기까지 그침 없이 변화하고 발전되어 왔습니다. 부족사회에서 국가형태로 발전해 왔고, 봉건왕조에서 국민이 참여하는 민주국가로 엄청난 발전을 거듭했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간단하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역사의 고비와 변혁기마다 피흘림의 악순환이 거듭된 것입니다. 
인류문명의 발상지인 애굽이나 앗수르, 바벨론에 이어 페르시아와 헬라, 로마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제패한 열강들이 등장할 때마다 이와 같은 일들은 반복되었습니다.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짓밟고 말살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그대로 작용했습니다.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름 있는 제왕이나 화려한 문명은 그 이면에 엄청난 희생과 비극을 연출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역사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상태는 진선미(眞善美)의 완전한 모습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뜻은 모든 피조물과 인간이 지구상에서 서로 공존하며 번영하는 것입니다(행 17:26). 그러나 마귀와 결탁된 인간의 욕심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세상을 힘있는 자의 독점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가인이 폭력으로 동생을 죽인 것이나, 두발가인이 쇠붙이로 살상용 무기를 만든 것도
하나님의 뜻을 반역한 행위였습니다(창 4:8, 22). 
노아의 후손들이 시날 평지에 도시를 만들고 바벨탑 공사를 시작한 것도 인간들끼리 동맹을 맺어 하나님과 대적하려는 시도였습니다(창 11:1-9). 동기나 목적이 어디에 있었든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감행하는 경우 결국 무너지는 수순을 밟게 되는 것입니다.

3) 필연적인 하나님의 심판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한 마음이 들게 하였습니다. 우선 그 규모가 거창하고 내용이 화려했습니다. 번쩍이는 순금 머리는 화려한 느부갓네살의 영화를 상징합니다. 뒤이어 일어나는 나라들도 은이나 놋으로 표현된 것처럼 찬란했던 페르시아와 희랍의 문명으로 후세에 길이 빛나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또 강철로 표현된 로마의 권력은 영원불멸할 것 같았지만 이 모든 나라들은 하나같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칼 쓰는 자는 칼로써 망하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적 폭력주의자들이 인권과 생명을 짓밟는 행위를 저지르지만 그들도 예고된 말로를 맞이하고 말 것입니다.

2. 뜨인돌의 출현

느부갓네살이 본 환상의 핵심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뜨인돌의 비밀입니다. 그 거창한 신상을 일격에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태산처럼 우뚝 선 뜨인돌의 신비를 깨닫게 합니다.

1) 산 돌이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을 흥분하게 만든 웅장한 신상의 재료들은 인간이 이루어 놓은 찬란한 문명을 뜻합니다. 거기 쓰여진 순금이나 은이나 놋이나 철과 같은 쇠붙이는 모든 사람이 흠모하는 물질의 가치를 의미하거나 또는 화려하고 견고한 권력과 영화의 상징입니다. 그렇지만 그 자랑스러운 나라와 권력과 영광이 순식간에 뜨인돌의 위력 앞에 산산조각으로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 돌은 살아있는 돌이기 때문에 신상을 무너뜨리고 태산만큼 커졌습니다. 이 돌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베드로전서 2:4에 예수님을 “보배로운 산 돌”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산 돌이신 예수님과 연결되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는 자들입니다(벧전 2:5). 여기서 말하는 신령한 집은 주님의 교회를 뜻합니다(엡 2:20-21).

2) 생명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왕이 그 거대한 신상을 보고 황홀해 있었을 때 사람의 손이 닿지 아니한 돌 하나가 날아와서 신상을 쳐 부서뜨렸습니다. 신상은 돌의 일격에 산산조각 나서 타작마당의 겨와 같이 날려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신상을 친 돌은 태산처럼 커져서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나라의 권력과 영화는 모두 풀의 꽃과 같이 쇠잔해 버리지만 오직 하나님은 영원하고 그 말씀은 생명력을 발휘합니다(사 40:6-8).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원인자이기 때문입니다(요 1:4).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큼만 믿음이 있으면 산을 들어 바다에 옮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마 17:20). 겨자씨는 아무리 작아도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생명이 없는 태산을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무너지는 것과 세워지는 것

세상의 권력이나 문명은 언제든지 그 다음에 나타나는 다른 세력에 의하여 파괴되고 없어집니다. 새로운 세력이 등장할 때는 언제나 좋은 구실을 내세우지만 그도 결국 불행한 전철을 밟고 맙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복음은 새롭고 영원한 것을 이루어 놓습니다. 예레미야 1:10에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변화된 인간으로 거듭나게 만듭니다(고후 5:17).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표현한 베드로는 그 돌을 시온에 두었는데 믿지 않는 자에게는 부딪혀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지만, 믿는 자에게는 생명의 기초석(머릿돌)이 된다고 하였습니다(벧전 2:6-8).

3. 메시야시대의 환상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이 부서져 타작마당의 겨와 같이 날아간 것처럼, 세상 나라들도 끝날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영원한 왕으로 권세를 행사합니다(계 19:16). 그 권세는 지상교회를 통하여 행사됩니다(마 16:18).

1) 교회는 생명운동의 산실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입니다. 그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의 몸입니다(엡 1:22-23). 머리 되시는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기 때문에 교회는 살아있는 생명체입니다. 죄와 마귀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교회는 의와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생명운동을 전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구약교회는 모세의 율법에 근거하여 각종 제사행위와 선민운동을 전개하였지만 그 내용은 하나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신약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여기 거대한 신상을 쳐서 무너뜨린 돌이 그 생명력을 발휘하여 태산을 이룬 것도 역시 세상을 석권하게 될 신약교회의 환상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 교회는 생명운동의 산실이 되어 죽음에 지배당하는 인류를 구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세상을 능가하는 교회의 저력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신상을 보고 넋을 잃을 정도로 황홀했으나 잠시 후 나타난 뜨인돌의 정체를 알았을 때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오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고 했습니다(단 2:47). 사람들의 눈에는 불신앙의 세상 권력이나 그 힘은 굉장하게 여겨지고, 교회는 매우 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결국 교회는 세상을 능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가 그 비결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마 13:31-33). 곧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그것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그 가지에 새들이 깃들게 됩니다. 또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가서 그 반죽을 모두 부풀게 합니다. 전자는 교회의 양(量)적인 특징을 말하고, 후자는 질(質)적인 특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승리적 삶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승리의 원인자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으나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전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승리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김의 비결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였습니다(요 16:33).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논증하면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5:57). 사실 바울 같은 경우 수없는 죽음의 세력에 포위당하면서도 거뜬히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이김의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그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간증하였습니다(롬 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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