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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안에서 자유의 향연 (고후 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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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안에서 자유의 향연 (고후 3:12~18)


철학자 <헤겔>은 <인류 역사는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의 역사이며, 점차 자유가 확대되어 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견 이 말은 옳은 듯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인류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가로막는 장벽과 담장들이 너무도 높습니다. 지금도 휴전선은 북한 동포들에게는 너무도 높고 두꺼운 담장이 되어 자유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장벽 때문에 마땅히 이르러야 할 곳에 이르지 못하고,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장벽들 중에서 가장 높고, 두꺼운 장벽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처음에 에덴 동산에서 살았습니다. 에덴 동산은 낙원의 상징입니다. 에덴이 낙원인 이유는 경치가 아름답거나 먹을 것이 풍성해서가 아니라, 거기서 인간과 하나님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온 후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너무도 멀리 떨어졌고, 그 거리가 장벽이 되어 왔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하늘과 땅의 차이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도서 5장 2절은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간격입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 절대자이신 반면에 사람들은 죄인이다 보니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 몸이 굳고, 겁에 질립니다. 

그 모습을 이스라엘 백성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십계명과 율법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조차 두려워합니다. 출애굽기 20장 18절 이하를 보면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거리였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만 가면 얼어붙고,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얼어붙어도 하나님 앞에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일 때 장관들과 직원들은 대통령 앞에서 매우 조심했습니다. 말도 행동도 조심했습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었다고 합니다. 대통령 집무실에서도 뛰고 떠들 수 있는 사람, 그는 다름 아닌 대통령의 어린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일지라도 아들은 그 앞에서 마음껏 놉니다. 이게 자유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자유와 기쁨을 누렸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마치 대통령의 아들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상황에서도 모세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갔고, 하나님과 함께 시내산에 머물렀습니다. 그 모습을 출애굽기 20장 21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 백성은 하나님이 두려워 멀리 있는데, 모세는 가까이 갔습니다. 

그러면 그 후엔 어떻게 되었을까요? 시내산에서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얼어붙은 것처럼, 겁에 질린 모습으로 있다가 내려왔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너무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내려왔습니다. 그 증거가 출애굽기 34장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하나님이 빛이시므로, 빛이신 하나님과 함께 있던 모세의 얼굴에서도 광채가 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번에는 백성들이 모세까지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도 가까이 오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이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려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보십시오. 여기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얼어붙지 않고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처럼 행복합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자유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서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는 품꾼과 아들의 차이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방탕하여 다 날려버린 탕자가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자 집에 돌아옵니다. 돌아오면서 무슨 생각을 합니까? <우리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품꾼들은 얼마나 배부르게 먹는가? 그런데 난 여기서 굶어죽겠구나. 돌아가자. 돌아가서 나를 품꾼으로 써 달라고 애원하자. 아들로 받아달라고 말할 자격은 없어. 그러나 품꾼 정도는 써 주시지 않겠는가?> 

여러분, 여기 두 종류의 신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품꾼이요, 하나는 아들입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품꾼은 언제나 주인 앞에서 긴장합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다릅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핏줄로,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들은 품꾼이 상상도 못할 자유를 누립니다. 

이 아들과 품꾼의 이야기를 모세에게 적용한다면, 모세는 하나님의 아들 같은 존재였고, 백성들은 품꾼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들처럼 사시겠습니까? 품꾼처럼 사시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게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자식일지라도 아버지 앞에서 얼어붙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까? 언제일까요? 그것은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을 때입니다. 죄를 지으면 자유롭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통을 느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더러운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두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장이라도 벌을 내리실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친구와 함께 우산을 쓰고 가다가 친구가 벼락에 죽는 모습을 본 후 더욱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오랏줄에 묶인 죄수처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나중까지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시편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등의 말씀을 연구하다가 빛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힘으로 완전하게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 안에 하나님 당신의 의를 담아 은혜로 주셨고, 우리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죄가 용서되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씻음을 받고 의인으로 인정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신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루터를 죄인이라고 하지 않으시는데, 루터 자신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겨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날아갈 것처럼 기뻤습니다. 드디어 하나님 앞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아직도 이 축복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사랑과 은혜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는가를 모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를 기록할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한 가지 율법을 지키는 순간, 이미 그들은 다른 율법을 어기고 있음을 몰랐습니다. 또 사람이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미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는 존재임을 몰랐습니다. 이미 깊은 죄성이 영혼에 침투해 있음을 몰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하나님만 생각하면 두려웠습니다. 

이들은 마치 하나님도 두려워하고, 얼굴에 빛이 나던 모세까지 두려워한 이스라엘 백성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아직 수건을 벗은 얼굴, 즉 기쁨과 자유와 축복으로 빛나는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문 14-1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즉 그들은 당시에도 구약성경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그 율법을 지키려는 강박관념과, 그 율법을 지키지 못했으므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이 모든 강박관념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죄를 용서받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아빠!>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의 품에 달려가 안깁니다. 그리고 그 품에서 자유를 누립니다. 마냥 기쁘고 기쁩니다.

여러분, 모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모세와 같은 은혜를 받았다면 그들의 얼굴에서도 빛이 났을 것이고, 모세도 얼굴에 수건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세와 같은 은혜를 받으면 이제 수건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 14절 끝을 보면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했고, 16절을 보면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했습니다. 수건이 벗겨지면 이제 서로 빛나는 얼굴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얼어붙는 게 아니라, 춤추며 기뻐하게 됩니다. 이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길 기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로 하여금 이런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 분이 누구일까요? 그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본문 17절을 보세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할렐루야!

어떻게 주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까? 그것은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회개하게 합니다. 십자가 앞에 엎드리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죄로부터 해방되게 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빠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만드는 분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양자, 양녀로 만드십니다. 

로마서 8장 14절 이하를 보세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성도 여러분, 성령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후편, 즉 사도행전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자유가 여러분 안에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자유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살아가는 모습이 어떻게 다를까요? 어느 안식일의 예를 보십시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율법이란 밧줄에 묶인 죄수와 같이 살았습니다. 심지어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신 조항에 묶여서 안식일에는 선한 일도 하면 안 됩니다. 아픈 사람도 고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얼마나 기계적입니까? 그랬기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편 손이 마른 불쌍한 사람을 고치셨을 때 율법을 어겼다고 비판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그런 엉터리 조항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유하는 사람들은 마음껏 선한 일을 하고, 이웃을 돕고, 예배하고 찬송합니다. 주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날입니다. 

여러분, 자유인이 되십시오.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마십시오. 오직 한 분 주님께만 순종하십시오. 어려운 환경과 상황도 여러분을 결박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바울을 보세요. 그는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감옥에 갇혔을 때, 착고에 묶이고 옥안에 있었지만, 그는 밤중에 일어나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감옥의 담장이 그를 가둘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성령 안에서 어디서나 자유인이었습니다. 

이런 자유가 있으면 어디서나 행복합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도 행복합니다. 가난한 식탁이라도 감사가 있습니다. 허름한 옷을 걸친 이의 영혼에도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외적 조건 때문에 위축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어디서나 하늘나라를 맛봅니다. 궁궐이나 초막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됩니다. 그 어디서나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요즘 경제가 어렵습니다. 살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도 우리를 묶어둘 수 없을 줄 믿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힘들다고 느낄 때마다 언제든지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 품에 안기십시오. 그 사랑을 누리십시오. 

19세기 말, 러시아에 살던 유대인들은 심한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코사크 기병대가 유대인 마을을 습격하여 살육하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 죽음의 현장에 에머 래저러스(Emma Lazarus)란 소녀가 있었습니다. 소녀는 극적으로 탈출하여 미국 행 배에 올랐고, 뉴욕에서 신문기자와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던 중 1886년 뉴욕에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 여인은 이미 병중에 있었기 때문에 여신상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1883년에 지은 <새로운 거상>이란 시가 받침대 현판에 새겨졌습니다. 그 시의 일부는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을 초대하는 내용입니다. 

.....오랜 대지여, 너의 화려했던 과거를 간직하라!

그리고 조용한 입술로 울부짖는다
너의 지치고 가난한 
자유를 숨쉬기를 열망하는 무리들을,

너의 풍성한 해안가의 가련한 족속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폭풍우에 시달린, 고향 없는 자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황금의 문 곁에서 나의 램프를 들어올릴 터이니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는 우리를 자유로 초대하십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성령님 안에서 <자유의 향연>을 즐기는 것입니다. 자유하십시오. 죄와 사망과 사단으로부터 자유하십시오. 힘든 환경으로부터 자유하십시오. 밖으로부터의 들려오는 비판의 소리로부터 자유하십시오. 

여러분 내부로부터의 들려오는 <넌 못났다>는 절망적 소리들로부터 자유를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모든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평안하십시오. 그리고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 이런 축복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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