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직 희망이 있다 (시126:1~6)

  • 잡초 잡초
  • 351
  • 0

첨부 1


아직 희망이 있다 (시126:1~6)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날 무렵에 미군 해군 잠수함 한 척이 본부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관 고장을 일으켜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잠수함이 사고로 바다에 가라앉았다는 소식을 접수한 잠수부들이 출동했습니다. 잠수부들이 바다 아래로 들어가 잠수함 뚜껑 위에 접근했습니다. 잠수부들이 잠수함 지붕에 내려앉았을 때 그 안에 있는 한 승무원이 망치를 이용해 모르스 부호로 ‘아직도 희망이 있어요?’ 라는 내용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희망이 있어요?’ 라는 질문은 숨막히는 어려운 현실을 살아 나가는 우리 모두의 간절한 질문일 듯 싶습니다. 어느 사업가가 회사가 부도 직전의 위급한 상황에 놓였을 때 관계자를 만나 ‘아직 희망이 있어요?’ 
어느 사람이 자신이 계획하고 꿈꾸어 왔던 일들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상황에서 ‘아직 희망이 있어요?’ 병원의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환자의 보호자가 회진하는 의사에게 ‘선생님, 아직도 희망이 있어요?’ 자녀의 탈선으로 마음 아파하는 부모가 자녀와 상담을 마치고 나오는 상담가에게 ‘아직 희망이 있어요?’ 라고 묻는 ‘아직 희망이 있어요?’ 라는 물음은 한 줄기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고 싶은 심정이 담긴 물음입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환경에서는 ‘아직 희망이 있어요?’ 라는 물음으로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희망을 ‘아직 희망이 있어요?’ 라는 물음표로 표현하는 사람들을 향해 ‘아직 희망이 있어요!’ 라고 희망을 느낌표로 자신있게 대답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직 희망이 있어요?’ 라고 희망을 물음표로 마치는 것과 ‘아직 희망이 있어요!’ 라고 느낌표로 마치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로 볼 때 희망에는 물음표 보다는 느낌표가 더 적절한 것같습니다. 물음표에서는 희망의 강렬함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느낌표에서는 희망의 강렬함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장래가 유망한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 조지 워싱턴대 법대에 다니며 법관이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어느 날 차를 몰던 중에 차량 전복사고를 당해 중증장애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혼자서는 물도 마실 수 없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자살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자살하기 위해 퀸스 공동묘지를 찾았습니다. 그는 공동묘지 사이에 누웠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저 답답한 무덤 속의 작은 관, 저 속에 누워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 무의미하게 관 속에 누워있기 보다 차라리 소망을 품고 열심히 살자.’ 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기 위해 찾았던 무덤들 속에서 도리어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무섭게 공부해 검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미국 뉴욕시 지방검찰청 사상 최연소 부장 검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희망의 인생’은 세계 많은 장애인들에게 큰 용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정범진씨입니다. 인생의 승자와 패자는 관점에 따라 나뉩니다. 패자는 무덤에서 절망을 봅니다. 그러나 승자는 무덤에서 희망을 봅니다. 하나님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희망의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십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삽니다. 어떤 때는 좋은 일이 있을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나쁜 일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모두가 똑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매사에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문제의 뒤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있다는 것을 믿고 삽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자신의 삶속에 이뤄질 것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는 말씀을 믿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그 어려움 뒤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믿고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눈물의 선지자라로 불리는 예레미야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면서도 그는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희망의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것은 재앙과 절망이 아니라 미래와 희망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 126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올라가면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그들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도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70년의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은 고달픈 생활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고난과 절망의 70년간의 포로 생활 가운데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재건되는 날이 분명히 오리라는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믿음 안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은혜가 에스라1장 1절에서 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이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점령하게 하고 그 페르시아 왕인 고레스를 통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그로 하여금 온 나라에 조서를 내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본국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그곳에서 예배하도록 허락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짐을 싸들고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오면서 부른 노래가 오늘의 본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아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함박 웃음과 함께 찬양을 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시를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의 결론이 5-6절입니다.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5절과 6절은 같은 내용의 말씀을 반복함으로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5절에 ‘눈물을 흘리며’와 6절에 ‘울며’라는 말은 현재 놓여 있는 힘들고 고통스런 삶의 자리를 말합니다. ‘눈물과 울며’라는 단어를 통해 자신이 겪고 있는 아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시인은 절망적인 상황을 인정하면서 그 절망의 상태에서 탄식하는 것으로 머물지 말고 그곳에서도 희망을 향해 일어서라고 5절에 ‘씨를 뿌리는 자는’과 6절에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라는 말씀을 통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눈물’은 현재의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를 상징한다면 ‘씨’는 미래의 희망을 상징합니다.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눈물만 흘리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한숨이 나오는 상황에서 한숨만 쉬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고, 한숨을 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그곳에서 포기하지 말고 허리를 동이고 다시 일어서서 희망의 씨를 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반드시 기쁨으로 곡식의 단을 거두는 때가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말씀은 ‘반드시’입니다.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눈물을 닦아내고 미래를 위해 희망의 씨를 뿌리는 사람에게는 내가 ‘반드시’ 그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지킬 박사과 하이드’ ‘보물섬’ 등을 쓴 로버트 스티븐슨은 결핵 말기의 고통 속에서도 집필함으로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는 평생 자신을 괴롭힌 만성두통을 참아내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봤습니다. 프랑스 화가 르누아르는 류머티즘으로 고생했는데 그가 붓을 한번 움직일 때마다 얼굴에는 고통의 땀방울이 맺혔다고 합니다. 
그는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자 손에 붓을 묶고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는 고통 가운데서도 명작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베토벤은 청각장애가 있었지만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작곡에 임함으로써 불후의 명곡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구세군 운동을 주도한 캐더린 부드는 ‘내 삶에 있어서 단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는 날이 없었다’ 고 고백합니다. 성공은 희생 다음에 따라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삶에 많은 어려움들이 있을 줄로 압니다. 무엇보다 경제 위기의 한파로 인해 경제적인 고통 속에 있는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건강의 연약함으로 눈물을 흘리시는 분들이 있는 줄 압니다. 자녀들의 문제를 가지고 한숨지으며 뜬 눈으로 날을 지새는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직장과 사업장의 문제로 속이 새까맣게 타는 분들이 있을 줄로 압니다. 우리 가정의 미래가 어떻게 될 지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놓인 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겪고 있는 여러 모양의 아픔과 고통스러운 현실을 그대로 인정합시다. 현실을 부정하지 말고 현실을 그대로 인정합시다. 눈물이 나올 때는 눈물을 흘립시다. 한숨이 나올 때는 한숨을 쉽시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고, 한숨을 쉬는 그 절망의 상태에서 이제는 눈물을 닦고, 한숨을 거두며 다시 일어나 미래를 위해 희망의 씨를 뿌립시다. ‘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오늘 어려운 힘든 자리에서 눈물을 닦아내고 다시 씨를 뿌리는 성실함과 믿음이 있을 때 오늘 본문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라고 부르는 기쁨의 찬양이 우리의 것이 되리라 믿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아내인 엘리너는 미국 역대 퍼스트 레이디 가운데 ‘가장 호감이 가는 여성’ 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엘리너는 열 살 때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한 끼 식사를 위해 혹독한 노동을 하며 어렵게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녀에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자산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인생관이었습니다. 

엘리너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비관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여섯 자녀 중의 한 아이가 사망했을 때도 ‘아직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아이가 다섯이나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인 루즈벨트가 젊은 시절 갑작스럽게 소아마비에 걸려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을 때도 그녀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방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루즈벨트를 그녀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지켜 보기만 하다가 어느 날 함께 산채하자고 청했습니다. 며칠 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고 맑게 개인 하늘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엘리너가 루즈벨트에게 ‘비가 오거나 흐린 뒤에는 꼭 이렇게 맑은 날이 오지요.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 다리가 불편해졌지만 그렇다고 당신 자신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지금의 시련은 더 겸손하게 맡은 일을 열심히 하라는 하나님의 뜻일거예요. 여보, 우리 조금만 더 힘을 내요.’ 그녀의 말에 힘을 얻은 루즈벨트는 임기를 훌륭하게 마칠 수가 있었고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은 ‘아직 희망이 있어요?’ 라고 묻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아직 희망이 있어요!’ 라고 외치는 사람에게 반드시 임하십니다. 아니 ‘아직 희망이 있어요?’ 라고 묻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그래, 아직 희망이 있다!’ 라고 대답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삶의 자리 가운데서도 ‘아직 희망이 있다!’라고 외치며 힘차게 일어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외쳐 봅시다. ‘아직 희망이 있다!’ 옆에 앉으신 분들과 서로 격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아직 희망이 있다!’고 외치는 믿음의 성도님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