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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대 눈은 밝은가? (눅 11:3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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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눈은 밝은가?
눅11:33-36
(2009/3/1)

[“아무도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놓지 않고, 등경 위에 놓아 두어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보게 한다. 네 눈은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도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보아라. 네 온 몸이 밝아서 어두운 부분이 하나도 없으면, 마치 등불이 그 빛으로 너를 환하게 비출 때와 같이, 네 몸은 온전히 밝을 것이다.]

1.  ‘천진’과 만나다

사순절이 시작된 지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예배 때 우리는 참 소중한 분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함께하는 세상, 캄보디아>의 레지나 수녀는 1인 NGO라 할 만큼 탁월한 활동가였습니다. 도시 빈민들을 위해 오랫동안 일하던 그가 캄보디아로 떠난 것은 그 나라가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타케오와 프레이벵 등 캄보디아의 가난한 마을에 들어가 현지인들과 똑같이 살면서, 그들의 삶에 희망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서 학교를 설립하고, 무력에 빠진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공방을 만들고, 맑은 물 공급을 위해 우물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현지인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소액대출은행도 운영하고, 농부들을 위해 cow bank도 운영합니다. 저녁이면 함께 지내는 이들에게 크메르어와 한국어, 그리고 영어를 가르치면서 삶에 대한 비전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그는 현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스스로 존엄한 존재라는 자각임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일을 현지인들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 결정하고 있습니다. 가슴에 꿈을 품은 한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저는 그를 통해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몇 년 동안 추진해왔던 캄보디아 우물 파기 사업의 후속 프로그램을 모색하던 중 알게 된 레지나 수녀의 삶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어쩜 그리도 맑은지, 어쩜 그리도 당당한지, 온전히 남을 위해 바쳐진 그의 삶에 ‘거룩함’이라는 단어를 붙인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빨갛게 그을린 그의 얼굴, 그리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에서 나는 그가 하늘에 속한 사람임을 알아보았습니다. 

하필이면 재의 수요일에 그가 우리 앞에 온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임을, 뜻이 아름다우면 길도 열린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는 참 증인이었습니다. 그에게서 나는 세상의 어떤 교권주의자들에게서도 맡을 수 없는 맑은 향내를 맡았습니다. 이런 말조차 그에게는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음을 알지만 그는 참 멋진 삶이 가능함을 우리에게 환기시켜주었습니다. 고진하 목사는 최근에 나온 자기 책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을 건네주면서 이런 글귀를 적어주었습니다. “한 송이 꽃이 피면 모든 곳에 봄이 오네.” 저는 이 말을 실감합니다.

2.  성치 않은 눈

이번 사순절 시기를 지나는 동안 저는 모든 교우들의 눈이 밝아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을 일컫는 말 가운데 하나가 ‘보는 사람’(seer, 선견자)입니다.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역사의 이면을 꿰뚫어보는 사람이 바로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여느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즉 내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들을 바라보는 그 눈으로 우리를 보신다는 유다인의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의 바라봄은 어떠합니까? 따뜻하고 긍정적입니까? 아니면 차갑고 부정적입니까?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입에 도끼를 품고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말살이가 빚어내는 살풍경에 상처 입은 이들은 이 말을 실감할 겁니다. 그렇다면 눈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눈에 저울을 달고 나오는 것 같습니다. 
누구를 대하든 우리 눈은 저울질에 분주합니다.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진실한 사람인지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인지, 따뜻한 사람인지 차가운 사람인지, 내게 도움이 될 사람인지 해를 끼칠 사람인지…. 그러한 판단에 입각해 그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결정됩니다. 건성건성 대하는 경우도 있고, 호감을 가지고 접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그의 사람됨보다는 그가 누리고 있는 평판이나 직함에 눈길이 더 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단점에 주목합니다. ‘저 사람 눈빛이 영 불길한데.' ‘저 가식적인 웃음이라니.' ‘얼굴에 욕심이 덕지덕지 묻었구만.' 이쯤 되면 그와의 창조적인 관계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이런 방식으로 대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을 비인간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이 됩니다. 저는 이것을 ‘시선의 폭력’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태도가 습관이 되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냉소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긍정의 기운보다는 부정의 기운을 많이 쓰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렇기에 삶이 무겁고 힘겹습니다. 긍정의 에너지를 많이 쓰는 사람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늘 주변을 환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따뜻하게 만듭니다. 명랑하게 만듭니다. 나는 산에 오르신 주님의 얼굴이 희게 변화되었다는 말씀의 비밀이 뭘까 생각하다가, 예수님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긍정의 기운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3.  눈은 몸의 등불

주님은 “네 눈은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성하면, 온 몸도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몸도 어두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네 눈’이라는 말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바꿔놓아도 괜찮을 겁니다. 똑같은 대상도 바라보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전혀 달리 보입니다.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게서 사람들이 본 것은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마음에 깃든 공허함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큰 차이입니다. 
한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에게 돌팔매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사는 동안 입은 상처와 눈물에 주목하는 순간 누구도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없습니다. 바라봄이 왜 중요한지 아시겠습니까?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리와 창녀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멸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다운 삶을 열망하는 약자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런 이들과 사귀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1993년 어느 여름날,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어떤 병원 응급실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자기 남편이 이 병원의 간호사와 관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 어떤 여성이 총을 들고 병원에 뛰어들었습니다. 문제의 간호사를 찾은 여인은 그 간호사에게 총을 쏘았지만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부상당한 간호사는 응급실로 도망쳤고, 여인은 총을 든 채 그 간호사를 쫓아갔습니다. 당시 응급실에는 조앤 블랙이라는 간호사가 당직 근무 중이었습니다. 부상당한 간호사가 응급실로 들어서기 직전 블랙은 총을 가진 사람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연락 받았습니다. 곧 이어 38구경 권총을 손에 쥔 여인이 응급실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62세의 블랙은 본능에 따라 대처했습니다. 
블랙은 그 여인을 껴안고 말을 붙였습니다. 총을 든 여인은 ‘내가 살아서 뭐 하겠느냐, 그 여자 때문에 가정이 깨졌다’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블랙은 “힘들죠? 안 됐네요. 힘 안 든 사람이 어디 있어요.……해결할 방법이 틀림없이 있을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블랙은 여인이 자살하려고 총을 들어 올릴 때마다 끌어내리기를 반복하면서 결국 그 여인을 진정시켰습니다. 참 위험한 순간이었는데 나중에 블랙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픈 사람이 들어오더군요. 돌봐 줘야만 했어요.” (마이클 네이글러, <<폭력없는 미래>>, 89-91 참조)

응급실을 박차고 들어오는 사람이 그의 눈에는 범죄자가 아니라 환자로 보였던 것입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갈망한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렌즈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기심과 탐욕과 부정적인 마음으로 얼룩진 우리 눈으로 세상을 보는 한 우리는 결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없습니다. 저는 신앙생활이란 調律의 과정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조율이란 악기의 음을 표준음에 맞추어 고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연주자들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마음과 눈으로 우리 마음과 눈을 조율해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눈으로 조율된 사람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깃들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런 조율을 게을리 하는 이들이 있는 곳에는 불화가 깃들게 됩니다.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도 밝을 것이다.” 보아야 할 것을 바로 보면 우리 삶도 온전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이 왜곡되면 삶도 따라 구부러지게 마련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대로 하자면 우리 몸을 죄에게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롬6:13). 

4.  우리 안의 빛

바라봄이 곧 삶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엄중하게 명령하십니다.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보아라.” 사물을 식별하는 기관인 눈은 바깥에 빛이 있어야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눈이 좋은 사람이라 해도 캄캄한 밤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깥에 있는 빛 말고 우리 속에 있는 빛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어떤 빛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렇다면 이 빛은 뭘까요? 고민을 하다가 창세기 1장이 떠올렸습니다. 

창조의 첫날 주님이 만드신 것은 빛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주님이 발광체인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신 것은 넷째 날입니다. 그렇다면 첫날 창조한 빛과 넷째 날 창조한 빛은 다르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넷째 날 창조한 빛은 세상의 사물들을 식별하는 데 필요한 외부의 빛입니다. 그에 비해 첫날 창조한 빛은 모든 존재의 내면에 있는 깃든 빛, 즉 하나님을 알아보는 영적인 빛이 아닐까요? 그 빛은 변하지 않는 빛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안다는 것은 바로 그 빛을 보는 것입니다. 그 빛을 우리는 ‘길’, ‘진리’, ‘생명’이라고 부르는데, 요한은 그 빛이 곧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창조된 존재냐는 신학적 논쟁은 여기서 무의미합니다. 

주님이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신 ‘눈이 성하다’는 말은 우리 속에 있는 그 근원적인 빛이 뭔가에 의해 가려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을 알아차리도록 해주는 그 영원한 빛을 가리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욕심, 경험, 지식, 염려 등이 우리 눈을 가려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고, 그 때문에 사물이나 사건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있는 빛을 가리고 있는 것들을 닦아내야 합니다. 무엇으로 닦아야 할까요? 저는 두 가지를 들고 싶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 기자는 노래합니다.

“주님의 교훈은 완전하여서 사람에게 생기를 북돋우어 주고, 주님의 증거는 참되어서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준다. 주님의 교훈은 정직하여서 마음에 기쁨을 안겨 주고, 주님의 계명은 순수하여서 사람의 눈을 밝혀 준다.”(시19:7-8)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 영혼의 때를 닦아내는 세정제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은 자기 속의 어둠에 속절없이 이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병들어 어두워진 내 영혼의 시력은 통증과 슬픔을 동반한 당신의 치료의 안약에 의해 나날이 더 밝아져 갔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7권 8장)

우리 눈을 닦아줄 또 하나의 세정제는 이웃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입니다. 감상적인 눈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아픔, 그의 고통, 그의 슬픔을 위로하고 그의 문제를 풀어주기 위해 땀 흘리는 과정을 포함하는 눈물입니다. 이보다 강력한 세정제가 없습니다.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 해오름 예배에서 조화순 목사님은 용산참사에서 희생당한 유가족들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우셨습니다. 그리고 회중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고통당하는 이들, 외로운 이들 뒤에 가서 가만히 서 있으라고, 그리고 그 손을 잡아주며 ‘하나님은 당신들은 사랑하신다’고 말하라고. 교회 다니라든지, 예수 믿으라고 하지 말고 그렇게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웃들을 위해 우리가 진심의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은 우리 속에 있는 어둠을 닦아내 하나님을 보게 만듭니다. 이보다 큰 은총이 어디 있겠습니까?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가 보라”는 말은 쉽게 말해 “네 속에 예수님이 계신가 보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의 어둠과 악함에 낙심하지 않게 됩니다. 이웃들을 위해 손을 내미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으면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나아가게 됩니다. 레지나 수녀는 그런 아름다운 생을 증언하는 징표로 우리 앞에 섰습니다. 오늘은 3.1절 90주년 기념일입니다. 독립선언서 말미에 나오는 이야기를 우리 신앙생활의 독립선언으로 삼고 싶습니다. 

"새봄이 온 누리에 찾아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누나. 얼음과 찬 눈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 저 한 때의 시세였다면, 온화한 바람, 따뜻한 햇볕에 서로 통하는 낌새가 다시 움직이는 것은 이 한 때의 시세이니,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이 마당에, 세계의 변하는 물결을 타는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고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이런 세상, 모두가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 세상은 하나님의 꿈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빛으로 세상을 보며, 주님의 구원 역사에 주저 없이 당당하게 동참할 때,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살아내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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