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3.1운동과 기독교정신 (마 6:33)

  • 잡초 잡초
  • 371
  • 0

첨부 1


3.1운동과 기독교정신 (마 6:33)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1960년대에 큰 변화가 있었던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싱가포르, 필리핀, 그리고 한국입니다. 싱가포르는 1965년에 말레시아로부터 독립하여 나라를 새롭게 세우게 되었습니다. 리콴유가 초대 수상이 되어 26년간 장기 집권을 했습다. 싱가포르가 말레시아로부터 독립하던 해인 1965년에 필리핀은 페르난도 마르코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마르코스도 20년간 장기 집권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박정희가 1961년에 5·16 쿠테타로정권을 잡고 1963년에 5대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18년 동안 장기 집권을 합니다. 

당시의 경제 상황을 보면 세 나라 가운데 필리핀이 가장 부유한 나라였습니다. 그다음이 한국이었고, 다음이 싱가포르였습니다. 우리나라가 필리핀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습니다. 싱가포르는 자국의 대표단을 우리나라에 보내 경제 발전의 동력을 배워갔습니다. 그런데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매우 달라졌습니다. 가장 가난했던 싱가포르가 가장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싱가포르에 경제 발전의 모델이 되었던 우리나라는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못 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경제적인 지원을 했었던 필리핀의 국민소득은 1000 달러 정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성경에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된다’ 는 말씀이 세 나라에 적용 된 것 같습니다. 

자원이나 인구를 보면 아마 필리핀이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원이나 인구를 보면 싱가포르가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뛰어 넘어 나라의 부강함이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자원과 인구가 가지고 있는 힘이 나라의 부강함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면 무엇이 힘이 되었겠습니까? 우리들은 그 부분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라를 다스렸느냐?’의 차이입니다. ‘그 나라의 국민들이 얼마나 정직하냐?’의 문제입니다.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싱가포르는 리콴유가 총리가 되어 청렴결백하게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자리를 잡을 수 없도록 정직한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공무원의 비리는 결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싱가포르에 가 보지는 않았지만 거리에 휴지 하나 발견할 수 없답니다. 도시 환경과 연관시켜 껌까지도 엄격하게 관리하는 나라입니다. 질서있게 잘 세워진 나라입니다. 반면에 1960년대에 세 나라 가운데 가장 부유했던 필리핀은 페르난도 마르코스가 대통령이 되어 다스렸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만큼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은 마르코스는 국민들에 의해 해외로 추방되고 맙니다. 나라 곳곳이 부정과 부패로 얼룩져 있습니다. 수시로 쿠테타가 일어나 정국이 불안합니다. 사회가 무질서합니다. 결국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경제 발전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 발전을 이루기 위해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과 각 분야의 전문가들, 그리고 국민들은 각자의 주장과 방법을 쏟아냅니다. 경제 회복과 발전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이슈가 되어 있습니다. 나라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경제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경제 회복과 성장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에 더 시급하게 세워야할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너진 정신의 세계를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정신세계가 성숙하지 못한 개인과 사회는 경제적인 부를 관리하며 누릴 수 있는 힘과 지혜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정신의 세계가 튼튼히 세워지지 않는 상태에서 경제적인 부가 주어지면 그 경제적인 부는 어김없이 폭력과 성적 음란으로 빠지게 됩니다. 선진국이란 성숙한 정신 세계 위에 경제적인 부를 세운 나라를 말합니다. 정신의 세계가 부정과 부패로 무너져 있는데 그곳에 경제적인 성장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선진국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성은 경제적으로 매우 부유한 성이었습니다. 그들은 밤이 되면 도시 전체가 향락에 빠져 불야성을 이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적인 세계는 피폐해 있었고, 소돔과 고모라는 성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소돔과 고모라 성에 들어갔을 때 그곳의 사람들은 동성 연애를 하기 위해 천사들을 내어 놓으라고 집주인에게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그 성을 심판하실 만큼 소돔과 고모라 성은 타락해 있었습니다. 정신적인 성숙함이 없는 경제적인 부는 결국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한 것은 경제가 약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한 이유는 의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 명의 의인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신의 세계가 무너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사회가 바뀌려면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사람의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사회는 절대 변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가정이 행복하지 못하다거나 부부간에 문제가 있어서 한 지붕 밑에 살아도 밤낮으로 싸우며 괴로워한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작은 집에서 큰 집으로 이사를 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가 주말 저녁에 팔짱을 끼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백화점에서 맘껏 쇼핑을 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의 문제가 해결되려면 남편이 변하든지, 아내가 변하든지 아니면 둘이 다 변하든지 해야 합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잠시 동안은 문제를 덮고 넘어갈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가 바로 되려면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그것도 악하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변해야 합니다. 사람이 변하면 나라가 변합니다. 

‘에콰도르’ 는 중남미의 조그마한 국가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직도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는 불쌍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사법제도는 형편없어서 누군가가 기소되면 미결수로서 4-5년을 지내야 정식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도 뇌물을 쥐어 주지 않으면 10년이 걸리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일단 한번 무슨 일로 혐의를 받아 구치소에 들어가면 자기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구치소에서 4, 5년을 보내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뇌물을 주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곳에서 10년 동안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누가 인간답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현실의 모순과 고통을 마음 아파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호르에 크레스포 박사라는 분입니다. 그는 그 나라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법을 전공한 법학자였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고 나서 발견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은 자기가 믿는다고 말하는 대로 사는데 있다.’ 곧 믿음과 삶이 일치되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참된 신앙은 개인적인 문제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나도록 하는 데 있다.’ 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나혼자 구원 받으면 된다. 나혼자 복 받으면 된다. 나혼자 주님과 동행하면 된다.’ 는 데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사회 전반에 드러나도록 쓰임 받는 것이 신앙생활의 진수라고 그는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법제도와 교도소를 개혁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나섰습니다.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두 번이나 투옥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셔서 사법제도를 개선하는 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도록 하셨습니다. 거기에 미결수는 3년 이내에 반드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거룩한 백성들이 의인이 되어서 그 사회의 일원이 되면 그 사회와 나라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는 것을 ‘거듭난다’라고 말합니다. 새로운 사람으로 변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5장 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사람이 바뀝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기능을 잃었던 양심이 다시 살아납니다. 한 사람의 변화는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등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곳은 폭력과 음란, 무질서와 이기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지금 하나님을 믿고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수는 증가한 반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점점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고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데 왜 범죄는 더 늘어납니까? 사람들은 왜 더 잔인해지고 난폭해 집니까? 왜 성범죄는 입에 올리기 부끄러울 만큼 문란해집니까? 국회의원 가운데 거의 2/3 정도가 믿는 사람인데 국회가 왜 저 모양으로 돌아갑니까? 믿는 사람이 대통령이고 정치, 경제의 중요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많은 부분이 믿는 사람들인데 나라 모양이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3·1절 기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3·1절 독립 만세 운동에는 기독교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3·1 독립운동은 기독교가 없었으면 불가능 했다고 일반역사 학자들이 평가할 만큼 교회는 대단한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의 인구가 2천만이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때 기독교인의 숫자는 20만 정도였습니다. 전체 인구의 1%였습니다. 1%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민족의 아픔을 끌어 안았습니다. 이 민족이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가장 고통스런 시간을 보낼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교회의 숫자는 적었지만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했었습니다. 어두움에 있었던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서 비취는 소망의 빛을 보고 교회로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교회는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숫자는 전체 국민수의 25%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무척 많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에 속하는 대형 교회가 우리나라에 몇 개가 있습니다. 경제, 정치적인 힘도 막강합니다. 어느 누구도 교회의 힘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니 교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런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를 무엇이고 생각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오늘 본문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보고자 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에서 성도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그 나라와 그 의’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어떤 다른 것을 구하기 전에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합니다. 성도와 교회가 다른 것보다도 이것을 ‘먼저’ 구하는 자리에 서 있으면 숫자가 적더라도 세상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즉 세상에서 편하게 즐기고 누리는 것’을 먼저 구하는 자리에 있으면 세상을 향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3·1절 기념 예배를 드리면서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며 나라와 민족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한 조상들의 믿음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그 정신을 우리의 삶의 자리로 이어가야 합니다.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정신이 살아 있는 곳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며 약속하신 은혜의 영역으로 세우실 것을 믿습니다. 3·1절 기념 예배를 드리며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믿음을 사모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