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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영원한 친구 (요 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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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영원한 친구 (요 15:12~17)


이 세상에 가장 먼 곳이 있습니다. 어디일까요? 우리 모두의 등 뒤입니다. 지구는 둥글기에 앞만 보고 나가면 떠났던 지점 뒤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고생한 후에 깨닫는 것은, 가장 먼 곳이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는 것입니다. 떠나기 전에 돌이켰다면 가장 먼 곳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논어 학이(學而) 편에 “친구가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하겠느냐?(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라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먼 곳에서 찾아오는 친구가 있습니까? 이런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해 기쁨을 누렸던 적이 있습니까? 혹 내가 그런 친구이었던 적은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려분! 
에덴의 동쪽에 사는 우리들에게 가장 먼 곳에서 찾아온 친구가 있습니다. 제 친구이지만 여러분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이 친구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속에서 친구의 모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친구는 돌이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인생에 가장 먼 곳이 있습니다. 장소뿐만 아니라 가장 먼 사람, 가장 먼 민족, 가장 먼 나라도 있습니다. 인간은 이를 “원수"라는 말로 사용해 왔습니다. 원수는 분노, 증오의 대상으로서 살인, 전쟁을 불사하게 만드는 대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에덴의 동쪽에 사는 오늘날 많은 크리스찬은 현실적 판단 때문에 말씀의 가치를 깨닫지 못한 채, 말씀을 받자마자 차갑고 어두운 땅에 묻어 버립니다. 어떤 변화도 생기지 않도록 내 삶에 멀리 떨어뜨려 놓습니다. 등을 돌려 버립니다.

하지만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신 예수님은 훗날 돌아와 말씀의 능력, 가치를 확인하려 하실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을 구별하여 심판하실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랑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사랑하려 한다면 사랑의 가치가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 믿는 자들의 몫입니다. 잘 살펴 보십시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돌이킴 없이 한쪽 방향만 고수하면 관계는 개선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고 하셨는데, 어른의 삶에서 어린이와 같이 돌이켜 낮아지는 것이 천국에 합당한 삶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 돌이킴, 방향 전환입니다. 

돌이켜 하늘에서 이 땅으로 온 하나님의 독생자, 그 친구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서 벗어나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돌이킨 것이 아님에도 기적을 체험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입니다. 값없는 선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체험 후 돌이켜진 삶을 살게 되었고 솔로몬 행각에서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다(행 3:36)" 증거 했습니다. 

이젠 우리도 돌이켜야 합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친구를 얻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먼저 친구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저 멀리서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 친구 때문에 우리는 등돌린 모둔 이들에게서 돌이켜 그들의 얼굴을 생생히 맞대야 합니다. 

예수님은 종을 돌이켜 친구로 삼으십니다. 이는 호칭만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과 인식의 변화를 뜻합니다.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되지만 종을 친구 삼은 까닭에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원한 친구 그 이름 예수를 의지하여 죽음에서 돌이켜 생명의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친구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계명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신 것과 맥을 같이 하는데, 받기만 하고 주지 않는 일방향 사랑이 아니라 쌍방향 사랑이기를, 고여 있어 못 먹을 썩은 물이 되지 않게 하고, 흘러 넘치는 생수가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구체적인 예를 드시며 사랑의 근본 속성이 자기 희생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8장 4절에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고 했는데, 요나단이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다윗을 사랑(삼상 20:17)했기 때문입니다. 왕자의 신분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이 요나단과 다윗 사이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잡으러 무리를 이끌고 와 거짓 입맞춤을 하는 제자 가룟 유다에게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 26:50)"고 조차 말씀하셨습니다. 배신자에게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말이 “친구”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수를 위해 기도해 보셨습니까? 혹 내게 원수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설마 그럴리가요? 스스로를 온전한 자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원수가 아닐지라도 기도하지 않는 대상이 훗날 원수가 될 수도 있음을 염려하십시오. 지금 내가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가 원수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음을 염려하십시오. 내가 성큼 다가설 수 없는 이가 원수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음음 염려하십시오. 

빌립보서 2장 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까닭은 예수님이 먼저 하나님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어 뜻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수뿐만 아니라 누구든 서로 사랑하기 위해선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이가 없음을 안타까이 여길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차가운 영혼의 소유자임을 안타까이 여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노력만으로, 의지만으로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끔찍한 고통 속에 녹아있는 그 한없는 사랑을 뼈저리게 느끼고 고백해야 합니다. 사랑은 단순히 수고가 아닌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사랑해야 할 대상을 찾아 나서시고, 희생을 감수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친구는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 말씀을 하시는데, 주제어 포도나무, 가지, 열매를 사랑, 친구, 열매로 바꾸어 부르고 계십니다. 말씀 안에 거하여 얻게 되는 사랑의 열매는 친구라는 가지를 통해 맺혀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매 맺힐 가지인 친구들을 찾아 택하셨습니다. 이전의 삶을 돌이켜 열매를 맺을 세리와 죄인들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 중에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원수와 같은 젤롯당 시몬과 세리 마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좌와 우를 아우르는 포용력을 보여주셨는데, 이는 이들 안에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심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먼저 천국의 기쁨을 맛보기 원하셨습니다.

혹 이 자리에 예배드리는 분 중에 누군가를 향하여 원망, 미움, 질투, 살인의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충동적이며 파괴적인 죽음의 역사가 일어길 원치 않으십니다. 긍휼히 여길만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길 하나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할뿐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잊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인물 중 하나님의 친구, 벗이라 불린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야고보서 2장 23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린 까닭은 소돔의 멸망 계획을 알리시면서까지 의인을 위해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의 모습 속에 확인됩니다. 하나님은 사래를 취한 아비멜렉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줄 알찌니라(창세기 20:7)”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아비멜렉에게 누이를 자기에게 넘긴 맘씨 좋은 오라버니가 아니라 선지자라고 소개하십니다. 아내를 두 번이나 다른 사람에게 넘긴 아브라함을 폄하하지 않고 치명적인 허물을 덮어주십니다. 소돔의 의인을 위해 기도하게 하셨던 것처럼 아비멜렉과 그에 속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십니다. 

로렌스 피터(lawrence peter)는 “누가 그대의 진정한 친구인지는, 그대 자신이 웃음거리가 될 때 드러난다. 진정한 친구는 그대의 실수를 영원한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믿지 않는 자와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용서 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허물은 정죄의 대상이 아니며,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되어 주시려 오신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날 대상일 뿐입니다.(벧후 2: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원한 친구 그 이름 예수로 인해 삶이 돌이켜지길 원합니다. 
풍성한 생명의 삶을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실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와도 친구가 되시기를, 
그리하여 사랑의 열매를 맺고 주 안에서 기뻐하실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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