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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마음을 품으라 (빌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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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음을 품으라 (빌 2:1~4)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부모들은 자녀들이 서로 우애하며 화목하게 사는 것을 보는 것이 큰 기쁨일 것입니다. 형제가 갈라져 서로 싸운다면 그것처럼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이 부모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는 자기가 개척한 교회를 향해서 갖는 바울의 한결같은 마음이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갈2:7)라 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를 향하여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4:15)

부모는 자녀들이 독립하여 스스로 일을 잘해나갈 때 기쁨이 넘칩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복음 안에서 자라가고, 또 바울과 다른 교회를 섬길 정도로 성장한 모습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부모는 또한 형제들이 나뉘어져 있으면 가슴이 아픕니다. 감옥에 있는 바울의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이 바로 빌립보 교회가 갈등하고 분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1-4절까지 오늘 읽은 말씀에서 주 동사가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4절의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단어입니다. 너희가 서로 하나가 되어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명령입니다. 바울은 부모와 같은 권위로 한 마음이 될 것을 명령합니다. 너희가 하나가 되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한 기쁨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는 갈등 상황에 있습니다. 갈등하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 분위기는 빌립보서 4장 2절에서 언뜻 엿볼 수 있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 교회의 여성 지도자들입니다. 이들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 서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하나됨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1장 27절에서도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할 것을 바울은 권면합니다. 오늘 2장 2절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을 같이 하라’ ‘같은 사랑을 가지라’ ‘뜻을 합하라’ ‘한 마음을 품으라’고 여러 말로 권면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의미는 같습니다. 첫째도 한 마음이요, 둘째도, 한마음이요, 셋째도, 넷째도 한 마음이 되라는 것입니다. 2장 5절 이하에서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을 것을 권면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한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모범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어느 곳을 가든지 공동체를 형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직장도 공동체요, 가정도 공동체요, 국가도 공동체입니다. 동창회를 비롯하여 인간이 모인 곳은 어느 곳이든 공동체이고,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분열과 갈등이 없이 서로 한 마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공동체에 잘 적응하고 어울리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는 공동체마다 갈등을 일으킵니다. 또 천성적으로 홀로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향이 어떠하든지 인간은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6일째 만든 것은 단순히 사람이 아닙니다. 6일째 만든 것은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인간이라는 공동체입니다. 이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또한 홀로 가는 나라가 아니라 함께 가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하면 공동체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이 될 수 있는지 말씀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 

먼저 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는 1절 말씀이 잘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이 구절은 가정법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뜻은 만약 ......있다면의 의미가 아닙니다. 없는데 있는 것을 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을 받고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의 위로를 받고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성령의 교제가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긍휼과 자비를 받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한 마음이 되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이미 빌립보 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시키는 말씀입니다.

한 마음이 되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요한복음 15장 12,13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권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미 이 사랑의 위로를 받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진노의 자녀들이었던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희생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다른 초대교회들과 같이 가난한 자를 서로 돕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다른 교회와 사도 바울마저 도울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사랑 받을 때 위로가 됩니다. 너희는 그런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냐고 사도 바울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 가운데는 성령의 교제가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 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서로 얼마나 다릅니까? 기질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삶의 스타일이나 목표도 다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가 되어 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분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인간의 정이 아닙니다. 하나 됨의 희망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 마음이나 내 의지로는 불가능하지만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로 만드십니다. 초대교회에서 서로 상극인 유대인과 이방인, 주인과 노예가 어떻게 하나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또한 긍휼과 자비가 있습니다. 이 긍휼과 자비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달리 측은지심이라고도 합니다. 연약하고 위기 가운데 있는 사람을 보면 우리 안에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지만 누가 물에 빠졌으면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듭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바울은 지금 보편적인 인간애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긍휼과 자비를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이 긍휼의 마음이 화석화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사라진 그런 물질화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맹자』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제선왕이 당상에 앉아 있었는데 그 앞으로 어떤 사람이 소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소는 제사에 바칠 소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가 두려워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제선왕의 눈에 역력히 보였습니다. 그러자 제선왕이 신하를 명하여 그 소를 살려 두라고 합니다. 대신 양을 바치라고 합니다.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은 왕이 비싼 소는 살리고 싼 양을 받쳤다며 인색하다고 비방합니다. 그렇지만 맹자는 이 왕에 대해서 오히려 칭찬하며 이것이 인의 실천이라고 하였습니다. 맹자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소는 직접 보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군자는 금수가 살아 있는 것을 보면 그 죽어 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며 그것이 애처롭게 우는 소리를 들으면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군자는 주방을 멀리 합니다.” 

이것이 바로 측은지심의 마음입니다. 맹자의 이 예화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만남이라는 사건입니다. 제선왕은 소를 만났기 때문에 소의 불쌍한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요즘은 만남이 없습니다. 설교도 영상으로 드립니다. 아이들은 컴퓨터에 빠져 있습니다. 보지 못하니 잔인해집니다. 사람이 먹는 음식에 유해한 것을 넣는 것도 생산자가 소비자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상 사람을 만나도 우리는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나의 경쟁자일 뿐입니다. 내가 이용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만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에서 긍휼의 마음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긍휼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숫자를 보지 말고 그 단순한 숫자 하나가 가리키고 있는 사람 하나 하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가끔 정부나 기업체에서 구조조정 하기 위해 몇 명을 자르고 퇴출시켰다는 말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며 경영 합리화를 위해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하며, 또 한편 그동안 철밥통이라 생각했던 것이 깨지는 것을 보며 고소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퇴출당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한 인생이 무너지는 것이고, 또 한 가족이 생존의 위기로 몰립니다. 그 사람의 얼굴 표정을 보았다면 우리는 함부로 그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사람이 정치적이 되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하기보다는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고 그 효과나 영향력을 이용하려는 마음이 정치인의 마음이고 우리도 또한 거기에 물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될 마음입니다. 긍휼의 마음을 잃어버린 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각박한 사회가 되고 맙니다. 긍휼의 마음을 완전히 상실한 한 살인마의 엽기적인 살인 행각이 국민들을 분노케 하더니, 이 사건을 용산 참사라는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던 정부의 태도가 또한 분노를 사게 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인간의 본성인 긍휼을 포기한 모습입니다. 위기의 때에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가장 훌륭한 정치는 긍휼의 정치입니다. 또 그것이 사회를 더 인간답게 만들고 살맛나게 만듭니다. 바울은 하나 됨을 위해 이런 인간애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 되어야 할 분명한 의무가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 하나 될 수 있는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사랑의 위로를 받았고 우리 안에는 긍휼과 자비라는 보편적인 인간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이미 하나 될 이유도 힘도 목표도 부여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것, 우리가 가진 것, 우리가 해야 될 것이 무엇인지 알 때 우리는 사랑할 힘과 하나 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힘써야 할 것 세 가지

서로 하나 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은 다음 세 가지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 다툼이라는 것은 이기적인 욕망을 가리킵니다. 허영이라는 것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태도입니다. 결국 자기 이익을 추구하거나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는 생각이 공동체 안에 갈등을 일으킵니다. 교회의 분열에는 항상 이런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진리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기 욕심과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이기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물론 이기심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적절한 이기심은 자신을 발전시키는 자극제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이기적인 욕구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고, 공동체에 해가 될 때는 이기심을 조절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교회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맛있는 것을 혼자 다 먹고 싶지만 그것이 모자랄 때는 삼가야 합니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욕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름을 잊는 것입니다. 실상 자기 이름을 잊으려 할 때 우리는 더 큰 이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2장 9절에서 증거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주님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낮추고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버리기까지 하셨을 때 모든 이름 위에 가장 뛰어난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둘째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만 잘났다고 하고 남을 무시하면 하나가 되기 어렵습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비결중 하나는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독특한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이 가지기 못한 장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도자적인 리더십이 있는 반면에 다른 사람은 유약해 보이지만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적으로 뛰어난 반면에 다른 사람은 덕에서 뛰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격을 잘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은 수비를 잘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에 뛰어나고 다른 사람은 행동에 뛰어 납니다. 모든 사람은 충분히 존경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이 최고라 생각하고 또 자신이 가지거나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 합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각자 종류대로 만드시고 각자 존귀하게 만드신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자기 생각과 판단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하나 됨은 시작됩니다. 인간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그 다름을 존경하십시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나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진정으로 큰 사람입니다. 물은 자기를 낮추어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지만 결국 가장 큰 바다를 이룹니다. 겸손한 것이 실상 자기를 높이는 최상의 수단입니다.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이 결국 자기 또한 인정받게 만듭니다.

셋째는 자기 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기 일에 너무 빠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 되는 것은 상대방의 사정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알고 나면 이해되고 이해되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은 다른 사람이 지금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살피는 눈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는 태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처럼 섬기려는 자세로 가득한 곳이어야 합니다. 세상은 자기만 알고 자기 일에만 바쁘지만 교회나 성도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마치 한 가족처럼 도와주려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안색을 살피며 무슨 어려운 일은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아픔과 어려움을 나누는 것,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마음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자기 민족도 아닌 강도만난 자를 도와주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인은 예수님이고 우리는 강도만난 자였습니다. 이런 보살핌의 은혜로 살아난 우리들은 이제 또 다른 사마리아인이 되어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상대방을 도우려는 마음만 있다면 그 공동체에는 분열도 갈등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한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서로 하나 되어 사랑할 때 세상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다툼과 허영보다는 상대방을 낫게 여기는 겸손과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봄으로 우리 교회가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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