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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어나 함께 가자 (아 2: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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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함께 가자 (아 2:10~15) 


오늘은 1919년 3월 1일 대한 독립만세를 힘 있게 외쳤던 삼일 독립 만세 기념일입니다. 국가는 반드시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 당시 로마의 속국이었던 유대나라나, 일제 치하의 우리나라처럼 주권을 다 빼앗기고 다른 나라의 종살이를 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민족이겠습니까? 우리는 정치적인 자유, 신체적인 자유, 또는 신앙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잘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반드시 독립 국가를 이루고 살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정치 경제적으로 만이 아니라, 마귀에게서도 자유로워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마귀의 종, 죄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하고, 일과 사업의 종, 물질의 종도 결코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국가는 반드시 주권을 가진 독립 국가이어야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은 결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고, 철저하게 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문의 사람 ‘人’자는 작대기 두 개가 서로 기대고 있는 형상으로, 인간은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란 의지할 대상이 아니고, 다만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가르쳐 줍니다. 
시 146:3-4절에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되리로다.”고 하였고, 렘 17:5-6에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고 경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물고기에게 있어서 물은 얼마나 의존적인 것입니까? 그러나 물고기에게 있어서 물보다 의존적인 존재가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산다 하여도 예수 떠난 심령은 사는 법이 없어요.♪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마귀에 대하여는 단호하게 대적하고 완전하게 독립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하여는 철두철미하게 의존적인 지혜로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라는 여류 작가 박완서의 소설이 있습니다만, 심리적으로 또는 실제적으로 따뜻한 겨울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겨울은 우리들에게 너무도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세계적인 경제 불황에다가 근래에 드물게 폭설도 자주 내려서, 그야말로 고난의 겨울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추우면 봄이 멀지 않다고 노래했던 시인의 노래처럼, 그 춥고 길게만 느껴졌던 겨울도 지나고 어느덧 이 땅에는 춘삼월 봄이 돌아왔습니다. 

시인 Robert Browning의 시에 ‘봄날 아침’이라는 명시가 있습니다. 시절은 봄날/봄날 아침/아침 일곱 시/이슬 맺히고/종달새 날고/달팽이 기고/주님 계시니/세상 좋아라. 우리의 현실을 보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혼란하고 불안하며, 실망과 탄식과 울분을 금할 수 없는 일들이 많지만, 그러나 계절은 분명 꽃이 만발하고 새들이 노래하는 봄이 찾아 온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시기를, 새 생명이 약동하는 봄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봄을 아주 다양한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 겨울도 지나고

겨울은 삼라만상이 얼어붙는 계절입니다. 북풍한설은 살을 에는 듯하고, 모든 짐승들은 자기 보금자리에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겨울은 매우 추워서 웬만한 것은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다 얼어 죽습니다. 이처럼 자연계에 겨울이 있듯이, 우리 영혼의 세계에도 겨울이 있습니다. 왜 자연계에 겨울이 있습니까? 태양이 지구에서 가장 멀리 있는 때가 겨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심령도 의의 태양이신 주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영혼의 겨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심령, 구원받지 못한 심령은 말하자면 겨울과 같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심령은 마치 겨울과 같아서 모두가 얼어붙어 있습니다. 동토와 같아서 죽음뿐입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사랑도 없습니다. 소망도 없습니다. 기쁨도 없습니다. 감사도 없습니다. 찬송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이 모든 것이 다 가능해졌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에도 겨울이 지나고, 생명이 약동하는 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비도 그쳤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는 봄비가 내립니다. 얼어붙은 땅을 녹이는 비입니다. 더럽혀진 땅을 씻어 내리는 비입니다. 말라붙은 땅을 적시는 비입니다. 이 비를 맞으면 말랐던 초목에 생기가 돋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메마른 심령에도 성령의 단비가 내려야 합니다. 호세아 10장:12절에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내리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말은 우리 심령의 밭을 갈아엎는 회개를 말합니다. 이 시간 회개한 우리의 심령에 봄비로 내리는 성령이 임해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의 싹이 움트고 활짝 꽃피우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지면에는 꽃이 피고

남도에는 벌서 꽃 소식이 들려옵니다. 모두가 얼어붙어 죽음의 세계와 같던 산천에, 죽은 것 같던 나무에서 꽃이 피는 것을 보면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꽃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꽃은 무슨 꽃이나 아름답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와 허물로 인하여 죽었던 우리의 심령에 아름다운 믿음의 꽃, 소망의 꽃, 사랑의 꽃, 찬송의 꽃, 봉사의 꽃이 만발하게 된 것은 모두 기적 같은 주님의 은혜 때문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바라보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겨울과 같이 춥고 무정하고 쌀쌀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쌀쌀한 세상에 살면서도,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 마음이 따뜻한 봄날 같아서 우리 삶 속에 아름다운 꽃이 피게 되는 것입니다. 이 봄 우리 마음의 동산에 사랑과 은혜와 행복의 꽃이 만발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새가 노래하고

비도 오고 아름다운 꽃도 피었으나, 새의 노래 소리가 없으면 봄 동산의 운치가 덜할 것입니다. 비가 그친 맑고 깨끗한 동산,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고, 나뭇가지에서 새들이 노래하는 광경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요 멋진 시입니다. 우리 마음의 동산에도 이와 같은 아름다운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엡 5:18-19절에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마음으로 노래하는 것, 마음으로 찬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설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으로 노래하면 우선 우리 몸의 건강을 도와줍니다. 잠 17: 22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노래가 있으면 혈액 순환도 잘 되고, 소화도 잘되고, 신경의 긴장도 풀리고, 소위 엔돌핀이 많이 생겨서 삶이 생기가 넘치게 됩니다. 마음에 찬송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적이 일어납니다. 바울과 실라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들은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아니하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때에 갑자기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고 쇠고랑이 풀렸습니다. 감옥을 지키던 간수와 그 가족이 예수 믿고 구원받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도 이런 기적을 체험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5. 푸른 무화과가 익고

무화과는 은화 식물과에 속하는 것으로서 꽃은 보이지 아니하지만, 달고 맛있는 열매를 맺어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식물입니다. 이러한 무화과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보이는 소망이 아닙니다. 하늘에 빛나는 찬란한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새 생명의 소망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살아 계셔서 성도들에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도록 역사하십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6. 포도나무는 향기를 토하고

포도나무의 향기는 그윽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고후 2:14-15절에 보면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고 했습니다. 향기에는 끄는 힘이 있습니다. 봄 동산에 아름다운 꽃이 피면 벌과 나비들이 사방에서 모여듭니다. 아름다운 꽃 때문이 아니라 꽃 속에 향기가 있어서 그 향기에 끌려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이 다 그 끄는 힘에 끌려 왔습니다. 2천년 기독교회 역사를 보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복음의 인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의 향기에 도취하여,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그가 주시는 영생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황제도 그랬고, 정치가, 철학자, 과학자, 사업가가 그랬습니다. 향기는 끄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향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더럽고 냄새나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 복음의 향기로 살아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렇듯 주님은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고, 푸른 무화과가 익고, 포도나무가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 영적으로 봄과 같은 계절에, 우리에게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나의 사랑 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말씀합니다. 수년 동안 애타게 짝사랑하던 사람으로부터 어느 날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라고 하는 사랑의 고백을 듣는다면 얼마나 가슴이 뛰겠습니까? 
그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아름다운 꽃길을 함께 걷자고 하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렇지만 주님께서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시는데, 일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깊이 잠든 자 곧 신앙의 잠자는 자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술에 만취한 자 곧 세상에 취한 자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중환자 곧 심령에 큰 병든 자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죽은 자 곧 영적으로 죽은 자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 일어나야 합니까?

1)게으름의 침상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봄이 돌아오면 농부들의 일손이 바빠집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고 갖가지 씨앗도 파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롬 12:11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봄에 힘써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게으름의 침상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2)신앙의 잠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신앙의 잠은 철길을 베고 자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잠은 영원한 멸망과 종이 한 장 차이 밖에 되지 않는 무서운 잠인 것을 잊지 마시고, 오랜 신앙의 동면에서 이제 그만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3)사명의 잠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는 사명을 받고도,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큰 폭풍을 만나게 되고, 풍랑으로 인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 지경에도, 배 밑층에 내려가 깊은 잠이 들었다가 불신 선장으로부터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사명의 잠을 자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엄한 징계가 임하기 전에 속히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4)세상적인 욕망의 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더 사랑하고, 세상 것에 취하여서 취생몽사 하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사형을 시키는 법 중 한 가지는, 산 사람을 죽은 송장과 함께 묶어 병독이 옮아 죽게 한 것이었습니다. 영혼이 죽어서 썩어 만신창이가 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정신없이 붙어 지내다 보면, 우리의 영혼도 병들고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5)실망과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이 누굽니까?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자 누굽니까? 세상만사가 어떻게 순탄하기만을 바라겠습니까?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바람 분 후에 잔잔하고, 소나기 후에 햇빛 나며 수고한 후에 쉼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실망하고 낙심 될 때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에, 코가 쑥 빠져 낙담하고 좌절하지 마시고, 앞이 캄캄할 때 기도하는 것 잊지 마십시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라는 말씀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가 일어나야 합니까? 일하고 활동하기 위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까?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니. 밤이 어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언젠가 우리에게도 반드시 일할 수 없는 노년의 밤이 찾아 올 것입니다. 뜻밖에 질병의 밤이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없습니다. 그러므로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전에 일어나서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합니다. 딛 2:14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가? 에 따라 서 판가름이 나고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라고 했습니다. ‘네 얼굴을 보게 하라’는 말씀은 ‘네 자태, 네 모습을 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그 어떤 것보다 감미롭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은 그 어느 것보다도 아름답습니다. 주님은 성도의 화평한 얼굴 보기를 원하십니다. 순결한 성도의 모습 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성도의 선행과 헌신하는 모습 보기를 원하십니다. 전도하는 모습 보기를 원하십니다. 믿음, 소망, 사랑으로 가득한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 보기를 원하십니다. ‘네 소리를 듣게 하라’ 주님은 성도 기도하는 소리를 기뻐하십니다. 성경 읽는 성도의 소리를 기뻐하십니다. 회개하는 성도의 소리를 기뻐하십니다. 전도하는 성도의 소리를 기뻐하십니다. 찬송하는 성도의 소리를 기뻐하십니다. 감사하는 성도의 소리를 기뻐하십니다. 

15절에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팔레스틴 지방에는 여우가 아주 많다고 합니다. 여우는 아주 교활한 짐승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여우는 의심이 많으며 변덕이 심한 외식적인 짐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변덕이 심한 사람을 가리켜 여우 둔갑한다고 말합니다.

포도원은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작은 여우를 잡으라.’ 작은 여우라도 얼마든지 포도원을 망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인, 강도, 간음과 같은 죄들만 멀리해야 합니까? 작은 여우, 작은 죄악들이라도 방심하면 안 됩니다. 작은 여우는 자라도록 되어 있습니다. 큰 방축도 작은 개미구멍으로 인해 무너지듯, 작은 죄악들 대단치 않게 여기는 죄악들이,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좀 먹고 하나님의 교회를 망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여우, 작은 의심, 작은 부정적인 말, 시기 질투, 혈기, 죄스러운 작은 언행을 멀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어나 함께 가자!’ 봄을 가리켜 Spring이라고 합니다. 봄은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힘차게 새 싹이 트고, 새 움이 돋는 계절입니다. 오는 3월 5일은 경칩입니다. 겨우내 잠자던 개구리도 오랜 동면에서 깨어난다는 절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물이 일어나고 소생하는데 언제까지 자고만 있을 것입니까? 이 시기가 어떠한 시기입니까?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그러므로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말씀합니다. 

폭설과 환율의 폭등에서 얼마나 떨고 추었던 겨울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또 얼마나 기다렸던 봄인지 모릅니다. 이 찬란한 소망의 봄에 우리 모두 일어나 주님과 함께 갑시다. 우리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우리 함께 힘써 복음의 씨를 뿌리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심은, 삶의 목적을 주님과 함께 하자는 말씀이고, 삶의 푯대를 주님과 함께 하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고난도 함께 하고, 영광도 함께 누리자는 말씀입니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는 주님의 사랑의 초대에 반드시 응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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