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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막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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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막 4:35~41)


[그 날 저녁이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그래서 그들은 무리를 남겨 두고,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갔다. 그런데 거센 바람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여 들어오므로, 물이 배에 벌써 가득 찼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서로 말하였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1. 지평 확장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의 책 <<역사>>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등장합니다. 때는 페르시아 제국이 그리스를 침공했을 당시의 이야기입니다. 크세르크세스 왕은 군대를 일시에 진격시키기 위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다리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아비도스를 기점으로 해안까지의 거리는 약 1,300미터쯤이었습니다. 엄청난 대공사였고 난공사였습니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완공된 다리는 때마침 불어온 폭풍으로 인해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크세르크세스는 헬레스폰토스에 대해 크게 노하였고, 가신들에게 바다에 300대의 채찍질을 가하고 족쇄 한 쌍을 바다 속으로 던져 넣으라고 명했습니다. 심지어 왕은 헬레스폰토스에 노예의 낙인을 찍기 위해 사람을 파견하기까지 했습니다. 페르시아 왕은 바다까지 지배한다는 선언이었겠지요. 왕은 채찍형 집행인에게 바다를 향해 이렇게 외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짜고 쓴 물 놈아, 너의 주인님께서 네게 이런 벌을 가하게 하셨다. 너의 주인님께서는 너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으셨는데, 네놈 쪽에서 먼저 주인님께 활을 당겼기 때문이다. 크세르크세스 왕께서는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너를 건너가실 것이다. 그리고 물론 네놈에게 공물을 바치는 자는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게다. 네놈처럼 탁하고 짜고 쓴 물에게는 그건 당연한 일이야.”(헤로도토스, <<역사 下>>, 범우사, 182-3)

이 무지한 주인공 크세르크세스는 성경에서 에스더 왕후의 남편인 아하수에로 왕입니다. 아마 바다에 채찍질을 가한 사람은 이 사람 밖에 없을 겁니다. 깊이를 알 수 없고, 언제든 일어나 배와 사람을 삼킬 수 있는 바다는 고대인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을 겁니다. 오죽하면 혼돈의 괴물이 그 속에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도 그 바다에서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3장의 마지막 절에 유의해야 합니다. 주님은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찾아왔다는 제자들의 전갈을 받았을 때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냐’ 반문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3:35) 
이 말은 주님께서 열어 가실 새 세상의 중심 가치는 ‘혈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에 있어서 유대인의 특권은 없다는 말입니다. 4장에 들어오면서 주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 겨자씨 비유 등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오는 것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선포의 자리는 ‘회당’도 아니고, ‘가정’도 아닙니다. ‘바닷가’입니다. 그곳은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열린 자리였습니다. 그곳에서 배제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여온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주님은 배 한 척에 올라 뭍을 향해 앉으신 채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핵심은 물론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저녁이 되자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십니다. 바다 저쪽은 이방 지역인 거라사입니다. 주님이 그곳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신 까닭은 그들에게도 말씀이 선포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무리를 남겨 두고,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습니다. 

2.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

어느 순간 거센 바람이 일어나더니 파도가 배 안으로 들이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에 물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바다의 생리를 잘 아는 어부 제자들도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는 규모의 놀이 일었던 것 같습니다. 뱃전을 친 파도가 마치 삼킬 듯 배 위를 덮칠 때 누군들 공포를 느끼지 않겠습니까? 온몸으로 바람에 저항하면서 키를 놓치지 않으려고, 또 돛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근육은 터질듯 팽팽하게 부풀고,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습니다. 게다가 그때가 저녁이라지 않습니까? 어둠은 공포심을 부풀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마가는 이런 야단법석과는 전혀 다른 광경을 보여줍니다. 그 모습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수님은 배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베개까지 베고 말입니다. 좀 상상이 안 되는 광경입니다. 사실 이 대목은 흉용하게 일렁이는 바다와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주님의 고요함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보입니다. 어느 순간 제자들은 잠드신 예수님을 깨웁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에 깃든 노여움과 서운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kyrios)이라 부르지 않고 ‘선생님’(didaskale)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여전히 백성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일 뿐, 자기 삶의 주인은 아니었습니다.

이후에 일어난 일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사건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이적으로 읽으려 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본문이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의 교회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나라가 망해 자기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이야말로 ‘거센 바람’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배의 상황과 같았다는 말입니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은 없었습니다. 신앙조차 그들의 마음을 붙들어주지 못했습니다. 마가는 그 상황을 지난 날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어쩔 줄 몰라 했던 제자들의 모습에 비추어 보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거센 바람’이라 번역된 대목은 ‘광풍’을 가리키는 라일랍스(lailaps)라는 단어와 ‘바람’을 뜻하는 아네모스(anemos)를 뭉뚱그려 놓은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라일랍스라는 단어는 귀신의 능력을 드러낼 때 사용하는 단어이고, 아네모스는 ‘풍조’라는 뜻으로도 쓰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거센 바람은 인간의 힘으로 이겨내기 어려운 마성적인 힘 혹은 세상 풍조를 일컫는 말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거센 바람’과 물결에 시달리는 배로 표상된 제자들의 상황은 나라와 함께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을 나타내는 동시에 비유대계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대한 일부 기독교인들의 반발을 나타내는 것일 겁니다.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신앙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3. 누가 꾸짖을 수 있나?

사방이 가로막힌 듯 보일 때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초월이라지요? 제자들은 자기들의 경험과 지혜와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기의 극한에서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이후에 일어난 일을 마가는 ‘일어나다’, ‘꾸짖다’, ‘말하다’라는 세 개의 동사에 담아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를 향해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사용된 ‘일어나다’라는 단어는 부활을 연상시키는 단어입니다. 마가는 이 단어를 통해 주님께서 죽음의 너울을 벗고 부활하신 것처럼 그들 가운데 현존하셨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또 거센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꾸짖는다는 뜻의 동사 에피타마오(epitimao)는 대개 귀신 축출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앞에서 광풍을 가리키는 단어 ‘라일립스’가 귀신의 능력을 드러낼 때 사용하는 단어라 했던 것 기억하시는지요? 주님은 마치 귀신을 쫓아내는 것처럼 거센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주님이 꾸짖으신 거센 바람은 아마도 제자들의 마음을 옴짝달싹 못하게 사로잡고 있던 공포와 두려움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런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 차 있습니다. 거센 바람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제자들의 이야기는 사실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실업에 대한 공포, 자녀 교육에 대한 공포,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가진 것 없는 이들이 경험하는 공포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공포와 두려움을 주는 현실을 꾸짖고 계십니다. 누가 꾸짖을 수 있습니까? 꾸짖음은 자기 욕심을 여읜 사람, 그래서 맑아진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함이 아니고는 사악함과 더러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세태를 꾸짖을 수 있는 맑은 정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교회조차 영적 권위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가난해지고, 고통받는 이들의 삶의 자리에 화육해 들어가지 않는 교회가 이 시대를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를 버려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과 교회만이 이 시대의 공포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바다를 향해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하고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다는 거짓말처럼 잠잠해졌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권능이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그 말씀, 그 에너지로 가득 찬 말씀(다바르)이 우리 속에 들려올 때 우리는 참된 자유를 맛볼 수 있습니다. 말씀은 빛입니다. 그 빛은 우리 속에 잠들어 있던 하나님 성품의 씨앗을 보게 해줍니다. 그 빛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보다 우리가 훨씬 큰 존재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말씀은 우리를 두렵게 하고, 속박하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말씀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울화로 속이 타지도 않고, 현실에 대한 불평불만으로 불뚝거리지도 않고, 절망과 낙심의 물결에 휩쓸리지도 않습니다.

4.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바람이 잦아들고 바다가 평온해지자 주님은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우리도 이 질문 앞에 서있습니다. 경제 위기를 진단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앞길은 탄탄대로가 아닙니다. 군 시절 병사들이 관물대에 써놓았던 문구들이 기억납니다. “세월이여 구보하라. 청춘은 동작 그만!” 그 마음 알 것 같지 않습니까? “군인의 길은 비포장도로다.” 
그들의 고단한 일상이 그대로 묻어나는 표현들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길이 바로 비포장도로입니다. 청년들을 가리켜 88만원 세대라고 지칭한 것이 엊그제 같은 데, 지금은 그보다 형편이 훨씬 나빠졌다고들 말합니다. 직장인들은 언제 실직자가 될지 몰라 전전긍긍입니다. 벌써 한 해 사이에 40만 명이 넘는 자영업자들이 가게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주식투자를 했던 명문 대학생이 줄어든 투자금을 회수할 길이 없자 자살했다는 소문도 들려옵니다. 그런데도 자녀들의 사교육비 지출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세상물정 모르는 이야기라고 하실지 몰라도 나는 지금이야말로 정신없이 질주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고르면서 우리가 지향하는 삶이 과연 바른 것이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선택한 삶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인지, 이웃들에게 덕을 끼치는 삶인지, 우리 자신에게 복이 되는 삶인지를 말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욕망을 절제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부담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살 것을 결심하십시오. 
욕망의 그릇을 다 채우려하지 말고 좀 비워놓고 사십시오. 자발적으로 불편한 삶을 선택해 보십시오. 자동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하면 보도 사이에 수줍게 고개를 내민 풀꽃이 보이고 이웃들의 얼굴이 보입니다. 소유를 통한 차별화의 욕구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이웃들을 정성스럽게 대하게 되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리는 것들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제게는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는 주님의 꾸지람이 천둥소리처럼 들립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느냐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믿음으로 세상 풍조를 꾸짖지 못하는 우리의 무기력함에 대한 질책입니다. 우리가 진정 믿음의 사람이라면 우리를 휩쓸어 삼키려는 저 흉용한 세상 풍조를 꾸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많이 소유해야 행복한 거라고 속이는 세상을 향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의 광풍 앞에서 많은 이들이 속수무책입니다. 이미 바닷물이 한국교회라는 배를 가득 채운 것은 아닌지요? 지금 주님이 우리 가운데서 주무시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믿음으로 바람과 바다를 꾸짖을 수 있도록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사람들의 가련한 생존조차 유린하려 드는 바람과 물결을 향해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명할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소명입니다. 주님이 공급해주시는 능력으로 세상의 물결 위를 가뿐하게 헤쳐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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