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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나단과 같이 (삼상 1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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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바람의 나라라는 드라마가 종영이 됐습니다. 역사왜곡 문제와 관련해서 고구려라는 나라가 이슈가 됐었고, 한 때 주몽이라는 드라마에서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활약상이 인기리에 그려져서 방영되었었는데, 바람의 나라는 주몽의 손자가 되는 무휼이라고 하는 대무신왕이 주인공으로 드라마가 전개됐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주몽과 무휼 두 사람 모두 탤런트 송일국씨가 배역을 맡아서 주몽의 속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보면, 무휼을 비롯해서 몇몇 장수들은 내공이 어찌나 대단한지, 모든 화살들이 알아서 다 비켜가고, 화살을 맞거나 심지어는 독약을 먹어도 죽지 않습니다. 어찌나 칼을 잘 쓰는지 혼자서 수없는 적들을 다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멋지기도 하지만, 과연 저런 일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래도 홍콩영화보다는 현실감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과거, 영화배우 주윤발로 대표되는 홍콩영화들을 보면, 권총인데도 불구하고, 총알이 얼마나 많이 들어있는지, 탄창교환 없이 7-80발 정도는 거뜬히 쏴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엑스트라들은 총에 맞지도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총소리만 듣고도 잘 쓰러지는데, 주인공은 어찌 그리 총알을 퍼부어도 한 발도 안 맞고 잘 비켜나가는지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을 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의 장면은 재밌게 봤더라도 나중에 하게 되는 말은 “역시 영화는 영화다. 저런 건 티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라고 한 마디씩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티비나 영화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도 나옵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도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데, 오늘 본문 말씀도 바로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아들이었고, 다윗의 둘도 없는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과는 다른 믿음의 모습이 있었고, 골리앗을 무찔렀던 다윗과 비견될 수 있을만한 용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 나오는 요나단을 살펴보면서, 그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무엇인지를 함께 배워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믹마스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믹마스 전투에 대한 자세한 설명까지는 불필요할 것 같고 본문 앞에 있는 13장 5절 말씀만 봐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13장 5절 말씀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믹마스에 모였는데 병거가 3만대에다, 마병이 6천 명이고,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상하기가 힘들 정도의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병거를 이끄는 장수들만 3만 명이라고 했습니다. 바람의 나라를 보니까, 대소왕이 만들었다는 병거 겨우 몇 대만 나왔는데도 고구려군들이 어찌할 줄을 모르고 나가 떨어졌는데, 그 병거만 3만 대였다면 그 당시 블레셋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대단한 나라였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쟁의 모습을 그린 수많은 영화들이 있지만,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서 만들어 내도, 병거가 3만 대나 나오는 영화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영화에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에서도 보여줄 수 없는 엄청난 전쟁이 이 때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형국에 비해서 이스라엘의 형편은 너무 딱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겨우 2천 명 정도의 백성들이 모였었는데, 다들 도망가고 숨어 버리고 고작 6백 명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병거는 커녕 사울과 요나단에게만 칼과 창이 있었고, 백성들은 농기구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영화 얘기를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은데, 300이라는 영화를 보면, 스파르타의 용사 300명이 페르시아 100만 대군과 싸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래도, 그들은 고도로 훈련된 최정예 용사들이었기 때문에 잘 싸울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600명은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형편이었습니다. 

  이런 절박한 중에 있었기 때문에, 사울왕도 조급한 마음에서 큰 실수를 범해서 사무엘로부터 책망을 받은 중에 있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승산이 없는 전쟁 속에서 그냥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사람, 요나단은 달랐습니다. 절망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도피하지 않았고, 믿음으로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할례도 없는 이방 나라에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홀로 믿음의 작전을 세웁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요나단이 그 난국을 타개할 작전으로 내놓았다는 것이 고작 비밀리에 단 둘이서 블레셋 군대로 쳐들어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단이 아무리 칼을 잘 쓴다고 해도 무기든 소년과 함께 적진에 들어간다는 것은 자살행위였습니다. 죽기는 하겠지만, 블레셋 사람 대 여섯 명이라도 죽이고 죽자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병기든 소년이 요나단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같이 블레셋 군대로 들어갔습니다. 목숨을 걸고 싸워서 20명 가량을 죽였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겨우 20명 죽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 일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블레셋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진동하게 하시고 큰 떨림이 있게 하셔서 자기들끼리 칼로 치면서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승리의 도화선이 되어서 사울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을 무찌른 일이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단은 이렇게 우리가 본 받을만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가 요나단을 통해서 배워야 할 첫 번째는 요나단에게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요나단은 되지도 않는 작전계획을 내놓았습니다. 요나단과 무기 든 부관, 두 사람이 적진에 들어가는 것은 아무 승산도 없고, 계란으로 바위치기 정도가 아니라, 메추리알로 바위산을 치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머리가 나쁜 작전장교라서 그런 작전을 세웠던 것이 아니라, 그는 남다른 믿음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증거는 6절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무기든 소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요나단은 블레셋 군대를 볼 때에 그 위용을 본 것이 아니라, 그들은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것을 보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숫자가 많고 적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면 하나님의 구원이 그들에게 임할 것을 믿었습니다. 요나단이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었습니다. 요나단이 눈이 멀어서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단도 블레셋의 엄청난 병력과 이스라엘의 형편없는 전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그들이 처한 현실과 함께 그가 확실히 보고, 확실히 알고 믿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시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승리를 안겨주실 것을 그는 확신했습니다. 이런 믿음이 바로 우리가 본받고 소유해야 할 믿음입니다. 

  지난 구역장 수련회 때 버스 안에서 이희돈 박사님의 간증 테잎을 듣고 많은 은혜를 받았었습니다. 그 중에서 생각나는 몇 가지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싶은데 아무 것도 없었지만, 학교 주위를 땅밟기 하면서 돌아다니니까, 학장님이 부르더니 어떻게 어떻게 해서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니도록 허락을 받았는데, 이희돈 박사님 얘기는 거기서 그냥 그렇게 끝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거기서 “잠깐!”이라고 외치면서 ‘학비는 그렇다지만 내가 먹고 사는 건 어디서 어떻게 하느냐?’ 이런 엉뚱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미국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고 미국 비자를 받는데, 비자를 받기가 너무나도 어렵고 모든 사람들이 다 불가능하다고 하는데도 아무 서류도 없이 단지 내가 미국에 가야만 하는 10가지 이유만 적은 쪽지를 들고 그냥 찾아 갔는데 지금까지 유례 없이 몇 시간 만에 비자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를 열 번은 하고 나와야 될텐데, 거기서도 이희돈 박사님은 “잠깐!”이라고 외치면서, ‘그런데 비자는 있는데, 미국에 갈 항공비가 없는데 어떡하냐?’ 이렇게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 얘기가 얼마나 웃긴지 집에 가서 웃을려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버스 안에서 제가 그 때 묵언수행중이었기 때문에, 옆에 앉은 조목사님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웃어서 아무에게도 제가 웃는 모습이 발각되지는 않았는데... 참 재밌게 간증을 들었습니다. 결국,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음으로 나갔을 때, 믿음대로 학비에 숙소까지 마련되고, 비자에 항공편까지도 마련되고 미국에 가서도 헌금 드리고 나서 공중전화 한 번 쓸 수 있는 동전 하나밖에 없었지만, 통화한 사람을 통해서 거처가 마련되는... 그런 놀라운 사건들이 담긴 그 간증을 들으면서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엉뚱해 보이는 구석이 있어야 하는구나. 참 말도 되지 않고, 도저히 되지도 않고, 있을 수 없는 일을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해내는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믿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다보면, 우리의 믿음을 필요로 하는 많은 일들을 당하게 됩니다. 수많은 영적전투에서 우리가 가진 믿음으로 맞서 싸워 이겨야 하는 전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영적전투는 요나단이 처했던 상황과 비교해 보면, 별 것 아닌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의 자녀들, 우리 직장의 문제, 여러 문제들이 있지만, 요나단과 비교해 보면, 우리는 훨씬 나은 상황에서 전투에 임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우리는 요나단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나은 전투에서도 믿음 없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기도하고, 조금만 더 싸우면 이길 수 있는 일들 앞에서도 믿음이 부족해서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별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힘없이 쓰러지는 일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 올 한 해는 요나단과 같이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나아가서 우리가 당한 모든 영적전투에서 싸워 이겨 승리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우리가 요나단을 통해서 배워야 점은 요나단은 머뭇거리지 않고 실행에 옮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요나단은 자신들이 처한 그 위기에 대해서 무작정 시간만 보내면서 절망하고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을 갖고 주저함 없이 나아갔습니다.

  사사기에서 기드온을 보면, 그는 참 신중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징을 보여 달라면서 그는 한 번도 아닌, 두 번의 표적을 통해 확신을 얻고 나서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달랐습니다. 요나단은 일단 믿음을 갖고 부관과 함께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8절에서 10절입니다.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그들이 만일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그들이 만일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요나단과 무기를 든 소년은 둘이서 몰래 숨어 들어가서 자고 있는 블레셋 군사들을 기습해도 승산이 없는 일이었는데, 적군들에게 자기들의 모습을 드러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과 부관을 보고 말하기를 “우리에게 올라오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셨다는 표징으로 알고, 올라가서 싸우자고 했습니다.

  기드온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기드온은 표징이 있어야 나가겠다고 했지만, 요나단은 일단 믿음으로 출발한 후에 하나님이 보여주신 표징으로 확답을 받고 싸웠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은 시시한 양털 시험이나 하면서 시간을 낭비했지만, 요나단은 하나님의 표징을 받는 일에 있어서도 믿음의 용사다운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몰래 숨어서 병사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그 대화를 통해서 또 다시 확증을 받았던 기드온과는 다르게 담대하게 자신들을 노출시키면서 적군들에게 나아가서 그들이 외치는 말을 통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정지 신호인지 전진 신호인지를 구분해서, 올라오라고 하는 하나님의 전진 신호를 받았을 때, 즉각적으로 행동했습니다.  

  13절 말씀을 보면, 요나단이 손 발로 기어 올라갔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블레셋 군대가 바위 절벽 위에 진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굉장한 모험이었습니다. 위에서 공격하는 것과 밑에서 공격하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위에서 공격하는 사람들이 훨씬 유리할 수밖에 없고, 요나단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올라갈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손에 넘기셨다는 것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블레셋 군대는 요나단 앞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아버지 사울왕과 요나단의 극명한 차이를 볼 수가 있는데, 사울왕은 요나단이 적군에게로 간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블레셋 군대 진영에 소동이 일어난 것을 알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지금 요나단은 단신으로 쳐들어가서 싸우고 있는데 사울왕은 싸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고자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절 말씀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해지는 것을 보고 제사장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던 것을 그만두게 하고, 이스라엘의 승리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니까 그제서야 백성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든지 그 사람의 특성에 맞게, 신중한 사람은 신중한대로 쓰시고, 조급한 사람은 조급한대로도 쓰시겠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우선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에 있어서 머뭇거림이 없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신중한 것도 중요하고, 따지고 계산해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머뭇거림 없이 전진하는 믿음의 결단이 더 먼저인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신중하지 말라는 말과는 별개의 것이고, 조급하거나 서두르라는 것과도 별개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피되,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의심하거나 머뭇거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는 기도할 때와 순종할 때만 있으면 된다.” 기도하고 순종만 하면 되지, 회의를 하고, 자로 재어보고, 괜히 시간 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가지 기도해 보겠다든지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요나단과 같이 즉각적인 행동의 믿음, 머뭇거림 없는 순종의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요나단과 같은 머뭇거림 없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도 올 한 해 우리 삶 가운데 머뭇거림 없이, 즉각적인 응답과 축복으로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요나단을 통해서 우리도 요나단과 같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요나단이 위대한 승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아갔고, 그 믿음 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일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의 모습을 배울 수가 있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먼저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적군에게로 나갈 때에 자신이 하는 일을 떠벌리지 않았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통을 치면서 나를 본받으라고 소리치면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나아갔고, 하나님께서 승리를 안겨주셨을 때에도 그 영광을 자기가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영웅적인 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 일로 인해서 영웅 대접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자신이 세운 그 공로를 내세우면서 사울의 왕위를 잇는 왕의 자리에 앉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다운 겸허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세우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 요나단 한 사람의 용기와 믿음의 순종이 낙담한 이스라엘의 사기를 높여줬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이렇게 자기만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남도 함께 세워주고 함께 흥하게 하는 법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요나단과 같이 이러한 모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기를 늘 구하는 믿음으로 나아가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일을 이루어주셨을 때에, 결코 교만하지 않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고, 다른 사람을 세워줄 수 있는 모습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요나단이 하나님과 함께 했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나단이 싸운 것 같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대신 싸워주셨습니다. 요나단은 20명 정도를 무찔렀을 뿐이었지만, 하나님은 수 십만의 군대를 무찌르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기를 구해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모든 것이 다 헛될 뿐입니다. 아합왕이 길르앗라못 전쟁에서 패배하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니까 아합왕이 남유다 왕국과 연합군을 결성했었지만, 그것도 헛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니까, 전쟁의 많은 경험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니까, 아합왕이 살려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 봐도 헛된 수고일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요나단과 같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간다면, 요나단과 함께 해주셨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함께 해주실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 해주신다면, 요나단이 그 절망의 자리에서도 승리의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승리를 누리고, 승리의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말라고 기도했던 다윗과 같이, 우리가 다른 어떤 것을 구하는 것보다도 올 한 해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해주시기를 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를 기뻐하는 사람이 되도록 더욱 힘쓰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본받기에 충분한 믿음의 선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요나단이 가졌던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의 즉각적인 행동의 믿음을 볼 수 있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의 본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것이 내게 도전이 되었습니까? 요나단을 통해서 내게는 없는 것, 내게 있어 어떤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까? 

  올 한 해 우리들이 어떤 계획과 결단을 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냥 세월을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 선진들의 모습을 본받고, 나도 그렇게 살아가보기로 결단하는 믿음의 모습이 우리들에게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보기로 결단하고 애쓰며 살아갈 때에,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에게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역사하셔서 우리도 그와 같은 귀한 삶을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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