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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사 길 (행 8:2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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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길 (행 8:26~35)

예수께서 제자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 주신 말씀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을 정상적으로 따르고 있는 모든 사람은 ‘사람 낚는 어부’ 곧 전도자가 되어 살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교회에 신실하게 출석하고 있는 교인들 중에도 전도를 삶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원인은 다양할 수 있지만 한 가지 우리는 ‘전도자’라는 단어를 왜 그런지 비정상적인 극단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전도자’하면 서울 역 앞 광장에서 혹은 전철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하고 소리치는 이미지를 연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무의식속에서 나 같은 정상적으로 인생을 사는 신사 숙녀가 그런 비정상적인 일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아닐까요? 

혹은 어떤 분은 ‘전도자’하면 빌리 그래함 같은 분이 수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교하는 이미지를 떠 올리며 나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나는 당연히 전도자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실상 기독교의 복음 전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런 특별하고도 예외적인 전도자들을 통해서가 아닌 우리의 자연스런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우리를 둘러싼 만남의 관계들을 통하여 전도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온 것을 기억하시나요? 그리고 이런 전도를 우리는 보통 ‘생활 전도’(Life Evangelism) 혹은 셀 교회 운동에서는 ‘오이코스 전도’ (oikos evangelism) ‘관계 전도’(relational evangelism)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생활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처음 교회의 역사인 사도행전의 역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처음 교회가 복음 전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 비전을 확장해 가는 그 자연스러운 생활 전도의 현장의 교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에는 에디오피아 내시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본문 27절에 의하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라고 기록합니다. 

지금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재무장관쯤 되는 사람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자기 나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에서 빌립 집사와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전도의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 역사가 이루어 진 곳이 바로 가사(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의 최대 분쟁 지역) 길이었습니다. 가사에서 조금만 더 남쪽으로 가면 바로 이집트가 되고 아프리카로 연결되는 길이지요. 바로 이 길에서 빌립 집사에 의한 위대한 생활 전도의 역사가 쓰여 집니다. *그러면 우리도 빌립처럼 열매 맺는 ‘생활 전도자’로 살기 위해 준비할 일은 무엇일까요? 


1. 주님의 영의 인도에 민감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로 전도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주님의 영이신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전도하고 싶어하는 갈망보다 더 큰 갈망으로 주님이 우리를 통해 전도의 열매를 맺고 싶어 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인도에 민감할 수만 있다면 전도의 장으로 우리 모두는 자연스럽게 인도될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전도하며 큰 부흥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께서 빌립을 가사로 가는 광야 길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빌립이 주의 인도에 민감하지 않았더라면 할 수 없었던 순종이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지금 이렇게 큰 부흥의 역사를 주도하고 있는데 이것을 내가 어떻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광야로 갈수 있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순종합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26절을 읽어 보십시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 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그래서 그는 광야로 갑니다. 

그리고 29절을 읽어 보십시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그래서 그가 에디오피아 내시가 타고 있던 수레(병거)로 접근합니다. 이것이 바로 빌립의 민감성이었습니다. 주의 인도임을 알아차린 민감성 말입니다. 이런 주의 영의 인도하심에 대한 민감성이 그로 전도의 장으로 인도되고 전도의 명에 순종하게 한 것입니다. 

사실 그 동안 저와 여러분도 우리 곁을 지나가는 어떤 사람에게 한번 예수님 이야기, 교회 이야기 해 볼까라는 생각이 얼마나 우리 뇌리를 스치고 지났을까요? 그런데 그것이 그냥 생각으로만 지나간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주의 음성이라고 성령의 음성이라고 생각해 보셨는지요? 그런데도 그 생각을 생각에만 그치고 지나가셨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는 일인 줄 아시나요? 

살전5:19의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만일 이 시대 그리스도인 모두가 좀더 주의 영의 인도에 민감하기로 결심만 한다면 아니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우리 시대에 복음 전도의 위대한 부흥의 시대가 또 한번 도래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더 이상 성령의 감화, 성령의 감동을 소멸치 마십시오. 전도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면 곧 장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주님, 제가 지금 이 사람에게 주님을 소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이 사람의 마음을 준비시켜 주십시오.” 그리고 행동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전도의 시작입니다. 부흥의 시작입니다. 


2. 담대하고 지혜로운 접촉을 준비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선교의 역사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에서 가난한 나라로, 소위 선진국에서 후진국을 향하여 진행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전도의 대상을 선택할 때에도 우리는 보통 나보다 나이가 더 
어리고 나보다 더 배우지 못하고, 나보다 더 가난하고 나보다 더 사회적 지위가 낮은 대상을 손 쉬운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선교나 전도의 역사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초대 교회의 처음 선교사들과 전도자들은 이스라엘에서 시작하여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로마로 나아가 전도하지 않았습니까? 본문에도 보면 평범한 교회 집사 빌립이 지금 한 나라의 재무 장관에게 전도를 시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마 그때 빌립은 광야 길을 걸어가고 있거나, 말 타고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수레(병거) 타고 가고 있는 한 나라의 권력자인 장관에게 접근하여 전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주변에는 여러 그를 돕는 하인들이 함께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티코타고 가던 전도자가 에쿠스나 벤츠타고 가던 분에게 전도한 것입니다. 담대함이 필요하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이런 빌립의 담대함은 성령 충만의 결과였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꺼리는 원인의 하나는 자꾸 인간적인 조건을 생각하고 요즘 말로 쫄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이런 위약한 마음이 사라지고 담대해 집니다. 행4:31을 보십시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에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그렇습니다. 초대 교회 사람들 그들은 기도했고 성령으로 충만했고 그 결과로 그들은 담대한 전도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담대함을 무례함으로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우리의 전도는 담대하면서도 지혜로운 접근이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무례함이 복음의 영광을 가리었는지를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본문의 빌립의 전도의 모범을 주목해 보십시오. 28절에 보면 그는 수레를 타고 가면서 이사야의 글 곧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이미 성령께서 준비해 주셨기에 그는 진리를 구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오늘의 본문이 그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27절)이라고 기록한 사실을 보아서 일종의 유대교 신앙을 받아드린 사람이라고 볼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는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때 빌립이 그에게 접근하며 대화를 어떻게 열었습니까? “읽고 계신 것이 잘 이해가 되시나요?” 라고 물었습니다. 책을 읽고 있는 사람과의 가장 자연스런 대화는 그 책의 주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자연스러운 대화입니까? 이렇게 해서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의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빌립은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찍 제자들을 둘씩 둘씩 짝지어 전도하러 내 보내면서 일어날 상황에 대하여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그는 ‘뱀 같이 지혜롭게’ 전도 할 것을 부탁하십니다. 담대함과 지혜를 동시에 주문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한데 지혜롭지 못하다면 우리의 무례함 때문에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닫을 것입니다. 반대로 지혜로운데 담대함이 없다면 우리는 전도를 생각만하고 입도 열지 못하는 비겁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담대함과 지혜로움으로 전도를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담대함과 지혜 또한 성령 충만의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을 구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담대함과 지혜로움으로 이웃들에게 나아가시겠습니까? 


3. 말씀으로 

복음을 증언할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 3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그렇습니다. 빌립은 이 에티오피아의 장관이 읽고 있던 이사야의 말씀을 통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친히 예언한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 것입니다. 만일 빌립이 소위 모든 종교사이의 평화와 관용만을 강조하면서 소위 공격적인 전도를 비판하는 종교 다원주의자였다면 그는 이미 여호와를 믿고 예루살렘까지 왕래하며 예배하는 이 사람에게 전도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복음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고자 우리 죄를 짊머지고 죽으시고 우리의 새로운 삶을 위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그 분 만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십니다. 그 분을 만날 때까지 사람들은 결코 죄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을 만날 때까지 사람들은 진정한 죄 사함의 기쁨도 구원의 기쁨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을 만날 때 까지 사람들은 결코 새 피조물이 될 수 없고 새 인생을 살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해야 합니다. 우리의 전도나 선교의 방법은 좀 더 지혜로 와 질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도나 선교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 이유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전도의 방법은 다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기본인 복음을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성도들이 일생의 한 번은 반드시 전도 폭발 훈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은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전도의 많은 열매를 맺는 생산적인 인생을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쯤에서 사마리아에서 큰 부흥을 일으키던 빌립을 가사로 가는 광야 길로 인도하신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한 사람 에디오피아 장관에게 전도를 하시기 위해 빌립을 그 길로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목하시고 인도하시는 자상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 나라의 좀 더 크고 넓은 비전의 지평선을 바라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에디오피아 내시는 신약 시대의 최초의 아프리카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그 복음을 갖고 그의 조국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행8:36에 보면 빌립은 그에게 침례를 베풀었고 8:39절을 보십시오. “둘이 물(속into/out of the water)에서 올라올 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당시의 에디오피아는 현재의 수단지역을 포함하는 매우 광대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이 전도의 에피소드는 여기서 막을 내리고 있지만 에티오피아로 돌아간 한 사람을 통해 아프리카 복음화 비전의 새 지평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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