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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냄을 받은 자의 위치 (마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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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냄을 받은 자의 위치 (마 10:16)


어느 날 아이가 항상 책상 위 같은 자리에 놓여 있는 성경책을 보고 엄마에게 묻습니다.“엄마,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저 책은 누구 책이야?”엄마는 깜짝 놀랍니다. 손을 잡고 늘 교회는 다녔지만 어린 것이 뭘 알랴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성경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아서 대견스럽게 생각하면서 친절하게 설명을 했습니다.“응 이 책은 하나님의 말씀이 적힌 책이지 그러니까 하나님의 책이야.”그랬더니 이 아이가 엄마를 쳐다보면서 하는 말이“그래? 그래서 엄마가 한 번도 안 건드리는구나.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 돌려보내야겠네.”그러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운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읽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구원을 받고 그 말씀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고 사망을 이긴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그렇게 고백하면서 이 말씀대로 얼마나 행하고 있습니까? 

철학자[파스칼]은 그의 책<팡세>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않고서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다. 사람이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내가 누군지를 알지 못하는 인생은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보세요. 내가 나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하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칼 바르트]는 말하기를“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을 만날 수는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어 가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내가 누군지를 알고 그리고 내 운명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면서 무엇을 듣고, 무엇을 배웁니까? 하나님은 항상 말씀 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펼칠 때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하루라도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경을 매일의 영적 양식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본문에서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0장은 흔히 소명장, 사명장, 파송장이라고 부릅니다. 왜 이렇게 부르느냐 하면 먼저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부르십니다. 그 다음에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고 병과 악한 것을 고치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하고 보내십니다. 1절부터 5절까지를 보면 이 중요한 세 단어가 나옵니다. 

우선 1절에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하는 말씀이 있고, 역시 1절에 “권능을 주시니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영어로 Calling, Giving, Sending이라고 하는데 즉<부르시고>,<주시고>,<보내시는>위임을 받은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오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내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내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제 나를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보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모두에게는 내 삶의 현장이 바로 Mission Field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내가 서 있는 그곳이 바로 내 전도 현장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르시고, 주시고, 보내신 데는 그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를 부르셨다고 하는 것에서 모든 자격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실 때에는 내가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잘났든, 못났든, 능력이 있든, 무능하든 그런 것은 따지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능력 있는 사람을 부르신다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꼭 능력 없는 사람을 부르신다는 것도 아닙니다. 있거나 없거나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것입니다. 고로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나의 부족함에 대해서 변명할 것도 없고 나의 능력에 대해서 교만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부르셨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고 부르셨으니 따라갈 뿐입니다. 

그리고 주셨다는 말씀 또한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신 다음에 권능을 주십니다. 이 말을 우리가 새겨들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적으로 당신께서 주십니다. 그런데 그 주신 권능을 우리가 쉽게 알 길이 없습니다. 무슨 자격증을 준 것도 아니요, 수료증을 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권능을 주셨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이 받아들여집니까?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주신 권능이 있습니까? 결과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 모두에게도 주님께서 주신 권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나타나는 권능의 증거는 오직 하나 순종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순종해 보지 않고는 그 권능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믿고 순종할 때 그 권능이 나타난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것을 은사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여간 오늘 말씀에도 분명히 밝히는 사실이 우리 모두에게 권능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권능을 알기를 원하신다면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그 권능이 여러분에게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내가 너를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보내시는데 어떻게 보내시느냐 오늘 본문입니다.“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상식적으로 양을 이리가운데 보내는 것은 죽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양은 천성적으로 바보 같은 동물입니다. 무능합니다. 독

도 없습니다. 순진하고 순종만 할 줄 압니다. 그래서 반드시 목자가 인도해 주어야만 그 길로 갑니다. 아무리 수백 마리의 양이 있어도 목자 혼자서 충분히 다룰 수가 있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순종적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양이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이리 가운데로 보내진 양입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세상은 마치 이리떼가 우글거리는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서로 물고 뜯고 싸웁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혈투가 벌어지는 그런 곳입니다. 이기는 자는 남고 지는 자는 사라지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 한복판에 들어가서 양처럼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양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양이 이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양은 언제까지나 양이어야 합니다. 양이 양을 만났을 때는 양이요, 이리를 만났을 때는 이리요, 호랑이를 만났을 때는 호랑이요, 사자를 만났을 때에는 사자가 된다면 이미 양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양은 언제나 어디서나 양이어야 한다는 이것이 우리의 실체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부를 때 목사라고 부릅니다. 목사라는 말이 원래 목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네, 양이라는 말입니다. 그럼 목자가 가자는 길로 양은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면서 따라가면 되는데 가끔 보면 염소가 있어요. 양은 뿔로 들이박는 경우가 없는데 염소는 수시로 뿔로 들이받거든요. 어떻게 되나 보자 싶어서 괜히 뒤에서 툭 툭 받아 봅니다. 양은 양이어야지 염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이리 가운데로 보내시면서“너희는 양이라.”말씀 하시는 의미입니다. 

그러시면서 이리 가운데서 양처럼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무엇이라 하십니까?“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는 것이 그 말씀입니다. 왜 하필이면 뱀입니까? 뱀을 보고 도대체 무엇을 배우라는 것입니까? 세상에 많은 짐승 중에 뱀처럼 열악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동물은 드뭅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의 구조가 공통적으로 비슷합니다. 다리가 있든지, 날개가 있든지, 그래서 걸어 다니든지, 날아다니든지 합니다. 

그런데 뱀은 생긴 것이 기다란 막대기모양입니다. 손도 없고 발도 없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열악한 환경에 있지만 뱀은 그 불편한 몸을 가지고 못 가는 데가 없습니다. 지느러미가 없는데도 물속에서는 헤엄을 치고, 손발이 없는데도 나무를 잘 타고, 다리가 없지만 숲속에 달릴 때 보면 엄청나게 빠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아무 것도 갖춰지지 않은 열악한 조건이지만 그 상황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뱀의 그 지혜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불평합니다. 어떻게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이리가 사는 세상에 살라는 것이냐고, 왜 날개도 없이 날라고 하고, 왜 발톱도 없이 싸우라고 하느냐고, 이 험난한 세상에 뿔도 없이 살아가라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하느냐고 우리는 불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에게 무엇이 없어서 문제입니까? 아

닙니다. 뱀과 같이 살아가는 지혜가 없어서 문제입니다. 없는 것만 바라보고 한탄하고 있으면 끝이 없습니다. 있는 것을 사용할 줄 아는 지혜가 훨씬 필요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또 그런가 하면 불의한 세상에 살지만은“비둘기와 같이 순결 하라”고 하십니다. 비둘기의 순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비둘기는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먹어서 안 될 것은 안 먹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비둘기 하면 아주 순결 그 자체로 꼽습니다. 구약시대에 보면 꼭 비둘기가 제물로 사용되었던 것을 봅니다. 바로 이 비둘기의 순결 때문입니다. 제물은 언제나 가장 깨끗한 것을 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부정하거나 더러운 것이나 흠이 있는 것은 제물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둘기를 제물로 드렸다는 의미는 가장 깨끗하고 순결 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주님께서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시는 것은 비둘기의 이러한 특징을 들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유감스럽게도 마음만 먹으면 이것 저 것 아무 것이나 먹을 게 많고 또 먹으면 독이 되는 것들이 참으로 많은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주님의 보내심에 합당하게 살려면 비둘기와 같이 순결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욕심이 우리를 망하게 하는 세상입니다. 불의가 수시로 유혹하는 세상입니다. 

욕심을 부리고 그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이리처럼 살거나, 혹은 이리가 되어서 어떤 불의를 저질러서라도 욕심을 채우겠다고 한다면 우리를 부르시고 권능을 주셔서 양으로 보내신 주님의 뜻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은 이 세상이 이리 같음을 아시고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으로 보내시기 위하여 부르시고 권능을 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궁극적으로 보내시고자 하셨던 곳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어쩌면 점점 더 이리 같은 세상이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훨씬 더 거친 세상이 펼쳐질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보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속에 내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고 권능을 받고 보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 나의 나됨을 다시 한 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가야할 길이 환하게 보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야할 이 길에서 너무 쉽게 벗어나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보냄 받은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양으로 보내심을 받은 우리가 이리가 되어 있어서 문제입니다. 양으로 보내심을 받은 우리는 마지막까지 양이어야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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