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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받기 위해서는 (왕상 3:4~15, 히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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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받기 위해서는 (왕상 3:4~15, 히 4:16)

                
히 4:16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사람이 죄를 지으면 영혼이 죽게 되며, 죄의 저주아래 살다가 멸망을 당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공로로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을 얻고 영원히 잘되는 복된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가장 큰 은혜는 구원받은 은혜입니다. 그래서 내 이름이 천국 생명록에 기록된 복이 가장 큰 복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단어가 “은혜”라는 단어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은혜는 무한합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은혜'란 히브리어는 '헨'인데 'grace, favor'를 가리킵니다. 헬라어로는 '카리스'인데 'to rejoice', 'accep tablness'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호의 호감, 사랑' 등으로 해석합니다(롬11:6, 4:4, 신9:4-5). 

한 마디로 은혜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자유롭고도 주권적인 무조건적인 호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일반은혜와 특별 은혜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일반은혜'란 인류 모든 만인에게 허락한 것으로 신앙이 있든지 없든지 선인과 악인에게 동일하게 베푸시는 은혜로 인류 모두가 한결같이 받는 은혜로 예를 들어 햇빛과 비를 주시는 등의 은혜이며(시 145:9, 눅 6:35,렘31:12). 

2) '특별은혜'란 하나님의 초자연인 역사로 베푸시는 은총으로 한정된 사람들만이 받는 선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을(엡2:5,빌1:29) 입은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구원받은 백성에게 주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은혜란 인간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구속을 받은 사람들이 입은 은혜를 가리킵니다(엡2:8, 갈1:6,15, 롬3:24, 5:15,행 15:11).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로 세상의 죄악을 해결하시는 구세주가 되시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으로 특별한 은혜의 길이 열렸습니다. 이 특별은혜를 입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르며,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께로 부터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보혈로 대속의 공로로 죄의 심판과 저주는 떠나갔습니다. 

인류가 죄로 말미암아 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로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를 망하게 할 죄와 사단과 마귀의 종으로 살았던 삶과 함께 저주와 심판이 끝나고 신앙으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거룩한 길이 열렸습니다. 

죄를 지으면 영원히 망하지만 죄를 해결하신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와 은혜를 깨닫고, 믿음으로 주주를 영접하면 구원의 길과 영원히 주님께서 동행하시고 인도하시는 복 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성도는 신앙 선택으로 인생의 결과가 달라졌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선언합니다.

예레미야 31장14절 말씀에 보면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복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족하게 해주신다"고 했는데, 개역성경에는 ‘복’을 ‘은혜’라고 번역했습니다. 복도 은혜인 셈입니다. 

성도라면 누구든지 은혜를 싫어하거나 거절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은혜받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은혜의 생활과는 무관할 수 있고 실제의 삶에서는 은혜와 가장 멀리 떨어져 사는 성도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때로는 은혜가 떨어지면 삶이 더욱 힘들게 느껴지고 마음이 지옥처럼 변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신앙인에게도 삶의 위기와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 때 은혜를 받지 못하면 영적으로 더욱 깊은 병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불평이 나오고 낙심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는 자리에서 멀어집니다. 심지어 어떤 봉사를 하더라도 자원함이 되지 않고 억지로 하게 됩니다. 그런 경우 봉사를 하지만 기쁨이 없고 힘만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만 삶의 자리에서 안 좋은 일만 자꾸 발생할 수 있습니다. 즉, 신앙의 위기가 찾아올 때 은혜가 충만하면 쉽게 위기를 이겨내며, 쉽게 이겨내게 됩니다. 은혜는 위기를 쉽게 극복하고 대처하는 힘을 주는 결과를 가져오는 셈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마음이 은혜 안에 있기에 위기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감사가 나오며, 소망으로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누가복음1장에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요셉과 약혼한 처녀인 마리아를 찾아가서 선포한 내용이 이렇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28절). 이어서 천사가 말하기를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30-31절). 

어떻게 처녀가 잉태하리는 이야기에 계집종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기 원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은혜를 받게 되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심을 믿기에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작은 어려움에도 시험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결국 훌륭한 신앙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반드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밥을 못 먹어 배가 고프면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배고픈 설음이 있어서 마음이 더욱 아픕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삶이 고달프거나 짐이 무거우면 몸도 힘들지만 마음은 더욱 힘이 듭니다. 만약 마음만 덜 힘들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의 짐들도 덜 무거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은혜를 받게 되면 이와 같은 이치로 바뀝니다. 은혜를 받게 되면  소망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되며, 체험적인 신앙으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게 됩니다. 결국 근심과 염려의 짐도 가볍게 만들어 주며, 우리 마음에 초인적인 힘과 깨달음을 주어 삶을 재해석하게 하는 하늘의 신령한 에너지와 같아서 시험을 극복하고 역경을 돌파하여 이기는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결핍되거나 떨어지면 우리의 삶은 동일한 환경 속에서도 갑절로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승리한 믿음의 사람들이나 특별하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위대한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중간 인류의 시조인 노아, 혈통을 극복하고 장자의 복을 받은 야곱,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고 종 된 신분과 죄수의 신붕을 이겨낸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구국의 영도자 모세가 은혜를 입었고, 가나안을 정복한 여호수아와 갈렙이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이 된 사울이 왕이 될 때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되었고, 목동이었던 다윗이 왕이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오직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로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심지어 죽이려는 대적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을 불쌍히 여겨 진리를 증거 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예수님의 모친인 마리아와 양부인 요셉이 예수님을 잉태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이 주님의 부름을 받아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은혜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부활의 복음을 전하던 스데반이 순교할 수 있었던 것도 은혜요. 기독교를 핍박하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사도가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목사가 된 것도 은혜요, 이렇게 목회를 하는 것은 더욱 큰 은혜입니다. 

성도여러분이 예수 믿고 성도가 된 것도 은혜요. 현재 예배에 참석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열심을 다하여 직분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그 직분을 감당하는 믿음을 갖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충성을 잘하지 못하고 있다면 내게 은혜가 떨어졌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은혜 충만해야 합니다. 은혜가 충만하도록 항상 은혜를 사모하고 받기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은혜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Let us then approach the throne of grace with confidence, so that we may receive mercy and find grace to help us in our time)고 하였으며,

베드로전서 1장 13절에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Therefore, prepare your minds for action; be self-controlled; set your hope fully on the grace to be given you when Jesus Christ is revealed.)라고 은혜를 사모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갈증에는 한 방울의 물도 소중한 것처럼 영혼이 갈증을 느낄 때, 은혜 고갈된 심령은 은혜라도 받기 위해 은혜를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시편107:9절 말씀을 보면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고 하였습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구하고 찾고 두르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 문, 즉 은혜의 문이 열리게 되고 받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1절 말씀에 보면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영적인 것"을 개역성경에는 "신령한 것"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은혜"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되 풍성하게 받도록 해야 하며 그것을 받고자 하는 목적도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은혜에 온 몸을 잠기는 상태로 나아간다면 죽음이 와도 환란이 와도 상관없는 신앙으로 바뀌게 됩니다. 

바울의 고백에서 환란, 시험, 죽음이 찾아와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의 줄에서 끊을 수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이 은혜가 주는 초월의 속성입니다. 더울 때 얕은 물에 발을 담그는 것과, 깊은 물에 발을 담그는 것은 큰 차이가 납니다. 삶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도 그렇습니다. 얕은 은혜를 받으면 작은 문제는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산 같은 짐이나 문제는 깊은 은혜에 잠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 엄청난 시험을 이길 수도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귀하고 그 은혜를 받은 자들이 희귀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은혜를 받게 되면 이 세상에서 걸어가도 힘이 들지만 은혜 안에서 살면 뛰어가고 달려가도 곤비치 않게 해 주시는 새 힘과 하늘의 능력을 공급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가 은혜를 갈급해 하지 않고 사모하지 않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예배를 드렸는데도 아무런 감동이 없고 힘이 없다면 은혜를 받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만약 사모함이 없는 예배를 드려보세요. 그러면 예배 후에 어떤 것이 남습니까? 여전히 심령은 갈급하고 답답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여러분 마음속에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우선>입니다. 사모함이 없다면 설교를 들어도 은혜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면서 교회에 나아올 때 한량없는 은혜가 여러 방면에서 경험되어 됩니다. 성도의 눈빛, 얼굴, 대화에도 은혜로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사모하는 자의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은혜와 은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언제든지 주실 수 있습니다. 

출33:19절 말씀에 약속하시기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은혜 배품을 받을 자가 누굴까요? 하나님이 임의로 정해서 주실까요? 은혜를 사모하는 자입니다.

이사야 30:18-19절 말씀에도“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 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이 말씀에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기다리고 계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다림"이란 '사모함이 수반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를 사모하며 기다릴 때에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면 은혜를 사모하는 방법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이사야 30:19절에 분명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를 만족하게 해 주시려고 우리가 찾을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은혜를 기다려야 합니다. 주실 은혜를 소망하면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술을 얼마나 사모합니까? 술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술자리를 만들거나 찾아갑니다. 성도는 은혜 받을 자리를 찾고 은혜를 받을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은혜도 사모하면 더욱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를 마치 가슴이 뜨겁고 눈물이 나는 감정이 전부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감정이 은혜의 본질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례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시골교회에서 수염을 멋지게 기른 연세 드신 목사님이 열심히 설교를 하며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연세가 많은 신자들의 반응은 도무지 시원치 않았습니다. 더러는 졸기도 하며, 시계를 보기도 하며, 성경책을 여기 저기 들쳐보기도 하는 등 대부분 예배시간, 특히 설교를 들을 때는 집중을 하지 않고 딴청을 부리곤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목회에 점점 맥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앞좌석을 보니 어느 할머니가 계속 눈물을 닦고 앉아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날 따라 목사님은 용기를 얻어 설교를 더 뜨겁게 계속해 나갔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목사님은 그 할머니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말을 건넸습니다.

“할머니, 오늘 설교 말씀은 정말 할머니를 위한 말씀이었던 것 같군요. 그런데 어떤 말씀이 그렇게 감동적이었나요?” 할머님의 말씀은

“목사님, 솔직히 말씀은 잘 모르겠어요. 다만 며칠 전에 제가 오랫동안 키우던 염소가 죽었어요. 목사님의 수염을 보니까 자꾸만 그 염소 생각이 나서 그만... 흑흑흑...”하면 울더랍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우리가 신앙생활를 하면서 눈물이 난다고 해서 다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연속극 보고 눈물을 흘릴 때 은혜를 받아 흘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은혜를 받으면 기쁨의 눈물,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간섭을 통해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란 우리의 짐을 실제로 가볍게 하거나 덜어줍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과 조건이라도 심령천국을 이루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에 잠기게 되면 주체할 수 없이 기쁘고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2. 예배를 철저하게 잘 드려야 합니다.

본문 16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Let us then approach the throne of grace with confidence, so that we may receive mercy and find grace to help us in our time of need.)고 하였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다양한 만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도 다양합니다. 그렇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우리가 은혜를 받기 위하여 날마다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야 합니다. 은혜의 보좌란 교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일날 드리는 예배는 모두 은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성도가 은혜주신 날에 은혜주신 하나님께 나아와 받은 바 은혜를 기억하며 헌신하는 날이 주일이며, 예배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며 그 은혜에 감사하여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은혜를 빼버리면 출발부터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시간에 드리는 찬송과 기도와 헌금을 드리는 것도 은혜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말씀과 축복도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은혜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온 몸을 잠기게 하는 풍성한 은혜를 받을 때까지 보좌 앞에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은혜를 주시는 통로가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지 않으면 은혜를 입을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에 성소 중에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보좌였습니다. 오직 지성소에서만 하나님을 만나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릴 때 휘장이 둘로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은혜의 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누구든지 하나님이 거하시는 은혜인 보좌 구약의 지성소와 같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오늘 날 보좌는 어딥니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인 교회인 것입니다. 그 자리는 예배의 자리입니다. 예배란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이 은혜를 주시기 위해 만나 주시는 자리입니다. 

예배가 왜 보좌가 되느냐? 하나님이 기꺼이 만나주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받을 은혜와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고 헌금을 드리고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받고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종을 통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의 은혜를 주십니다. 말씀은 영적인 만나입니다. 이것을 먹음으로 영혼이 강건해지고, 살아 소생하게 됩니다. 새 힘을 얻습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 열왕기상 3장 전체의 내용은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사건과 함께 나타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 일천번의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꿈에 나타나셔서 솔로몬에게 직접 물으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그래서 솔로몬은 백성들을 보다 잘 다스리기 위해 신약의 새벽기도회 천 날을 드린 후 지혜를 구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지혜뿐만 아니라 부와 영광도 누리게 해주셨습니다. 

따라합시다. "예배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으려면 교회에 달려 나와야 하며, 철저하게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예배를 우습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불신자들이 가정에서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를 드리는 정성보다 못해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성도에게 은혜의 통로로 주신 선물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와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빠지면 안됩니다. 예배는 은혜가 공급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때를 따라 주시는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모하는 것으로 인정하시어 은혜로 만족하게 해 주십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 은혜를 줘봐야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가치를 모르는 자들에게 가치 있는 것을 안겨주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그들에게 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음식도 맛을 아는 사람이 더 먹습니다. 말씀도 맛을 느끼는 자가 더 가까이 합니다. 은혜도 경험한 성도가 더 사모하고 은혜를 더 받습니다. 아무리 은혜를 자리를 마련하고 은혜를 받으러 오라고 해도 오지 않습니다. 오지 않는데 받을 리가 있습니까?

사실은 오늘도 주님의 큰 은혜를 찬양하고, 주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왔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인들은 항상 말도 은혜롭게 해야 되고, 생활도 은혜로운 생활을 해야 되고, 얼굴도 은혜로운 얼굴 해야 됩니다. 봉사도 은혜롭게 해야 합니다. 오늘 찬양도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아닙니다.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부르는 찬송은 할머니가 불러도, 어린이가 불러도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됩니다. 찬양대의 생명은 은혜가 99%입니다. 잘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은혜가 되어야 됩니다. 은혜 받은 분이 은혜로운 찬송을 은혜를 주신 주님께 바쳐야 됩니다. 할렐루야! 


3. 은혜를 귀하게 여겨야 잘 간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여러분에게 은혜 주실 때 우리가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은 바 은혜를 잘 유지하고 간직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은혜도 받는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때입니다. 때를 놓치면 안 됩니다. 공부할 때 있습니다. 사랑할 때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결혼하고 1년 동안은 군에도 가지 말라고 나라에 명령을 합니다. 군에 입대시키지 말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사랑할 때가 평생에 그 때 뿐이기 때문입니다. 나이로 보나 젊음으로 보나 신혼으로 보나 모든 걸 볼 때 처음 만나서 그 때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혼 때에도 싸움하는 사람이 있습니요. 더 정신이 나간 사람은 이 때도 바람피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생에 가장 좋은 때를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습니다. 때를 놓치지 말고 행복한 가정으로 잘 세워야 합니다. 

더구나 은혜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받은 은혜를 잘 유지하는 것은 은혜를 받는 일보다 더욱 힘이 듭니다. 

사단은 은혜를 빼앗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역사합니다. 그래서 의심을 주거나 불신하게 하거나 설교에 시험이 들도록 역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설교가 이 시간 은혜가 됩니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예배를 드려도 은혜를 받지 못하고 설교를 들어도 은혜가 안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사단이 주는 시험이므로 물리쳐야 합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한테 문제가 있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입맛 없는 데 문제가 있지 반찬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목사님의 교회에 등록을 하고 설교를 듣는데도 은혜롭지 못하고 자꾸만 잡념만 생기고 목사님의 설교 내용에 흠과 티 잡기를 5년 동안 한 어느 여 집사님이 '이래서는 내 신앙성장에 큰 걸림돌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옮겨 보려고 하나 워낙 유명한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요. 예배 때 옆을 보나 앞을 보나 모든 성도들이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있으니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응답 받은 후 결정하기로 하고 기도원에 갔다고 합니다. 

정말 소나무 뿌리를 뽑아 버릴 정도로 “ 하나님 무엇이 문제 입니까? 목사님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나한테 문제가 있습니까? 설교 내용에 문제가 있습니까? 은혜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하고 간절히 기도 드렸다고 합니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이 지나도 아무런 응답이 없자 초조해지기 시작한 이 집사님이 죽기 살기로 주님 붙잡고 매달렸다고 합니다. 금요일 새벽이 되자 금식기도 한 그 집사님이 많이 쇄약해진 상태인데도 정신은 더 뚜렷한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네가 은혜 받지 못한 것을 왜 목사님의 설교 탓으로 돌리느냐? 목사님 탓이 아니라 네 탓이야 네 탓. 네가 은혜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말씀에 은혜가 없겠느냐? 은혜 담을 그릇을 준비 하여라 그러면 내가 그 그릇에 은혜가 철철 넘치도록 축복 하리라.” 

조용히 생각해 보니 그동안 목사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기보다는 말씀 전하시는 목사님의 모습 그리고 ‘저 예화는 작년에 쓰셨는데 또...’ 하면서 일일이 트집 잡으며 앉아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눈물로 회개 하고 어떻게 하면 은혜의 그릇을 준비할까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기도원을 다녀 온 후부터 그 여집사님의 예배드리는 모습은 종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우선 교회 나올 때 얼굴에 기쁨이 충만 했으며 찬송도 힘 있고 열심히 불렀으며 특히 설교시간에는 정좌하고 목사님의 얼굴을 똑바로 처다 보며 한 말씀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아멘, 아멘 하며 설교를 듣는 모습을 보고 주위에서 '어떻게 하여 그렇게 달라졌느냐'고 물어보니 이 여집사님 

"그동안 내가 은혜 받지 못한 이유를 목사님과 설교내용 탓으로 돌렸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내 탓이었어요. 그래서 은혜의 그릇을 준비하기 위하여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시간을 정하여 놓고 다음 주 설교말씀을 은혜롭게 받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세요라고 기도하였답니다.'

특히 목사님께서 말씀을 은혜롭고 능력 있게 선포하도록 기도하고 주일이면 예배시간 30분전에 교회에 나와 잠시 묵상 기도한 후 주보를 펴고 본문 말씀을 묵상하고 그리고 다시 주님께 기도드리기를  '주님 오늘 은혜받기 원합니다. 말씀 전하실 때 전하시는 목사님을 성령의 장중에 붙드사 그 말씀이 저에게 은혜로운 말씀으로 들리게 하사 아멘으로 받고 감사하게 하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한 후 말씀을 들으니 그 말씀이 정말 꿀 송이 같이 달고 백향목의 향기처럼 향기로워 자신도 모르게 아멘, 아멘 하며 은혜의 장중에 붙들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감사하면 더욱 은혜로운 시간이 되지요.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예배가 회복 되어 더욱 은혜롭습니다.” 라고 간증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탓으로 돌리면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지만 상대방 탓으로 돌리면 사단이 내 심령에 강하게 역사하여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지게 역사합니다. 혹시 목사님의 말씀이 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 하시는 성도들이 계시면 은혜 받지 못함은 전적으로 내 탓 인줄 알고 이 여 집사님처럼 기도로 준비하고 주일 예배에 참석하시면 분명 예배가 회복되고 사단은 역사하지 못하고, 말씀을 통하여 풍성한 은혜를 받는 귀한 시간이 계속 되리라 믿습니다. 

모든 예배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하게 기도로 준비하고 받을 은혜를 소망하면서 매 시간 시간 참석하시면 반드시 받아야 할 은혜를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 혹시 은혜를 받지 못한 채 예배를 드렸더라도, 설교를 탓하고 목사님 탓하고 찬송을 불러도, 설교를 들어도, 기도를 드려도 은혜를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지금 이 시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앞에 고백한 한 여집사처럼 모든 문제는 내 탓으로 돌리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준비하면 반드시 은혜를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 받아보지 못한 은혜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곡식은 반드시 곡식 종류에 따라 씨를 뿌리는 시기가 있습니다. 그 시기를 놓쳐버리면 그 해 농사는 패농이 됩니다. 열매가 없게 됩니다. 공부하는 분들이 조금, 한 번 기회 놓치면요 학교 졸업할 때 까지 계속하여 밀리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의 샘이 마르거나 은혜의 자리에서 떠나가면 안 됩니다. 여러분 신호등의 겨우를 잘 살펴보세요. 한번 빨간 불 잘못 걸리면요 끝날 때까지 빨간불입니다. 한 번 걸리면 계속 걸리게 됩니다. 반대의 겨우는 계속 파란불로 계속 열립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오셔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주실 은혜를 받기 위하여 정기 예배에 반드시 참여하셔야 합니다. 이번 예배 시간을 놓친다는 것은 은혜 받을 기회를 놓친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지혜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미 은혜를 받았다면 더욱 큰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매 주일, 예배마다 주시는 은혜가 다르고 설교말씀을 통해서, 헌신예배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 주시는 때가 언제일 지 모르기 때문에 예배시간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무슨 은혜를 언제 주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때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마가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 언제 성령을 받았습니까? 오순절 날이었습니다. 기도하기 시작한지 열흘이 되었을 때입니다. 이때 하루 하고 이틀하고 사흘해도 아무런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나오지 않은 분이 있다면, 아니 9일을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무슨 일이 생겨서 그날에 참석하지 못했다면 성령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성령의 강림 체험과 은혜를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은혜를 사모하면서 우리는 은혜를 받을 때까지 계속 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도 응답받을 때까지 해야 하지만, 은혜도 받을 때까지 계속해야 구해야 합니다. 설교도 끝까지 들어야 합니다. 예배도 끝까지 드려야 합니다. 축도할 때까지 있어야 합니다. 절대로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복 

오늘 본문에 보면 은혜를 받기 위하여 “담대하게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3:12말씀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렇습니다. 은혜를 귀하게 여겨 반드시 받기 위해서는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과감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반드시 사단이 미혹할 것입니다. 어떻게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환경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핑계 아닌 핑계를 하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담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부모로부터, 시누이로부터 핍박을 받을까 두려워하거나, 아니면 남편으로부터 핍박을 받거나 싫은 소리 들을까봐 두려움이 갑자기 생길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를 두렵게 만드는 사단은 물러갈지어다’ 라고 명령하면서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똑 같은 예배시간이 아니라 이 시간은 ‘나를 위한 예배시간이었고,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우리 교회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매 시간 은혜 받을 기회를 조성하도록 마음자세를 바로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지어 모든 성도들이 ‘나를 위해 황목사님을 우리 교회에 보내주셨고, 우리에게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주심을 믿고 은혜를 사모하며,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함으로 더욱 큰 은혜를 체험하고 받은 증거가 넘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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