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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삶 (행 1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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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삶 (행 11:19~26)
 

1. 평범해서 싫어요!

요즘 TV 드라마로 최고의 시청률을 구가하고 있는 것이 <꽃보다 남자>라는 것으로, 일본 만화를 드라마로 만든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만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대표 재벌의 후계자, 전직 대통령의 손자, 대한민국 대표 예술 명가의 천재 도예가, 신흥 부동산 재벌의 후계자들이 펼치는 ‘절대로 고등학생 같지 않은 고등학교 학생들의 드라마’에 남녀노소가 흥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비현실적이고 꿈같은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평강 공주를 만나 출세하고픈 온달과 같은 꿈을 가진 남자들, 신발이 벗겨져 그 일로 왕자비가 되고 또 왕비가 되고픈 신데렐라의 꿈을 가진 여자분들이 많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사실 이런 다소 비현실적인 꿈같은 소재들이 다뤄진 드라마나 영화들은 아주 많았습니다. 600백만 불의 사나이, 원더우먼, 헐크, 람보, 로키, 터미네이터, 슈퍼맨, 배트맨, …. 결코 평범치 않은 비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가 주(主)였습니다. 
위기에 처한 지구나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은 언제나 그들 영웅들이었지요. 이런 드라마나 영화들은 사람들 속에 영웅을 숭배하는 신앙과도 같은 것을 심어주었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그 어려움을 구해줄 특별한 능력의 사람을 찾고 또 찾는 이유가 그것이지요. 그래서 일까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의 천재가 수천 수 만 명의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누구나 영웅이 되고 싶죠.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나 특별한 능력과 자질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누구나 대학 졸업장이 없이도 대통령이 되고 싶고, 누구나 정식 신학대학을 졸업하지 않고서도 10만 여 명의 성도가 있는 대형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영웅, 그렇게 특별한 사람은 정말 드뭅니다. 수 천 수 만 명 중에서 한 사람이 나올까 말까 정도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현실은 영웅이 부럽고 영웅이 되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 즉 평범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대학교 4학년 말, 평생 잊지 못 할 영화를 보았습니다. <아마데우스>라는 영화였습니다. 영화는 천재적인 작곡가인 ‘모차르트’와 그를 곁에서 지켜보는 ‘살리에리’라는 작곡가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자신도 대단히 훌륭한 작곡가였던 살리에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 때문에 늘 괴로워했습니다. 
한 번은 술에 취한 모차르트가 여인들의 치마폭에서 장난스럽게 지어낸 곡마저 입이 벌어질 정도로 탁월한 것을 본 살리에리는 견딜 수 없어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곡 하나를 만들기 위하여 길고 긴 시간,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곡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모차르트가 젊은 나이에 죽자 정신 병원에 입원 중이던 살리에리는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모차르트라는 천재적인 작곡가가 죽은 것을 안타까워하던 나머지, 자신의 질투심과 열등감이 그를 죽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공감하다 못해 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학 4년 동안 제가 다녔던 교회의 대학부 때문이었습니다. 출석이 200여 명 되던 대학부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이 지방에서 상경한 학생들이었는데요, 그 중에서 절반 정도는 서울대 학생들이었고, 나머지는 연․고․이화여대 학생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나는 성적보다는 선교사가 되기 위하여 너희들보다 못한 대학에 왔다.’ ‘신앙으로는 절대로 뒤지지 않을 것이다’ 라는 알량한 자존심으로 버텼지만, 사실 그들은 머리 좋고 신앙 좋고 성품마저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대학부에서 임원이나 조장으로 섬기면서도 고시에 합격한 사람, 국비나 외국의 대학들이 주는 장학금으로 유학을 가는 사람들! 그런 탁월한 사람들 틈에 있으면서 저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작아보였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4년을 보낸 마지막에 <아마데우스>에서 천재 ‘모차르트’를 질투하는 ‘살리에리’를 보면서 저의 모습을 보았고 그래서 그렇게 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특별한 사람들, 영웅들, 즉 돈과 권력과 외모와 천재성을 다 갖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있는 이 사회에서 저와 여러분처럼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 세계가 어려워지니까 이 어려움을 타개해 줄 또 다른 영웅을 찾는 시대, 과연 우리 시대가 또 다른 영웅의 등장을 기다리는 것은 옳은 일입니까? 성경은 거기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2. 평범했지만 특별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

1) 예루살렘 교회의 수난

오늘 본문은 “그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로 시작하고 있습니다(19). 스데반 집사의 순교는 설립되자마자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던 초대 교회를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은 사건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그동안 호시탐탐 교회와 성도들을 노리고 있던 유대인들의 공격 개시 신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순교한 그날부터 교회는 갑자기 몰아닥친 돌풍을 만난 조각배처럼 엄청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물론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그 전에도 두 번 정도 충돌이 있었습니다(4:1~3, 5:17~42). 그러나 그 두 번의 충돌은 사도들로 국한된 부분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은 양상이 아예 달랐습니다. 8장 1절에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라는 표현이나, 3절에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박해는 전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박해요, 아예 예수쟁이 씨를 말리려는 잔혹하고 끈질긴 박해였습니다. 이러한 극심한 박해의 행동대장은 사울이었지요. 사울은 스데반이 죽는 그 순간, 바로 그 자리에서, 박해자의 편에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겨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소탕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이단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나 민족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없애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집집마다 들어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끌어다가 감옥에 넣었으며, 비밀리에 모이던 예배처로 들어가 성도들을 끌어다가 ‘잔멸하고자’ 했습니다. 8장 3절에 나오는 이 “잔멸하다”는 말은 ‘동물과 같은 병적인 잔혹성’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즉 바울은 먹잇감을 노리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달려들어 잡아먹는 맹수(猛獸)처럼 기독교인들을 찾아 다녔을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고 죽이는 일에 누구보다도 잔인하게 굴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울로 대변되는 당시의 박해 상황은 너무나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이런 핍박을 허락하셨을까요? 예루살렘 교회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위에,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최초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소중한 교회를 왜 주님은 보호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에게 의미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즉 예루살렘 교회의 수난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계획은 무엇입니까? 일찍이 주님은 그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성령은 임하셨고 교회와 성도들은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교회는 ① 계속 부흥했으며 ② 말씀이 충만하고 신비한 능력이 나타나며 ③ 사랑이 넘쳐서 서로 상부상조했고 ④ 직분자들을 세워 조직화된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대는 이상적인 교회를 이루는 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시려는 위대한 비전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가 이러한 주님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그대로 뭉쳐 있으니까 교회를 흩으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박해를 만난 예루살렘 교회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학자들은 “역사적으로 교회가 박해에 대응한 방법은 세 가지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박해에 정면 대응하는 것입니다. 박해에 맞서 싸우는 것이죠. 둘째는 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둘째와 비슷하지만 잠적해버리는 것, 즉 숨어버리는 것입니다. 지하로 스며들고 비밀리에 모이는 방법이지요. 스데반 사건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택한 대책은 피하여 흩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습니다. 

2) 흩어진 사람들

이 핍박으로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불렀습니다. 이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는 과거 아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흩어진 유대인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를 멸망시킨 나라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자기 나라와 다른 정복지역으로 끌고 가서 거기 거주하게 했고, 이스라엘에는 다른 이방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그렇게 다른 나라로 끌려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끌려간 그곳에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는데요, 이것을 디아스포라라고 했습니다. 그 후부터는 유대인들이 또 다른 나라로 옮겨 가면서 정착촌을 이루자 그것을 ‘디아스포라’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해서 초대교회 당시, 이스라엘 지역 외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의 수는 약 450만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디아스포라는 기존의 유대인 정착촌이라는 면에서 비슷하지만 그 성격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새롭고도 진정한 의미의 디아스포라’였습니다. 이들을 ‘진정한 디아스포라’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유대주의자들과 그 뒤에 버티고 있는 로마의 박해로 인하여 흩어졌지만, 그렇게 흩어진 사람들이 흩어져 간 그곳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이 비록 박해를 피하여 그리로 갔지만, 흩어져 간 그곳에서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복음을 전하니까 오순절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서 나타났던 주님의 능력이 그곳에도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기독교 디아스포라가 세워지는 곳마다 부흥이 일어나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디아스포라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3) 안디옥 교회를 세운 사람들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주님의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 전해졌으며, 이제 이방인에게로 퍼져나가기 직전, 그것을 위한 전초 기지로서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안디옥은 아주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안디옥은 로마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로마 제국의 제3의 도시로서, 아시아 지역에서는 가장 큰 도시였으며, 로마 제국의 시리아 총독부가 있는 행정의 중심지로서 로마가 파견한 총독이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이 안디옥은 ‘박카스’라는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박카스 신은 술의 신입니다. 따라서 안디옥이 박카스를 주신(主神)으로 섬겼다는 말은 안디옥이 술의 도시요, 향락의 도시였다는 뜻입니다. 또한 다프네라는 여인을 기리는 큰 신전이 있었는데요, 안디옥이 다프테 신을 섬겼다는 것은 안디옥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도시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렇게 안디옥은 땅의 물질을 최고로 여기고, 술과 쾌락에 젖어 있었으며, 타락하고 부패한 거대 도시였습니다. 

이런 안디옥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이 안디옥에 복음을 전하여 안디옥 교회를 세운 사람들이 누구냐에 대한 기록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저 “흩어진 자들”,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라고 만 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무명의 성도들이지요.

거대 도시이자 타락하고 부패한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여 안디옥 교회를 세운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 이름이나 혹은 그들에 대한 어떤 정보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었다는 것 만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엄청난 박해를 피하여 이리 저리 흩어진 사람들 중의 일부라는 것이죠. 그들은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신자들로서는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고 안전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낯선 이방인들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다가 또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유대인 정착촌이나 회당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동족들에게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안디옥으로 온 또 다른 성도들, 즉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 몇 사람”들이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에게도 … 주 예수를 전파”했습니다(20절). 그들은 주님과 주의 복음의 능력을 믿고서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안디옥의 유대인과 헬라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워진 안디옥 교회는 여러 부분에서 아주 특별했습니다. 

❶ 안디옥 교회의 사정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부는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안디옥으로 파송된 바나바는 오늘 본문에서 유명 인사 하나 없는 안디옥 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서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23).” 어떤 이는 이 “은혜”를 ‘성도의 뜨거운 열정’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이것을 ‘복음을 전하려는 의지와 열심’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 “은혜”란 말의 성경원어는 원래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바나바가 본 “은혜”란 안디옥 교회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를 좋아하시고 흡족해하신다는 증거를 그가 보았다는 말입니다. 바나바 뿐 아니라 안디옥 교회를 보는 사람들, 그리고 안디옥 교인들을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와 성도들을 기뻐하셔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또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라고 느끼고 알 수 있었던 그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❷ 안디옥 교회의 특별함은 이것 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를 믿었지만, 그때 이후 2,000년 동안 모든 신자들의 이름이 된 “크리스천”이라는 별칭을 창조해 낸 사람들이었습니다(26절).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란 뜻인데요. 이 별명은 그들 스스로 붙인 것이 아닙니다. 안디옥에 사는 불신자들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불신자들이 보기에 신자들은 단순히 착한 사람, 정직한 사람,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안디옥 신자들이 순수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믿지 않는 그들이 보아도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으로 그들의 삶 전부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뤄진다는 점이었습니다. 단순한 정직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정직했습니다. 천성적으로 진실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진실했습니다. 원래 순수하고 맑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순수하고 맑게 살았습니다. 이것을 불신자들이 확실하게 볼 수 있었고, 그래서 그들이 안디옥 신자들에게 ‘오직 그리스도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라 하여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죽 했으면 “그리스도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별명이 붙여졌겠습니까? 매사가 그리스도뿐인 사람들, 모든 일에 주님만 찾는 사람들, 이것이 무명의 성도들이 세운 안디옥 교회의 특징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안디옥에 그리스도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제 3의 도시, 아시아 최대의 도시, 우상과 쾌락을 숭배하는 도시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죠. 그런데, 이 새로운 바람의 주인공, 이 거대한 새 물결의 주역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누가 이 거대한 도시를 바꾸었습니까? 예, 그들은 바로 ‘무명 전도자들’입니다. 12명의 사도들이나, 스데반이나 빌립 같은 집사들, 혹은 바울처럼 ‘또 다른 사도’로 불리는 특별한 사람들, 믿음의 영웅들에 의해 이뤄진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냥 무명의 성도들로서, 도피해 간 그곳에서조차도 주님의 사랑에 감동하고 복음에 대해 침묵할 수 없었던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헌신적인 전도로, 타락하고 우상과 미신에 젖어 있던 안디옥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안디옥 교회 만 이러 했던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역사, 나아가 주님의 교회의 역사는 유명한 사람들, 특별한 사람들, 몇몇 뛰어난 영웅들이 만들어 낸 역사가 아닙니다. 예수님 승천 이후, 불과 30년 만에 북아프리카부터 스페인까지 로마 제국 전역에 복음이 급속도로 전파되었습니다. 복음이 놀라운 속도로 빠르게 퍼져나간 것입니다. 이 일은 초대 교회의 유명 인사들이나 이름난 사도들이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같은 “무명의” 그리스도인들 때문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만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나 빌립보 교회, 또는 계시록에 나오는 7교회들 역시 사도 바울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 창립 멤버들이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무명의 교인들이 세운 안디옥 교회와 로마 교회가 초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까? 첫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만큼이나 그 위치나 기여도가 뚜렷하고 중요했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님은 소수의 아주 비범한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을 통하여 특별한 일을 하신다.” 예, 정말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름도 없고 그 인생이 빛나지도 않는 사람들을 통하여 위대한 일을 해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없는 자를 택하여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를 택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며, 멸시와 천대 받는 자를 택하여 스스로 고귀하다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시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택하여 배운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3. 평범한 사람들이여, 소망을 가져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영웅을 찾으시고, 그 영웅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은 영웅들의 기록이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은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 인구의 전멸이라는 전무후무한 재앙 가운데서 살아남은 의인 노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믿음의 순수와 삶의 순결을 지녔던 애굽 총리 요셉, 출애굽의 주역 애굽 왕자 모세, 기드온이나 삼손, 다윗과 솔로몬, 엘리아와 엘리사, 오직 믿음의 기도로 아수르의 18만 대군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풍전등화의 나라를 위하여 15년 수명 연장을 기도하여 응답받은 히스기야 왕, 사자 굴의 다니엘, 포로에서 돌아와 이스라엘을 재건한 느헤미야와 에스라,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왕후 에스더 등, 이런 인물들이 평범한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사람들, 믿음의 영웅들이지 않느냐?’라고 반박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특별해졌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 역시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평범한 사람들, 즉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입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는 아주 특별해 보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역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라는 것이고 우리 하나님도 평범한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시려는 말씀입니다. 

특별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평범하나 
오직 주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 
주님이 쓰시는 사람, 
이름을 드러내기보다, 
빛이 나는 인생이 되려하기보다
그저 주님의 손에 들려져 주님의 뜻대로 쓰이는 사람이 되려고 하십시오!

그러면 평범이 비범이 되고
그 평범한 성도들이 모여 한 사람의 영웅이 해낼 수 있는 일보다 더 특별한 일을 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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