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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요일 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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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요일 3:1~16)

 
지난 두어 주간 동안 우리나라는 천주교의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으로 인하여 종교계는 말할 것도 없고 전 언론계와 정치계까지도 마치 '천주교가 국교인 나라'인 것처럼 들끓었습니다.
특히 김 추기경이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감사합니다. 사랑하세요."라는 말이 곳곳에서 대서특필되면서 대한민국의 온 국민이 무슨 '감동의 도가니'에 빠진 듯이 난리였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생각해서 '감사합니다. 사랑하세요.'라는 말이 정말 그렇게도 뜻 깊고도 훌륭한 말입니까?

자기에게 사랑을 베풀어 준 사람이나 자기를 치료해 준 의사에게 '고맙다'고 인사할 줄 아는 것이야 유치원 다니는 어린이도 할 줄 아는 것이요, '서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도 모든 부모가 자식들에게, 모든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사람의 유언이란 그가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김 추기경이 그런 말로 유언을 남겼다는 것은 그의 신앙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또한 그런 사람을 추기경으로 떠받들고 있는 천주교가 실제로 어떤 종교인지를 다시 한 번 극명하게 드러내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우리 기독신자들이 아주 많이 사용하고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단어의 정확한 정의는 오해되고 그 깊은 의미는 희석된 가운데 실제로는 가장 값싸게 오용되어 버리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요한일서는 초대교회 시절에 기독교가 내부로부터 소위 '영지주의'에 의하여 신학적인 혼란을 겪게 되자 기독교 진리와 이단 사상을 극명하게 대조시키면서 바른 신앙의 길을 보여 주기 위하여 기록된 성경인데, 그 내용 중에서 특히 강조된 것들 중에 하나가 바로 '참된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본문의 증거를 통하여 우리 기독신자들이 알고 체험하고 또 서로 나누는 사랑이 과연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기독신자의 참된 사랑은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된 형제들의 사랑'입니다. 

본문 1절부터 3절의 말씀에 "1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어떠한 사랑"이란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란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세상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흔한 사랑이 결코 아니라 '아주 위대하고도 특별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성부의 사랑이 원인이 됨으로써 기독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원래 '죄인'으로서 도저히 그런 자격이 전무했던 자들이 당신의 독생자까지 대속제물로 보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이제는 '하나님의 양자'라는 합법적인 신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하도다"라는 말은, 그렇게 특별한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대상은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라는 제한된 사람들, 즉 기독신자들뿐이라고 명백히 선을 그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차이점은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는 말씀에서도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런 하나님을 모르고 그런 성부의 사랑을 체험해 보지 못한 불신자들은 그런 사랑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독신자들을 당연히 알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은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이라는 말씀은 바로 예수님 재림 때에 모든 신자들이 '성화의 완성'에 이르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바로 그날에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 즉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또한 성자로서의 영광을 입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친히 목도하면서 바로 그 주님과 똑같은 '영화의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며, 바로 "이 소망을 가진 자"들인 까닭에 이것이 이루어질 그날까지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성화의 진보를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게 됩니다.
즉 다시 말해서 기독신자들은 장차 '하나님의 독생자'와 '똑같게 될' 정도로 진짜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바로 이처럼 '우리' 기독신자들은 그 신분이 세상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바로 이 점을 계속 이어지는 본문에서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하나님께로 난 자"라는 표현은 그런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의 '출생성분'이 바로 성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보혈에 근거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10절에서는 아예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을 극명하게 대조시키면서, 후자는 명백히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들이라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그리고 11절 이하에서는 그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켜 "형제"라고 부르면서 영적으로 같은 혈통을 나눈 성도들 사이에서 발휘되어야 할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말씀들은 이 세상에는 '성부를 아버지로 모신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마귀의 자녀들'이라는 두 가지 명백히 다른 가족들이 존재함을 증거해 줍니다.
그리고 본문과 요한일서 전체에서 시종일관 강조하고 있는 '사랑'이란 바로 이 '하나님의 가족 안에 들어 있는 형제들 사이의 사랑'일 뿐이지 '불신자 사랑'이나 '우상숭배자 사랑'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아버지가 같아야 형제가 될 수 있고, 적어도 '형제사랑'이라는 것은 일단 그렇게 '진짜 형제지간'이 되어야 나누어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기독신자들은 '이웃사랑' 역시 실천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고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지고 전도대상자로서 사랑하는 것일 뿐이지,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나누는 '형제사랑'과 결코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옹졸한 마음'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에게 저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 친부모나 친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모든 타인을 사랑합니까?
그것은 당연히 불가능할 뿐 아니라, 만약 그렇게 사랑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부모에 대한 불효요 친형제자매에 대한 냉대가 아니겠습니까?
자기 혈육에 대한 사랑은 당연히 남다른 것이며 특별한 것이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 기독신자의 사랑, 곧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풀어 주신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나누어지는 사랑'이란 바로 그렇게 특별한 사랑입니다.
아무에게나 똑같이 나누어 주는 값싼 사랑이 결코 아니라 서로 '집안이 다른' 마귀의 자녀들은 절대로 알 수도, 체험할 수도 없는 기독신자 고유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된 신자가 어떻게 '마귀의 자녀'된 사람을 자기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인 신앙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사랑할 수가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기독신자의 참된 사랑이란 오로지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하며 '같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진짜 형제자매 사이에서 먼저 나누어져야 마땅한 사랑'임을 꼭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독신자의 참된 사랑은 '죄를 없이해 주신 예수님께로부터 배운 사랑'입니다. 

4절 이하 9절에 기록하기를 "4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그가 우리 죄를 없이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9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는 말씀은 죄는 곧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 즉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를 내려 줍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원래 이런 죄의 속박과 그 저주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죄를 완전히 '없애 주시려고' 스스로 사람의 몸까지 입으시고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신바' 되셨습니다.
그처럼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어 주려고 화육강세하셨기 때문에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는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비록 인간의 몸은 입으셨지만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완전 순결'하신 분이셨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라는 말씀은 적어도 '계속적, 습관적으로 범죄하지는 아니한다.'는 의미입니다.
죄의 더러움과 그 결과의 저주를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죄를 용서받는 은혜를 체험한 기독신자는 절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라는 말씀이 바로 성령을 통해 더욱 거룩하게 되는 성화의 씨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래서 참된 성도는 "아무도 미혹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마음과 생활을 지키는 가운데 오로지 "그의 의로우심"을 본받아 "의를 행하는 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경건생활에서 반드시 진보를 보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신자들은 죄를 두려워하는 그런 자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범죄하는 자"요 아직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는" 자, 즉 자기 죄를 사해 주려 오신 예수님을 전혀 알지도 못하고 영접할 줄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로지 "처음부터 범죄한" 마귀, 즉 죄를 세상에 불러들인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것"은 바로 그런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우리의 죄를 완전히 '없애 버려 주시기 위함'이었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베풀어 주신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요 방법'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16절에서도 "그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라고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모르면 '진짜 사랑'을 알 길이 전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랑을 알지 못하면 제아무리 타인에게 친절과 자비와 관용과 희생을 베풀어 준다 해도, 제 아무리 사해동포애 같은 넓고 큰 사랑을 만인에게 실천한다고 해도, 제 아무리 천사와 같은 미소를 띠고 모든 사람들을 대한다 해도 실제로는 사랑의 '사' 자도 아직 모르고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불법에 빠져 있던 자들의 명백하고도 대책이 없는 죄를 '완전히 없이해 주시는' 이 놀랍고도 위대하고도 고맙기 짝이 없는 십자가 사랑을 체험하고 전파할 줄 모르면, 아무리 평생을 바쳐 병자를 간호하고 빈민을 구제한다 해도 미안하지만 적어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일 뿐인 것입니다.

마리아 테레사 수녀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음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녀는 '죄를 완전히 없이 해 주시는 십자가의 사랑'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도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도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약자를 도와줄 줄 아는 '사람의 사랑'은 알았겠지만 '그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이 최고의 진짜 사랑, 이 '하나님의 사랑'은 전혀 몰랐던 까닭에, "마치 모든 것이 죽은 것처럼 내 안에 너무나 끔찍한 어둠이 있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은 당신(그녀의 고해신부)을 특별히 사랑하신다. 그러나 나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나 커서 (예수님을)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라고 자신의 불신앙을 친필로 분명히 남겨 놓지 않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부처님의 자비'라는 것은 절대로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랑'은 '인간 사회의 싸움을 없애기 위한 용서와 화목, 이해와 관용' 같은 것들과 결코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영벌에서 구원해 주는 사랑'을 그저 '나이팅게일의 사랑'과 비슷한 것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이 바로 천주교에서 '전염시키고' 있는 '인본주의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과 "탄식 소리뿐"인 까닭은 바로 "악을 선케 만들고 모든 소망 채우는 사랑"이 없기 때문인 것을 깨닫고 "먼저 믿는 사람들"답게 오로지 "예수 사랑 가지고 만민 중에 나가서" 이 '십자가 대속의 사랑'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기독신자의 참된 사랑은 '세상으로부터는 미움을 받게 되어 있는 사랑'입니다. 

10절부터 15절까지에 기록하기를 "10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1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13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15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본문 10절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구별되는 "마귀의 자녀들"은 십자가 사랑을 모르는 까닭에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가 됨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그들은 또한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로 나타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처음부터 들은 소식"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될 때부터 받게 되는 '새 계명'입니다.
즉 '같은 아버지'를 모시고 '같은 예수 십자가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당연히 서로 '형제의 사랑'을 나누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랑을 나누는 형제를 '사랑치 아니할' 뿐 아니라 '미워하는' 자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가인"이라고 예를 들었습니다.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며 그 아우를 죽였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대로, 가인은 겉보기에는 아벨과 '같은 형제'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악한 마귀에게 속한 자'였으며 그런 까닭에 아벨을 미워하되 '그를 죽일 정도로' 미워했던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어찐 연고로" 자기 아우에 대하여 그런 증오심을 발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까?
바로 아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한 예물로써 제사를 드리는 그 '의로운 행위'가 그토록 미워서 결국 살인까지 저질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13절은 연이어 말씀하시기를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상"이 바로 그 앞의 "마귀의 자녀"나 "가인"과 동격으로 쓰이고 있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형제'들을 '마귀의 자녀 된 불신 세상'이 미워하는 것은 지극히 자동적인 반응이요 당연한 현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그처럼 '형제를 미워하고 살인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함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
즉 '진짜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보혈로 구속 받은 형제 신자'를 극도로 증오하고 박해하는 자들은 비록 겉으로는 '형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우를 살인까지 한 가인' 같은 자들, 다시 말해서 '같은 기독교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원받지 못할 마귀의 자녀요 이단'일 뿐인 것입니다.

참된 사랑에는 반드시 그것을 미워하는 원수가 있기 마련입니다.
기독신자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세상은 반드시 그런 신자를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가 오로지 '십자가 사랑'만을 선포하면 마귀의 자녀들로 꽉 차 있는 세상은 절대로 그런 목사를 가리켜 절대로 '진정한 사랑의 대사'니 '종교화합의 선구자'니 하는 말로 칭찬하지 않고 반드시 '속 좁은 인간'이니 '수구주의의 앞잡이'니 라는 말로 욕을 퍼붓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귀의 자녀들' 중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 바로 '겉으로는 형제인 척 하면서 아우를 살인하는 가인'입니다.
그리고 천주교야말로 겉으로는 기독교를 향하여 '나누어진 형제'라고 부르면서 만면에 미소를 띤 '양의 탈'을 쓰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기회만 있으면 참된 기독교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이리의 본성과 사자의 살기'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이 시대의 가인'인 것은 과거의 교회사가 고스란히 증거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1년 반 전의 종교개혁기념주일 때에 천주교의 이단성에 대한 설교를 두 주일 연속으로 했었는데 그것이 텔레비전에서는 방송이 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 무슨 '방송윤리위원회'인지 뭔지 하는 것을 천주교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목사의 설교가 천주교 방송도 아닌 기독교 방송에서 방송금지를 당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타종교를 비방하는 내용의 설교는 방송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만, 정말 어처구니없는 소리였습니다.

'비방'과 '비판'은 엄연히 다릅니다.
목사가 자기가 믿는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이며 천주교는 이단이라고 설교하는 것이 방송 불가하다면, 정치인이 자기가 속한 정당의 정책은 옳고 반대편 정당의 주장은 나라를 망칠 소리라고 비판하는 것도 방송에 나올 수 없는 '비방'이 된다는 말입니까?
학자가 자기의 학설이 진리이고 상대방의 학설은 틀린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공개적으로 발표해서는 안 될 '비방'이라는 말입니까?

그래도 저는 그런 천주교 세력의 방해공작이나 욕설은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며, '형제를 가장한 이단'의 당연한 반응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그런 '천주교와 친하게 지내는 기독교 목사'들입니다.
천주교의 이단성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그 결과 오늘날 개신교 특히 장로교가 세워진 것인데, 이제 와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일치운동'을 주장하고 있는 목사들은 도대체 '어떤 신앙'과 '어떤 양심'으로 그런 언행을 보이고 있는 것인지 저로서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길이 없는, 정말 '이상히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천주교 사제로부터 존경을 받는 목사, 불교의 중과 친분을 나누는 목사는 적어도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만을 의지하는' 목사는 결코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인들과 모든 불신자들까지도 다 '공감하는 사랑'을 외치는 기독교인은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 보혈로 통하는 진짜 형제들의 사랑'을 나누고 전하는 기독신자는 필연적으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그런 일을 당할 때에 결코 '이상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끝까지 그 참된 사랑을 담대하게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 16절의 말씀에 결론적으로 선언하기를 "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통하여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받게 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래서 '함께 형제자매 된 교회공동체를 중심으로 서로 목숨을 버릴 각오로 나누는 사랑'만이 기독신자들의 진짜 사랑입니다. 

하지만 김수환 추기경의 유언에 이런 사랑이 한 마디라도 들어 있었습니까?
그는 자기를 사랑해 준 사람들에게만 "감사합니다."라고 했지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사랑하세요."라고 즉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세요.'라고만 했지 '예수님을 사랑하세요.'라는 말이나 최소한 '예수님처럼 사랑하세요.'라는 말조차 남길 줄도 몰랐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천주교는 '하나님 사랑'이라는 이 아주 특별하고 고귀한 사랑을 모든 종교인들과 불신자들까지도 다 같이 통할 수 있는 '싸구려 사랑'으로 완전히 평가절하시켜서 아무한테나 팔아먹고 있는 인본주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원래가 진짜 사랑은 항상 '배타적인 사랑'(exclusive love), 즉 '특별한 대상만을 향한 사랑, 다른 사람은 제외된 독점적인 사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두 연인들이 서로 진실하게 사랑하는 관계를 맺게 되면 각자가 상대방이 아닌 다른 사람을 그들 사이에 섞여들게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상대방이 아닌 제3자도 상대방과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배신이요 부정이며 외도가 될 뿐이지 않겠습니까?

우리 기독신자의 사랑 역시 '특별한 대상만을 향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자'라는 특별한 대상만을 사랑하사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으며,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 십자가 대속의 보혈을 오직 '당신을 믿는 자'들만을 위하여 흘려 주셨습니다.
그런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자들도 할 줄 아는 '세상의 사랑'과 섞어 버린다는 것이 말이나 되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불신앙이요 배교요 이단이 될 뿐인 것입니다. 
천주교가 타종교인들이나 비종교인들조차 다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결코 '하나님 사랑'하는 자들이 아닌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무나 다 똑같이 사랑한다면 자연히 그 사랑의 강도는 약해지고 그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리더스다이제스트에서 "제발 'gay'라는 단어를 돌려 달라."는 내용의 칼럼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글을 쓴 사람은 동성연애자들이 저희들끼리 무슨 짓을 하든지는 자기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왜 하필이면 'gay'라는 말을 '동성연애자'라는 뜻의 단어로 바꾸어 버렸는지 그것이 너무 아깝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이 단어는 그런 의미의 명사가 아니라 '무언가 절로 기분이 가볍고 산뜻하고 상쾌한' 상태를 의미하는 형용사로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에도 나오는 단어인데, 그만 동성연애자들이 자기네들의 대명사로 만들어 버린 바람에 그 '좋은 단어'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면서 '하소연 같은 항의'를 하는 내용의 칼럼이었습니다.

이 '하나님 사랑'이라는 말이야말로 그처럼 엉뚱한 의미로 바뀌어서 함부로 오용되고 있습니다.
이 좋고도 멋진 말이 '그리스도와 벨리알의 연합'을 위한 표어로, '유일신 신앙을 부인하고 범신론을 따라가는 금송아지 숭배'의 구호로, '종교개혁자 선배들에게 침을 뱉고 천주교 앞에 머리를 숙이는 배신자'들의 현수막의 슬로건으로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마귀의 자녀'들이 제멋대로 하는 것이야 정말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그네들이 '하나님 사랑' '십자가 사랑' '예수 사랑'이라는 말만은 제발 쓰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필요 없는 사람들끼리의 사랑'이나 '종교 간에 아무 차이가 없다고 믿는 종교인들끼리의 사랑' 따위로 좀 솔직하게 써 줄 수는 없겠습니까? 

기독신자의 진짜 사랑은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자녀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확증된 사랑'이며 그래서 '마귀의 자녀들로부터는 미움을 받게 되어 있는 사랑'인 것을 확실히 깨닫고서, 우리가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은 오직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일 뿐임을 고백하고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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