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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렘 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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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렘 33:1~3)

 
지난 16일에 이 나라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던 김수환 추기경이 소천하셨습니다. 그 분이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사세요’라는 말은 개인의 성공과 소유를 위해 각박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 분이 남긴 말 가운데 가슴에 찡하게 다가오는 말이 있습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는데 70년이 걸렸습니다’라는 말입니다. 머리로 이해하고 아는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고 그것을 실천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그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 힘을 다하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어느 상가 건물 2층에 술집이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건물 3층에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목사님과 교인들이 교회에 가려면 꼭 2층의 술집을 지나야 했습니다. 목사님과 교인들은 2층에 술집이 들어선 것을 못마땅히 여겨 교회에서 기도할 때마다 술집이 없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술집 주인은 교회가 술집이 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는 소문을 듣고 매우 불쾌해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전으로 술집에 불이 나서 내부가 전부 타버렸습니다. 술집 주인은 화가 났습니다. 그는 법정에 교회를 고소를 했습니다. 
그 고소 내용은 교회가 술집이 없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서 술집에 불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 고소 사건으로 목사님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법정의 심리가 시작되자 재판관은 목사님에게 정말 술집이 문을 닫도록 기도한 일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물론 기도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재판장님,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기도했다고 술집에 불이 났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재판장이 말하기를 ‘교회 목사님은 기도의 응답을 믿지 않고, 술집 주인은 기도의 응답을 믿으니 참으로 난감합니다’ 라고 말했답니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나쁜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고 받아 들이는 습관입니다. 사람들은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함으로 합리화 시키고 미화시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비난하다가도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할 때에는 아주 타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연애를 하면 로맨스고 다른 사람이 연애를 하면 스캔들입니다. 운전을 하다가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새치기고 내가 하면 너무바빠서 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유리하게 해석하고 적용시키는 습관이 신앙 생활에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말씀의 참된 뜻을 알고 따르려고 하기 보다는 자기에게 유리한 말씀만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나에게 부담이 되는 말씀을 그냥 건너 뜁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위로가 되면 아멘으로 받아들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포도나무에 비유하셔서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를 보면 포도나무를 가꾸는 농부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포도나무는 예수님이십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말합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려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제대로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시는 말씀 가운데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함이라’ 는 말씀에 우리는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대단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기에 너무 너무 귀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가 원하는 부분만 보지 말고 말씀 전체를 보면 다른 부분이 보입니다. 우리가 ‘아멘’으로 화답한 그 말씀은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읽어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여기에서 전제되는 조건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드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자리, 어떤 자세,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느냐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하는 우리의 자세와 태도가 제대로 서 있지 못하면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이루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를 찾아 그곳에 진실하게 세워질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을 삶속에서 경험하며 살고 있는 분을 한 분을 소개합니다. 제가 아직 이 분의 간증 CD를 보지 못했지만 많은 분들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를 분 소개합니다. 현재 세계무역센터 수석 부총재로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주역 중의 한 사람인 이희돈 박사입니다. 이희돈 박사는 영국으로 유학을 갈 때 어머니가 편도 비행기 표를 끊어 주고 공항에서 봉투 하나를 건네 주었다고 합니다. 내심으로 어머니께서 어려운 살림에도 그동안 모아 놓으셨던 쌈지돈을 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비행기 안에서 기대를 가지고 봉투를 열어 보니 돈은 한푼도 없고 달랑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답니다. 그 편지에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라라’는 말씀이 적혀 있었답니다. 그렇게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이 시작됩니다.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과정과 장학금 받게 되는 과정,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가 되고 나중에 종신 교수가 되는 과정, 그리고 세계무역센터에 들어가 수석 부총재가 되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놀랍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 세계를 다니며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희돈 박사의 삶의 중심을 말해 주는 하나의 일화가 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종신 교수가 되었을 때 그는 너무 좋아서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종신 교수가 되었으니 아내가 너무 너무 좋아하고 자랑스러워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듣고도 아내가 별 반응이 없더랍니다. 아내에게 내가 그 유명한 옥스퍼드 대학 종신 교수가 되었는데 기쁘고 자랑스럽지 않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하는 말이 ‘옥스퍼드 대학 종신 교수라는 직책이 하나님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거예요?’ 라고 되묻더랍니다. 이희돈 박사 부부는 자신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선교에 삶의 목적을 두고 살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맡은 모든 직책과 일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선교 사역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삽니다. 그는 기업인이 아니면서도 일년에 2백만 달러를 선교 헌금으로 드리며 선교를 위한 삶을 사는데 소명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선교 사역을 하면서 기도하는 제목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놀랍게 응답하고 계심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제대로 붙어있는 가지를 통해 열매가 풍성하게 맺혀지는 것처럼 그의 삶에 풍성하게 맺혀지는 성령의 열매를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앞에서 말씀 드린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3절에 보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만 따로 떼어서 보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함이라’ 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 말씀을 주실 때 예레미야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우리들은 확인해야 합니다. 1절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의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가 있는 곳은 ‘시위대의 뜰에 갇혀 있을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죄로 얼룩진 삶을 사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과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에 코방귀도 뀌지 않습니다. 특히 거짓 선지자들은 아무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평안을 주신다고 거짓 예언을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예레미야를 때리고 억압하여 시위대 뜰에 가둬 두었습니다. 

시위대의 뜰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현장입니다. 그가 시위대 뜰에 갇힌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시위대 뜰에 갇힌 예레미야를 향해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시면서 4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할 것과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해 죄로 타락한 이스라엘을 바르게 세워 다시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회복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을 예레미야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가 서 있는 자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어느 자리에 서 있느냐는 우리들의 영적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술자리에서, 도박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속이고 사기 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쁜 일을 도모하면서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게으름을 피우면서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세상의 쾌락을 즐기기 위해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 어린 신앙이나, 잘못된 신앙은 그렇게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니 있어서도 안됩니다. 

죄의 자리에 있다가도 잘못을 깨닫고 그 죄의 자리를 떠나 회개하는 그 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귀한 섬김을 위해 기도하는 그곳에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고 맡은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자리가 아니라 맡겨 주신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의 선한 사역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헌신하는 그곳에 하나님은 축복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들이 살다 보면 사면초가에 놓일 때가 많습니다.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것과 같이 두려움과 염려, 불확실한 내일로 인해 사면초가의 자리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향해 먼저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바르게 세우라고 말씀하신 후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머무는 자리를 강조하시면서 다음으로는 기도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통로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는 일에는 열심을 품지 않습니다. 자꾸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와 핑계를 댑니다. 기도하지 못하는 아니 더 적극적으로 말해 기도하지 않는 이유와 핑계를 대려면 끝없이 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해야 할 이유를 찾으려면 또한 끝없이 찾을 수가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시기 위해 주신 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에 들어서는 길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은 기도하는 자리에 익숙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면의 깊은 기도로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새벽 제단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이 새벽 기도를 시작으로 하루를 여는 직분자들이 되시기바랍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쳤습니다. 기도는 예수님의 생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새벽에, 밤에 들과 산으로 나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드렸습니다. 제자들의 사역 가운데 기도 없이 이뤄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조차도 기도하시는 하물며 우리들이 기도 없이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과 육과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통로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은 기도하는 자리를 사모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모든 분들은 어떤 일을 하든지 기도로 준비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맡기신 거룩한 사역을 감당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가 없는 곳에는 사람의 생각이 지배합니다. 기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지배하십니다. 저와 성도 여러분의 삶이 성령께서 지배하시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응답이 있고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는 거룩한 처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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