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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르짖는 기도 (렘 20: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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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짖는 기도 (렘 20:14~18) 

(렘20:14-18)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로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하였더면,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미로 내 무덤이 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 그 배로 항상 부르게 하지 아니하신 연고로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 

1. 존 록펠러(John Rockefeller, 1839~1937)는 당대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광산업에 투자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은행에서 많은 돈을 빌렸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에게서 금광을 인수받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는 친구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금은 이미 모두 캐내가고, 찌꺼기만 조금 남아 있는 폐광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습니다. 금이 나와야지 은행에 빚을 갚을 수 있는데, 금이 나오질 않으니까 돈이 생기지를 않았습니다. 

은행에서는 계속해서 빛 독촉이 날아왔습니다. 또 광부들에게도 임금을 주지 못하니까 그들은 폭도처럼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록펠러는 결심하고서 광산 깊숙한 곳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돗자리를 깔고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다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리라. 그러나 지금은 더 깊이 파야할 때니라.” 

그는 이것이 기도의 응답으로 받은 말씀임을 믿었습니다. 물론 더 깊이 파보았자 금이 안나올 것은 뻔한 이치였습니다. 그러나 록펠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광부들을 독려하면서 더 파내려갔습니다. 한 삼일 정도 파내려 갔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검은 물줄기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유전이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록펠러는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창설하게 되고, 나중에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폐광처럼 앞뒤가 콱 막힌 밑바닥에서 부르짖는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밑바닥에서 부르짖는 성도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되어 미련한 자를 택하셔서 지혜롭게 하시고, 약한 자를 택하셔서 강하게 하시고, 천한 자들을 택하셔서 존귀하게 하시며,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2. 오늘 본문의 예레미야는 나라(유다) 멸망 직전, 약관 20세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렘1:5-6) 그는 결혼도 금지 당한 채로 자기 나라(남왕국 유다)가 멸망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나마 백성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오직 적군 바벨론에 항복해야만 한다는 예언, 참으로 백성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나라 민족의 파멸이라는 하나님의 심판과 한 줄기 희망도 가지지 못하게 하는 ‘항복하라’는 그의 메시지는 처음부터 강하고 거센 반발에 부딪쳤고 조롱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고향 사람들까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결국 궁중 감옥에, 시위대 뜰에 있는 구덩이에 갇히기를 거듭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왕을 비롯하여 여러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질그릇(오지병)을 깨뜨리며 “사람이 한번 깨뜨리면 다시 주워 붙일 수 없는 토기장이의 이 질그릇처럼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을 박살내겠다. 시체가 너무 많아 묻을 곳이 없으므로 이 곳 도벳 골짜기에 갖다 쌓을 것이다.”고 예언함으로 유다의 파멸이 돌이킬 수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렘19장) 

이를 듣고 있던 성전 질서 감독관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잡아 폭행하고 쇠고랑을 채워 감금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부름받았을 때 두려운 나머지 이렇게 사양합니다. “(렘1: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렘1:7-8)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하시든지 가감없이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박해와 핍박은 점점 가중되고 견디기 힘든 온갖 조롱과 멸시를 홀로 당해야만 했습니다. 쏟아지는 비난과 조롱, 날로 거세지는 반발과 핍박의 와중에서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결심도 해보았습니다. 핍박을 받는 상황에서 선지자가 가장 손쉽게 취할 수 있는 일은 그 일을 포기하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침묵하고 있자니 하나님의 말씀이 속에 타오르는 불길 같아서 뼛속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음을 토로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전하니 돌아오는 것은 엄청난 핍박과 조롱뿐이고, 전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자니 죽을 지경인 것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예레미야는 오늘 본문과 같이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스럽구나. 내 어머니가 나를 낳던 그 날이 복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야, 아들! 자네에게 아들이 생겼어!' 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스럽구나. 그 사람이 여호와께서 사정없이 무너뜨린 성처럼 되었더라면, 그가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를, 낮에는 전쟁의 함성을 들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째서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않았는가?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죽었더라면, 그것이 나의 무덤이 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무엇 때문에 태에서 나와 이런 고생과 슬픔을 겪으며 수치 가운데서 나날을 보내는가? 

한 마디로 자신의 삶을 통째로 저주하는 것입니다. 전심전력을 다해 하나님의 일을 행했는데 너무도 힘들고 괴로워서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는 것입니다. 나라 민족의 구원을 위해 뜨거운 눈물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전했는데 그들의 회개는커녕 돌아오는 것은 핍박과 조롱, 비난뿐이어서 통탄해 하는 것입니다. 왜 자기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이러한 치욕 속에서 고통과 슬픔의 나날을 보내게 하시느냐고 하나님께 따지는 것입니다. 졸지에 당한 극심한 환난과 친구들의 매정한 공박에 시달린 욥도 이와 비슷한 탄식을 호소합니다. 

(욥3:3-11)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예레미야는 자기 부모를 저주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저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렘1: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부정하는 것으로 출생하기 전에 그를 부르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예레미야나 욥과 같은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처음부터 곧바로 감사와 찬양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38-39을 보겠습니다.

(마26:38-39)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를 히브리서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고 표현했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인류구원이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지만 감당하기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호소입니다. 그래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처절하고 절통한 부르짖음은 십자가 위에서 쏟아내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절규입니다. 참으로 고통과 절망에 사로잡힌 자의 절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절로 터져 나오는 통곡과 눈물을 금할 길 없습니다. 예레미야처럼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스럽구나”며 탄식하거나, 욥처럼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라고 울부짖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탄식과 절규는 사실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며 원망이라 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엡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그의 불같은 사랑을 확실하게 믿기 때문에, 그러나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 그 아픔을 하나님께 그렇게 호소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께 토로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이와 비슷한 경우에 처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감당키 어려운 고통을 당할 때 무턱대고 처음부터 억지로 감사와 기쁨의 태도를 보이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도 인간이신지라 십자가의 고통 앞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절규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나 하나님의 처사에 대한 원망불평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의 고통스러운 절규이기 때문에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은 사랑으로 용납하시고 은혜로 감당케 하시는 것입니다. 

욥은 이러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욥1:21)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가 ‘그래도 믿음을 굳게 지키겠습니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을 때 “(욥2:10)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라는 아내로 인해 범죄치 아니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과 예레미야의 생일 저주를 허용하실 만큼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통렬하게 부르짖는 외마디 비명을 용납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불신에서 나오는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탐하기 위해 각 지파의 대표 12명을 보냈습니다. 이들이 가져온 정탐 보고는 둘로 나뉘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군들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민13:27-33)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이렇게 가나안 땅을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악평하며 스스로를 형편없는 메뚜기로 여겼습니다. 이들 10명의 이러한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보고에 온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밤새 이렇게 통곡합니다.

(민14:1-3)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불평은 한 마디로 말해서 출애굽 자체가 잘못 되었다는 것, 출애굽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 안 믿고 잘 지내는 나를 왜 예수 믿게 해서 이렇게 어려운 일을 당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잘 지내는 자신들에게 하나님이 괜한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 지도자로 세운 모세를 축출하고 다른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합니다.

(민14: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제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세운 모세도, 하나님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출애굽을 위해 애굽 전역에 내린 장자 재앙, 홍해를 가르고 육지같이 건너하신 기적, 날마다 일용할 양식으로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의 기적,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오는 기적 등등을 체험했으면서 하나님을 부정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또한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느니 차라리 애굽에서 종노릇하면서 애굽의 신들을 섬기는 것이 더 낫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이러한 원망불평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했습니다.

(민14:12)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조리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 원망불평을 늘어놓았던 자들은 모두 광야에서 무려 40년을 유리하다가 약속의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열어 놓고 마음껏 울고 탄식하시기 바랍니다.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에 회개는커녕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온갖 위협과 핍박을 일삼는 지도자와 백성들로부터 폭행과 폭언을 당한 예레미야처럼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스럽구나”, 하루아침에 모든 삶이 잿더미로 변하여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욥처럼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라고 외마디 비명을 질러도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며 절규해도 됩니다. 


3. 예수께서 ‘즐거움’이라는 기분 좋은 이름을 가진 ‘나인’(Nein)이라는 성에 가셨습니다. 이 성은 현존하는 성으로 나사렛에서 남동쪽으로 약 7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곳을 가시다가 어느 과부의 독자 장례 행렬과 마주치셨습니다. 

당시 과부는 밑바닥 생활의 대명사였습니다. 비참할 정도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가운데 그래도 마지막 소망이었던 독자, 외아들마저 죽어버리는 바람에 참담한 절망에 빠졌습니다. 남편을 잃고 과부된 자로서 오직 아들 하나 의지하고 살았는데 그 아들이 죽었으니 눈에 눈물이 마르고 피눈물이 고일만큼 절망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길이 창창했던 젊은 아들이 죽고 말았으니 원통하고 절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외아들의 죽음은 과부의 푸른 꿈과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간 것이었습니다. 나인 성의 수많은 사람들도 운구행렬에 동참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실감에 통곡하는 그 과부를 위로했습니다. 

더군다나 남편이 없으니 다시 자녀를 생산할 희망도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바로 이러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 울지 말라’며 위로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사’라는 말의 헬라어(스플랑크니조마이) 원래 뜻은 ‘창자까지 뒤틀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과부의 슬픔을 목격한 예수께서는 속내장까지 뒤틀리는 듯한 비통함과 연민을 느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울지 말라’시며 가까이 가셔서 관에 손을 대시며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관에 손을 대셨다는 것은 과부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여기시고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이 단순히 동정과 위로에 그치지 않고, 슬픔을 기쁨으로, 통곡을 환희로, 좌절과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청년아, 일어나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생명과 부활이 되시는 예수 앞에 슬픔과 통곡, 좌절과 절망이 사라졌습니다. 슬픔에 잠긴 나인 성이 그 이름대로 ‘즐거움’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죽었던 과부의 독자가 관에서 일어나 앉아 사람들에게 ‘내가 살았다’고 말합니다. 운구행렬이 축제의 행렬로 바뀌었습니다. 잃어버린 과부의 꿈과 희망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 과부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 피눈물을 쏟고 마음이 갈기갈기 찢길 때 나의 상처를 싸매고 고치고 회생시킬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울어도 못하고 눈물 많이 흘려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참아도 못하고,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못하지만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밖에 없습니다.’(찬송가 343장) 

에스골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이 ‘너희가 살리라’는 한 마디 하나님 말씀으로 극히 큰 이스라엘의 군대가 되어 소생했습니다. 마른 뼈들같은 절망이 하나님 말씀으로 사라지고 생명과 소망으로 바뀌어진 것입니다.(에스겔37장)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땅 위에 말씀 한 마디로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비록 과부의 독자 장례 행렬같을지라도 예수께서 함께 하시면 축제의 행렬로 바뀌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한 젊고 싱싱한 아브라함이 아니라 고희(古稀)를 훌쩍 넘긴 75세의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석녀(石女)로 늙어가는 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축복하셨습니다. 메마른 광야에 샘물이 터지게 하듯 말라비틀어진 사라의 태를 소생케 하여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지혜서인 잠언 14:32에서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칠흑같은 밤에서도 밝아오는 아침을 볼 수 있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빈 배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베드로에게 말씀 한 마디로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채워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B.C. 622년경 유다의 요시야 왕은 나라 민족의 위기를 맞아 그 심각한 원인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신과 불순종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옷을 찢고 통곡하며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통곡을 들으시고 이렇게 응답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왕하22:19-20)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왕의 통곡이 나라 민족의 모든 재앙과 환난을 사라지게 하고 평안의 복을 가져온 것입니다. 자식이 없어 원통하고 분하며 한이 많았던 한나는 성전에 나가 하나님께 통곡하며 부르짖었더니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주셨고, 그 후 3남 2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삼상1:10-16) 

다윗은 자신의 눈물과 통곡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과 통곡이 기쁨과 승리, 축복으로 응답되는 것을 믿었습니다.(시56편) 

눈물과 통곡으로 씨를 가지고 나가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단을 거두어 돌아오리라고 확신했습니다. 마른 땅에 시냇물이 흐르듯이 다시 회복하게 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눈물로 씨를 뿌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시12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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