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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은 오직 하나 (갈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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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오직 하나 (갈 1:6~10)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분에게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다른 복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몇몇 사람이 여러분을 교란시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고 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나, 또는 하늘에서 온 천사일지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에도 말하였지만, 이제 다시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 우리의 자화상
며칠 전 세상을 떠나신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자화상을 보셨는지요? 유성 파스텔로 단정하지만 간략하게 그린 동그란 얼굴, 참 고요해 보였습니다. 그림 밑에 그는 ‘바보야’라고 써놓았습니다. 여기서 ‘야’가 종결형 서술격 조사인지, 독립격 조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왜 바보라고 썼느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인간으로서, 제가 잘났으면 뭐 그리 잘났고 크면 얼마나 크며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안다고 나대고, 어디 가서 대접받길 바라는 게 바보지. 그러고 보면 내가 제일 바보같이 산 것 같아요.”

꽤 오래 전 가수 김도향 씨가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이들은 이런 느낌을 가질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자화상’ 하면 제게는 두 인물이 떠오릅니다. 먼저는 뚫어질 듯 자기를 응시하고 있는 고흐의 다양한 자화상이 떠오릅니다. 다음으로는 조선 시대의 선비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이 떠오릅니다. 그의 자화상에는 목과 귀가 없는 대신 그 자리를 불길처럼 솟구치는 세밀한 수염이 채우고 있습니다. 마치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기(氣)를 발산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고요하지만 흔들림 없는 눈빛, 굳게 다문 입술 등은 그가 강직한 선비임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옛 사람들은 초상화를 가리켜 전신사조(傳神寫照)라 했는데, 그것은 초상화가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인물의 정신을 전하기 위해 인물을 그린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라는 말이지요. 

지금 만일 우리의 ‘자화상’을 그린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요? 그림으로 그릴 수는 없으니까 말로나 그려볼까요? 우리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것은 불안일 겁니다. 북한은 대포동 2호 미사일 발사를 앞두고 있고,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은 나날이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경제침체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고, 동유럽 국가들의 국가부도(default, 채무불이행)가 예견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에 따른 생태계 위기 소식도 시시각각으로 들려옵니다. 
개인적으로는 건강에 대한 강박증적 불안이 있고, 실패 혹은 실직에 대한 두려움, 누군가에게 거절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 등이 시시때때로 우리를 괴롭힙니다.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공동체는 사라지고, 우정도 물질주의에 종속된 것처럼 보입니다. 유명한 자동차 회사의 광고는 우리 시대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친구의 말에, 그랜저로 대답했습니다.” 화면은 자기 차에 시동을 거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우정보다는 사회적 체신이 더 중요한 시대임을 이 광고는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KY'라는 단어가 유행이라는데, 그 말은 쿠키가 요메나이空氣が讀めなぃ라는 말의 앞뒤 글자를 영어 알파벳으로 표현한 것으로 ‘공기를 읽는다’, ‘분위기를 읽는다’는 뜻이라 합니다. 이 말은 소신보다는 조직의 논리에 맞춰 자기를 길들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왜소해진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게 인생인가 싶어 슬퍼집니다.

• ‘지기라’ 정신
그런데 성경은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땅에 매여 하늘을 잊고 삽니다. 예수님은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땅의 인력에 붙들려 하늘을 잊어버린 채 사는 사람들에게 자유의 새 삶을 열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좋은 소식’ 곧 복음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치셨습니다.”(1:5)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를 이 악한 세대로부터 건져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악한 세대란 무엇일까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자꾸 멀어지게 하고, 죄에 마음이 팔리도록 부추기는 시대정신을 일컫는 말일 겁니다.하지만 예수님과 만난 사람들은 자유를 경험했습니다. 지난 날 그들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던 헛된 욕심, 두려움, 분노, 우울함, 부끄러움 등이 예수와 만나는 순간 봄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나누고, 섬기고, 생을 함께 경축하는 이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은 부활하신 주님을 가슴에 모신 이들의 삶이 어떠한지에 대한 가시적 증언입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음식을 함께 나누고, 함께 지내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습니다. 예수 정신이 들어가는 순간 사람들을 가르던 담이 무너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한 세대의 특성을 역설적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너와 나,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담을 높이 쌓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이기도 합니다. 죄는 가르고, 사랑은 하나로 만드니 말입니다. 

감리교회의 위대한 전도자였던 스탠리 존스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비전에 기독교의 핵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주님 곁에는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이 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누군가를 위해 취약해지고, 고통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는 사랑이야말로 우주의 중심임을 가르칩니다. 십자가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죽어 너를 살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엊그제 풀무원을 창설하셨던 원경선 선생님의 부인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조문을 마치고 복음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끝에 선생님은 이런 일화를 들려주셨습니다. 
한국인 아내를 둔 외국분이 계셨는데, 어느 날 선생님께 ‘지기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묻더랍니다. 부부싸움 끝에 아내가 내뱉은 말인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기라’(죽여라)가 뭔지 아시지요? 웃으며 그 이야기를 들려주신 선생님은 말씀 끝에 십자가를 붙들고 사는 게 그런 거라 하셨습니다. 세상은 ‘지기라’ 하고 대드는 사람을 당해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기라’의 태도로 이 악한 시대정신에 대항하지 않는 한 기독교는 살아날 수 없을 겁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십자가가 사라진 데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숭배의 대상으로 박제화되고,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왜곡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복음의 왜곡
갈라디아서를 읽는 이들은 바울 사도가 매우 격앙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서신마다 등장하는 부드러운 인사말 대신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뭔가 심상찮은 느낌이 듭니다. 도입하는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다짜고짜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합니다. 그들에 대한 자신의 실망감을 직정적으로 드러냅니다.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분에게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6)

문제는 ‘다른 복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이 여럿 있는 것이 아니니까 다른 복음이란 가짜 복음, 혹은 사이비 복음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할례 받은 신자들입니다. 그들은 구원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확장하면 율법의 규례를 다 지켜야 한다는 말이었겠지요. 이것은 마치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나 기쁨의 춤을 추고 있는 이들을 불러들여 다시금 족쇄를 채우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할례 주창자들은 예수 정신에 사로잡혀 삶이 변화된 사람들, 나누고, 섬기고, 북돋고,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사는 이들을 율법의 종살이로 되돌리려 하는 겁니다. 화가 난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할례를 가지고 여러분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자기의 그 지체를 잘라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갈5:12)라고까지 말합니다. 

경우는 다르지만 지금 한국교회에서 선포되는 복음도 혹시 ‘다른 복음’이 아닌가요? 지금 개신교의 쇠퇴는 교회가 선포하는 그 길을 따라 걷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굳게 붙잡아야 할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닌지요. 지금 한국 교회 신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비서입니다. 우리가 부르기만 하면 달려오는 분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지움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의 욕망에 봉사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복 받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모든 상품을 갖춰놓은 백화점처럼 인식됩니다. 기도 중에 그들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은 ‘주십시오’입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남용’이라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욕망과 관련시키는 순간 우리는 이 악한 세대와 맞설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을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시고, 정해진 길로 가지 않으면 훗날의 심판을 위해 일일이 책에 기록해두는 그런 분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은 우리를 끝없는 죄책감으로 몰아가거나, 뭔가 잘못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의 아름다움을 한껏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하나님관을 심어주는 이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마비시켜 그들을 지배하려 합니다. 복음의 왜곡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복음’에 넘어가는 까닭은 다른 복음을 전파하는 이들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고, 종교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이라는 게 참 문제입니다. 성서는 일상적 삶을 떠난 거룩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의 종교 체험은 비일상적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체험 이후의 삶은 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야말로 우리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증거합니다. ‘다른 복음’을 따르는 이들은 신실한 듯하지만, 이기적이거나 편협하거나 배타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다르다’는 그릇된 확신 때문입니다. 

• 누구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나?
바울 사도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저주를 받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에는 거침이 없습니다. 참된 복음을 지켜내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충격요법입니다. 오캄의 면돗날(Occam's Razor)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사안이 얽혀 있을 때에는 가장 간단하고 명료한 설명이 최선이라는 뜻입니다. ‘저주를 받을 거’라는 말은 너무 가혹한 말로 들릴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말을 하는 순간 요즘 말로 바울의 ‘안티’가 많이 늘어날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자기 소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10)

이 말씀처럼 강력한 말씀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인기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진리는 뒷걸음질치며 우리에게서 멀어집니다. 예언자들은 하나 같이 인기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듣고 싶어하지 않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참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을 잇댄 채 살아갑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참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는 누구도 위협하지 않고, 또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환희, 슬픔, 공포에서 자유롭고, 순수합니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이지만 그것에 영향 받지 않습니다. 그는 좋든 나쁘든 결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친구나 원수를 한마음으로 대하고, 존경이나 경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칭찬에 우쭐대지 않고, 사람들의 비난에 주눅 들지 않습니다. 그는 침묵과 고독을 사랑하고, 뛰어난 판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 사람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외부의 반응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가 그러했고, 바울이 그러했으며, 수많은 성인들이 그러했고, 간디가 그러했습니다. 존 디어 신부는 간디의 삶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간디는 하나님이 자신의 가슴을 무장 해제하도록 허락했으며, 그러는 동안 자신은 세계를 무장 해제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다.”(존 디어 엮음, <<내 삶이 내 메시지다>>, 39쪽)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만이 당당하게 세파를 뚫고 순례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삶이 힘겨울 때마다 이 질문 앞에 서십시오. “지금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여러분은 지금 다른 복음이 부는 나팔 소리에 이끌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둠이 짙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이들이야말로 역사의 봄을 선구(先驅)하는 하늘의 사람들입니다. 이 우수 절기에 사람들의 졸아붙고 얼어붙은 마음에 생명의 물줄기를 끌어들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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