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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장 합당한때 (막 2: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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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합당한때 (막 2:18~22) 

     
한 때 신토불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네에게는 우리네 음식이 제일 좋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젠 우리 것이라는 것이 사실 찾아보기 힘든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거의 모두가 수입품이요 먹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군다나 국내산은 수입품보다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기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겠죠. 
적당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알맞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알맞은 것일까요? 요즘은 때도 없이 과일이 나와서 팔립니다. 여름 과일이 한 겨울에도 팔리고 있습니다. 과일 역시도 제 철에 먹어야 제일 좋다고들 하지만 그런 상식조차도 이제는 바뀐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냥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면 되지 뭘 그런 걸 따지냐고도 합니다. 건강들을 많이 챙깁니다. 그러다보니 더욱 철 가리지 않고 몸에 좋다는 것을 찾는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변함이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낮과 밤의 구별조차 어려운 그런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예전엔 그저 해가 지면 밤이요 해가 뜨면 아침이었습니다. 밤에는 자고 낮에는 일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상식조차 달라져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낮에 해야 할 일도 있고 밤에 해야 할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뿐입니까? 24시간 영업하는 그런 상점도 많이 생겼습니다. 오죽하면 25시라는 상점까지 있겠습니까? 24시간 가지고도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는 아주 중요합니다. 시작할 때가 있고 마쳐야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해야 할 때가 있고 침묵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웃어야 할 때가 있고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웃어야 할 때에 우는 것은 그래도 너무 좋은 나머지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있겠지만 울어야 할 때에 웃는 것은 옆에서 볼 때 조금은 아닌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장례식장에 가서 웃고 떠들 수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를 보아 그 때는 금식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그래 사람들이 와서 묻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온 나라가 다 같이 금식하고 있는 때에 유독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고 있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아니 당연히 모든 경건하다는 사람들이 다 금식하는데 예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 묻는 것입니다. 이건 꼭 무슨 비난을 하고자 해서 하는 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궁금합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금식하고 바래새인들도 금식한다면 예수의 제자들 역시도 금식해야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론 모두가 다 금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에스더가 그의 사촌 오빠에게 전달하기를 “모든 유대인들에게 전하여 사흘간 금식하게 하여 주십시오. 나도 사흘을 금식하겠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왕에게 나아가 백성들의 문제를 아뢰겠습니다. 내가 죽으면 죽겠습니다.” 이는 온 나라에 있는 유대인들의 생존과 관련되어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정말 죽기 살기로 금식하며 기도하기를 요청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와 같이 때로는 금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사명을 다지기 위해서 금식하기도 하고 우리들에게 있는 어떤 심각한 문제를 놓고 금식하기도 하며 또는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에 함께 동참하기 위해서 금식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금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때에 맞는 금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혼인 잔치를 벌이는 집에서 신랑과 같이 기뻐하면서 금식할 사람이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날에는 모두가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 아니냐 하지만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온다면 그 날에는 당연이 금식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8장 6절에서는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씀합니다. 흉악의 결박에 묶여 있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금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멍에에 묶여 있는 자가 있다면 금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고 모든 멍에를 꺾기 위해서 금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보여주기 위한, 금식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목적의식도 없이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금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를 위한 어떤 수고를 한다고 할 때 나는 그 의미도 뜻도 모르는 채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섬김의 모습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수고는 아무런 힘도 감동도 없습니다. 그저 힘만 들 따름이요 쉽게 지치고 말 뿐입니다. 

숭어가 뛰니까 망둥이도 뛴다는 속담이 있듯이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하는 그런 식이 아니라 남들이 하기에 나도 한다 할지라도 그 의미를 바로 알고 바른 헌신의 모습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미를 알지 못하고 남들이 하니까 따라 한다면 거기에 무슨 감동이 있겠고 거기에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저 그것은 마지못해서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요 나 스스로도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데 누구에게 감동을 줄 수 있겠고 그것이 어찌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설사 거기에 무슨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해도 그래서 칭찬을 받는다고 해도 그건 결국 자신과 남을 속이는 것밖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물론 때로는 의미를 몰라도 따라서 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라도 그렇게 하는 참된 의미를 찾아나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곧 나의 정진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때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를 놓치고 난 다음 후회를 하지 않도록 바른 때를 알고 살아가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심어야 할 때 심어야 하고 거두어야 할 때 거두어야 합니다. 일해야 할 때가 있고 쉬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미리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려울 때를 대비해서 좋은 때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로 준비해야 하고 우리의 길을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평안할 때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어려움을 당하고 금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의 앞날을 우리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기에 좋을 때 어려운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요즈음 아이돌 스타라고 해서 젊은 아이들이 한참 인기몰이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저렇게 다재다능할까 생각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그들이 피 땀을 흘리면서 노력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타고난 재능이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1%의 재능과 99%의 노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재능이 있다면 보다 수월할 수는 있겠지만 하지만 재능만 가지고 살 수 있는 때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자기 수고와 노력이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그런 때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남들을 부러워하고만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만큼 이를 악물고 준비해야 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아무에게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받기에 합당한 재목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들어 쓰십니까? 준비된 자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언제 어느 때 어디서 나를 부르시든 그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그 부르심대로 따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은혜를 부어 주셔도 은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을 우리는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지금은 추운 겨울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평소에 추운 겨울을 지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이 겨울이 유독 더 추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단지 계절적으로 겨울이기 때문에 겨울이 아니라 인생의 겨울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유독 그 겨울이 더 춥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마치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름에 노래만 부르고 겨울 준비를 하지 못했던 베짱이처럼 그렇게 사는 사람이 우리들 가운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소에 이런 환난의 때를 준비한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때가 와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항상 주님과 만나고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오직 담대하게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언제나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늦었지만 그래도 깨달아 주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어두움 가운데 빛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지금이야 말로 바로 금식해야 할 때요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입니다. 그러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우리를 상케 하지 못할 것이요 오히려 우리들 앞에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가 드리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때를 바로 알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바른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예전에는 정말 알뜰살뜰하게 살았습니다. 지금도 기억하기는 저희 어릴 적에는 어머니께서 늘 피곤한 가운데서도 뜨개질을 계속하셨습니다. 자투리 털실을 얻어오거나 사다가 그것을 이어서 그것으로 뜨개질을 해서 장갑도 짜서 끼워주시고 옷도 짜서 입혀 주셨습니다. 양말 한 켤레를 가지고 기우고 또 기워서 신던 생각이 아련합니다. 그때는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힘들고 힘들지 않고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먹고 살아야 한다는 과제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아이들을 하나 둘 밖에 낳지 않던 때도 아니었습니다. 조그만 단칸방에 온 가족이 모여서 살던 그런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지금처럼 널찍한 집에서 몇 식구가 사는 그런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열심히 살아가고는 있지만 예전에 비하면 어림도 없습니다. 요즘은 3D라고 해서 더럽고(dirty) 힘들고(difficult) 위험한(dangerous)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 땅에 와서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 우리들이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들을 맡아서 대신 수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은 더운 밥 찬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말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아직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왕이면 그냥 알바를 할망정 그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은 안 하겠다고 하는 것이 우리네 모습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고서도 잘 살 수만 있다면야 상관이 없겠지만 지금의 처지는 그렇지만도 않다는 데에 심각성이 있습니다. 문제는 나의 능력입니다. 내 수준이 과연 사회가 요구하고 기업이 요구하는 수준에 도달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학생들치고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그럴 수준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서울대학교에 들어갈 수가 있던가요? 지금은 농어촌 특례입학이라고 해서 농어촌 자녀들 가운데서 실력은 좀 모자라더라도 대학에서 특별히 입학을 허락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들어간 아이들 가운데 실력이 따라주지를 않아서 중도에 학업을 고만두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네 말에 호박에 줄을 그려 넣는다고 해서 수박이 되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흉내 낼 수 있겠죠. 하지만 궁극적으로 호박이 수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박만이 귀한 것은 아닙니다. 호박은 호박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수박보다도 호박이 더 귀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생각을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죠. 그러기에 자기 처지에 맞게 살아가는 지혜를 우리가 지녀야 합니다. 헌옷이 헤어지니까 그것을 깁는데 새 옷을 잘라다가 깁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우리 가운데 그런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가장 쉽게 우리가 새로 아파트를 장만해서 이사를 간다고 합시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빚을 내어서라도 새 가구를 장만할 것입니다. 쓸 만한 것도 다 버립니다. 그리고 새로 장만합니다. 물론 새집에는 새 가구가 어울리겠죠. 그거 당연한 일입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하고 싶을 것입니다. 문제는 집도 융자를 얻어서 겨우 장만하고 그 융자금을 갚아나가기에도 벅찬 그런 형편에 새로운 가구를 또 빚을 내서 장만한다고 하는 것은 조금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기 힘들다고 한다면 그것은 조금 아닌 듯싶습니다. 하지만 기분인데 라고 이야기도 합니다. 이왕 한 번 쓰는 건데 하는 말도 합니다. 감당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좋습니다. 이왕이면 그렇게 하면 좋습니다. 하지만 감당할 수도 없는 것을 기분 낸다고 해 놓고는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면 이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 믿음이 또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가 각자에게 가장 합당한 은사로 주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주시는 방언과 같은 은사가 있는 반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은사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목회자의 은사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한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받으면 좋은 은사들도 있습니다. 영분별의 은사라든지 지혜와 지식의 은사들은 가능하면 모든 성도들이 다 받으면 좋은 그런 은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이 은사를 다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은사 받기를 사모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선 내게 주신 은사에 대해 감사하면서 적극적으로 받은바 은사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은사를 활용하는데 있어서도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포도주는 숙성되어 가면서 가스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부피가 늘어납니다. 

그러기에 예전에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았습니다. 새 부대는 신축성이 있어서 포도주가 숙성되어 가면서 늘어나는 부피를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게 아깝다고 낡은 부대에 담는다면 결국은 부대가 터지게 됩니다. 그러면 부대도 망가지고 술도 버리게 되겠죠. 이런 어리석은 모습으로 우리가 살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만의 장점을 살리는 것이요 내게 주신 은혜를 따라 감사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가르치는 일로 섬기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섬기는 일로 지혜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지혜로 이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스리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또한 지혜롭고 은혜롭게 다스리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중심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마치 기계에 기름칠과 같이 모든 것이 어우러지게 하는 매개체가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에 모든 은사도 역시 사랑을 바탕으로 해서 주어지고 활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라 하더라도 사랑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결코 기쁨이 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그건 또 다른 우월자에 의한 상처만 남길 뿐입니다. 그러기에 앞선 사람들이 보다 못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절실합니다. 이는 곧 함께 어우러짐입니다. 손에 손을 맞잡는 것입니다.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자세가 그래서 필요합니다. 세상에 만능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남들보다 나은 것이 있지만 남이 나보다 나은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세워주는 배려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겨울이 중요합니다. 겨울이야 말로 서로에 대한 배려가 정말로 필요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 추운 계절에 우리 모두가 서로를 배려하는 자세로 함께 손을 맞잡고 나아감으로 좋은 춘 삼월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삶 속에서 좋은 열매를 거두기도 했지만, 익어가다 바람에 떨어진 적도 있고, 꽃은 피었는데 열매 없는 것도 있고, 꽃마저 피지 않았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얻기까지는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선한 열매나 생활의 아름다운 성공의 열매, 이 모든 것은 선한 노력 혹은 선한 경주가 없이는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풍요로운 열매를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범사가 형통하게 되기를 바라시는 좋으신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때가 이르면 좋은 것을 거두게 하신다는 말씀은 겨울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 참으로 좋은 구절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주시는 지혜와 은혜 가운데 오늘을 살아 귀한 열매를 거둘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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