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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얼굴에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 (고후 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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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얼굴에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 (고후 4:3-6)   


오늘은 주현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리고 변화주일 곧 주님의 신상변모 주일입니다. 성서일과에 보면 오늘 묵상해야 할 말씀이 열왕기하 2장 1절에서 12절의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 그리고 마가복음 9장 2절에서 9절의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 기도하실 때 놀랍게 변모하신 일, 다음은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후서 4장 3절에서 6절의 말씀입니다. 본문들을 통해 ‘계승’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엘리야에게서 엘리사에게로 계승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변형사건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눈이 부시도록 예수에게서 나타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비취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사건과 말씀을 통하여 큰 깨달음을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어두운 세상에 밝히 비춰지기를 축원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이제 막 대학생이 되어서 사귀게 된 한 쌍의 커플이 있었습니다. 세 번째 만나던 날, 여자의 집 앞 골목길에서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작별키스를 해도 돼?” 여자는 남자를 보며 미소만 지은 채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자가 다시한번 용기를 내서 말합니다. 
“자기, 작별 키스를 해도 돼?” 그런데 여자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면서 살짝 미소를 짓고는 역시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것입니다.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남자가 소리칩니다. “너, 귀머거리야?” 그러자 여자가 남자를 보며 “넌 식물인간이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식물인간이 아닙니까? 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에게 계승되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구약의 말씀 열왕기하 2장에 보면, 엘리야와 엘리사는 그들의 여행을 길갈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더 이상 따라 오지 말 것을 세 번이나 권합니다. 엘리야는 엘리사가 진정으로 스승인 자신에게 충성하는지를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번 엘리사는 그의 충성을 입증합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여행은 길갈에서 벧엘로, 그리고 여리고를 지나 요단까지 이릅니다. 그때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엘리사는 스승인 엘리야가 받은 성령의 능력을 갑절이나 받을 것을 요구합니다. 신명기 21장 17절에 보면, 장자는 아버지의 재산 중 두 몫을 유산으로 요구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제자들 가운데서도 자신이 장자임을 주장합니다. 엘리야는 만약 엘리사가 끝까지 지켜서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그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말합니다. 하늘에서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내려와 회오리바람 속에서 엘리야를 데리고 올라갑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집어 들고 요단강을 치자, 물이 갈라지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 이야기의 중요한 점은, 엘리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엘리야가 수행하던 하나님의 예언자적 능력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예언자적 능력은 어떤 특별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승을 수행하고자 기꺼이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계승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은 언제나 믿음의 공동체와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역사해왔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난 주 우리들은 고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바라보며 온 국민이 슬픔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통하여 이 백성에게 보이셨던 하나님의 영광이 멈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군가 그일을 계승하게 될 종을 통하여 이 백성에게 보이실 하늘의 영광을 계속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족하지만 오늘도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변모사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한 얼마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 중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오르십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광채 나는 모습으로 변형되시며, 제자들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십니다. 왜 모세와 엘리야인가? 묻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며,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두 사람 다 하늘로 올려진 자라고 말합니다. 물론 모세는 죽어 묻혔지만, 유대교에서는 그도 하늘로 올려졌다고 믿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중요한 때에 모세와 엘리야는 각자가 하나님께 받았던 사명과 성령의 능력을 계승하여 나타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은 예수께서 갈릴리에서의 공적인 활동을 마치고 수난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직전에 자신의 변한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겪을 수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제자들, 부활 후에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삶,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자신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의 변형 사건을 부활 뒤에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보았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해, 최악의 자리에서도 최선을 다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승된 사명과 능력을 받은 제자들로 이 땅에 교회가 서고,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계속하여 비취어 왔음을 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려는 것은 우리들에게 계승되는 하나님의 영광,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분명하게 보았던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6절의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아멘!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알고, 우리에게 계승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계승된 그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타나느냐? 바울은 5절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 주 되신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아멘! 이 내용을 한 마디로 ‘복음’ 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요. 우리는 이 복음의 ‘계승자’요, 이 복음을 전파할 ‘사명자’라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명자입니다. 복음을 위해 부름을 받은 예수그리스도의 종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복음 전도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복음으로 살고, 복음 때문에 살고, 복음을 위해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지 마십시오.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십일조와 헌금을 한 것으로 모든 의무를 다 감당하였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달려가야 할 사명자입니다. 오늘날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신 사명을 잊고 살아갑니다. 사명 없이, 목적 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그 어느 때 보다도 현재의 삶은 나쁘고 고단합니다. 
먹고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사명만으로 어떻게 살겠느냐고 반문하고픈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다고 놓아버리고, 바쁘다고 잊어버려도 되는 것이 사명이 아닙니다. 사명은 아무리 힘들고 버거워도 감당하며 가야 합니다. 죽어도 끝까지 붙잡고 가야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사명감이 없으면 쉽게 지칩니다. 사명감이 없으면 쉽게 포기합니다. 사명감이 없으면 쉬운 길을 찾아갑니다. 사명감으로 살지 않으면 기독교는 또 하나의 종교일 뿐입니다. 사명감으로 드리지 않으면 예배도 종교행사로 전락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고 처음 붙들었던 그 사명이 있으십니까? 끝까지 붙드셔야 합니다. 절대로 놓아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직장에 취업한 지 체 한 달도 지나지 않은 딸이 집에 돌아와서는 어머니에게 불평을 쏟아 놓기 시작합니다. 직장에서 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고 직장 상사와 동료들과의 관계도 별로 좋지 않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조용히 부엌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세 개의 냄비에 물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냄비에는 당근을 넣고, 두 번째 냄비에는 계란을 넣고, 세 번째 냄비에는 갈지 않은 커피 열매를 넣었습니다. 각각의 냄비에 불을 켜서 물을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두 모녀는 한 마디의 대화도 없이 그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20분이 지나자 어머니는 불을 껐습니다. 그리고는 그 첫 번째 그릇의 당근을, 두 번째 그릇에는 찐 계란을, 세 번째 그릇에서는 국자로 커피 열매를 퍼담았습니다. 그녀는 딸에게 하나씩 하나씩 주의 깊게 관찰하도록 시켰습니다. 딸은 찔러도 보고, 만져도 보고, 향기도 맡아 봅니다. 잠시후 어머니는 딸에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단다. 이 당근을 보렴. 처음에는 젓가락도 뚫기 힘들 정도로 딱딱했지만 지금은 손가락 힘만으로도 부서질 정도로 물러졌구나. 
그리고 이 계란을 보렴. 처음에는 이 얇은 껍질에 보호받아야 할 만큼 부드럽던 액체가 이제는 딱딱해져서 껍질을 깨고 말았구나. 끓인 물과 같은 환경에 처하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한단다. 곧은 마음은 물러지고, 부드럽고 선하던 마음도 고난 뒤에 완고해지기도 한단다. 하지만 이 커피열매를 보렴. 끓이기 전이나 끓인 후나 겉과 속이 그대로이지 않니?” 그녀는 딸에게 커피열매가 들어있던 냄비의 물을 마셔보라고 합니다. 딸은 한 모금 입에 물고는 그 향기로움에 미소를 짓습니다. “엄마는 사랑하는 내 딸이 힘들다고 어렵다고 쉽게 포기하고 절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시련에도 변하지 않으며, 도리어 향기를 내는 그런 삶을 살면 좋겠구나” 말하며 딸의 손을 살며시 잡았습니다.

고난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의 상황은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붙든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고난에 반응하는 방식은 매우 다릅니다. 그 결과도 다릅니다. 사명감이 없는 사람은 고난이 올 때 당근이나 계란과 같이 반응을 합니다. 

먼저, 당근같은 인생이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강하고 견고합니다. 그러나 고난 후에는 그 힘을 잃고 무기력해집니다. 그래서 쉽게 포기합니다. 다시 일어서려 하지 않습니다. 주저앉고 맙니다. 또한 계란 같은 인생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부드럽고 유순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고난 후에는 그 심령이 딱딱해져 껍질을 깨어 버리듯 자신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깨버립니다. 그러나 사명자는 다릅니다. 커피 열매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고난이 그에게 옵니다. 분명 그들에게도 고난은 아프고 힘이 듭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견디어 냅니다.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불이 그들에게 가해질 때, 오히려 그들은 아름다운 향기를 냅니다. 견디기 힘든 고난이라는 환경이 그들을 괴롭히면 오히려 아름다운 향기나는 원두커피로 변합니다. 사명자들에게 고난은 도리어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게 계승하신 사명을 간직하여 고난이 축복이 되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고난을 사명으로 이기고 아름다운 향기를 만들어낸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이 클수록 그는 사명을 더욱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놀라운 향기가 온 세상에 전하여 집니다. 그는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오직 복음전도를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길은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고된 길이었습니다.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에서 9절은 그가 겪은 고통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을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고통과 박해가 얼마나 심했던지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렇게 외부의 고통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내부에서도 그를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린도교회에 침투하여 바울의 사도직과 바울이 전하던 복음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 대한 인신공격은 물론이고 그의 사도직과 복음 자체에 대한 비난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에게 더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외부의 적보다 이러한 내부의 적들의 공격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과 핍박의 상황도 사도 바울을 넘어뜨리지는 못했습니다. 그 역경의 온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사도 바울은 더욱 그윽한 향기를 세상에 내뿜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고난 속에서 사도바울은 신약성경의 절반을 기록합니다. 고난 속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전도자로서의 사명을 단 한번도 잊지 않고 살았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에게 계승된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단 한순간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 사명자로서 잊지 말아야 할 태도를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다 보면, 어느 새 나를 높이고, 내 생각을 전하고, 내 경험을 전하고, 내 철학을 전할 때가 있습니다. 또 전도가 잘 되기라도 하는 날이면, 내가 이룬 일인 양 금새 교만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사명자의 임무는 나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또한 사명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나에게 사명을 주어 보내신 이는 누구인가를 잊지 않는 것은 사명자에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여기서 사도 바울이 확신했던 내용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그리스도만이 참된 주님이시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예수님 때문에 자신이 교회를 섬기는 종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계승하는 사명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종이요, 교회의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한 고난과 고린도교회의 오해와 무시 속에서도 묵묵히 견디며 복음 전도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종의 자세로 하나님과 교회를 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계승하는 우리들도 종 된 우리들의 얼굴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나타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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