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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담대한 믿음 (행 4: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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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대한 믿음 (행 4:13~21)


1. 요즘의 경기불황을 반영하는 유행어들이 많이 있습니다. 

급한 마음에 아무데나 취직했다가 마음에 맞지 않아 퇴직하는 이십대 젊은이들을 ‘이퇴백’ 이라 하고, 삼십대 초반에도 명예퇴직을 피할 수 없다는 뜻으로 ‘삼초땡’ 이란 말이 나오고, 직장을 잃거나 월급이 깎인 직장인들은 연봉 많고, 아내에게 자상하며, 얼굴도 잘 생긴 ‘부친남’(부인 친구 남편)과 비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비행사’(비전을 품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우리는 주님이 주신 비전을 품고 하늘을 나는 사람들입니다. 미래에 대한 분명한 꿈을 갖고 하늘을 날기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도 예외없이 삶에 위기가 닥칩니다. 세계적인 금융위기에서 우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미래가 매우 불투명하고 불확실합니다. 불안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담대한 믿음만이 위기를 새로운 도전의 기회로 삼아 전화위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2. 예수님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초대 예루살렘 교회, 

이들이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대제사장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예루살렘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영역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회에서 왕따 당하고, 쫓겨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듯이, 신앙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위험에 처할 수 밖에 없는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 하반신 마비가 된 장애인을 고쳐주는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게 되었고, 남자만 5천명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니,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였던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인지라, 그의 제자들인 베드로와 요한을 죽이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다음날, 옥에 갇힌 베드로와 요한을 끌어내어 재판을 열었습니다. 손발이 묶인채로 죄수복을 입고 끌려 나온 베드로와 요한에게 심문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로,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합니다. “너희들이 못 박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느니라. 예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느니라.”

자기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대제사장을 비롯한 대법관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이 정도의 말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말입니다. 


3. 베드로는 원래 그런 용감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고 감람산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릴 것이다.” 그 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이렇던 베드로가 몇 시간이 지난 후 하찮은 대제사장의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것입니다. 막상 죽음의 공포가 닥치면 꼬리를 내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했던 베드로가 어떻게하여 자기를 죽이려고 모인 재판관들 앞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 예수 이름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 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잡혀갔을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 그 이후 병자를 고쳤다는 이유로 권력자들에 의해 감옥에 갇혀 있는 베드로, 이 둘 사이의 기간은 두 달 남짓 됩니다. 이 짧은 기간에 베드로는 180도 달라졌습니다.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죽음 앞에 벌벌 떨던 베드로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맞서는 베드로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봅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살고 예수님을 위하여 죽겠다고 다짐합니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이렇게 찬양하면서도 주님을 위하여 뭔가를 하라고 하면 시간이 없다고, 돈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복음 전하는 것을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인 줄 잘 알면서도 전도해도 사람들이 안 믿는다고, 전도하기 어렵다고 핑계대고 하지 않습니다. 
용기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합니다. 자신감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시기 전의 베드로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 나약한 사람들입니다. 
말로는 큰 소리쳐도, 실제 상황에서는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런 저와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로는 세상을 다 정복할 것 같고, 말로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말로는 믿음으로 산다고 하여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한 연약한 우리들,
오늘 말씀은 이런 우리들이 예루살렘 감옥에 갇힌 베드로처럼 담대한 믿음을 갖도록 해주고, 연약한 우리를 새롭게 세워주기 위한 말씀입니다. 


4. 그러면,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한 믿음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담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이 말씀을 따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늘로 보내드린 후,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집중하였습니다. 

열흘 째 되던 날, 갑자기 성령께서 불같이, 바람같이 모인 사람들 가운데 강림하셨습니다. 모두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예루살렘 광장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3천명이 회개하고 예수 믿었습니다. 두 달 전만 하여도, 잡혀 죽을까 두려움에 떨었던 제자들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그들은 이제 담대해졌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죽였던 그 권력자들 앞에서 설교합니다. 대제사장과 권력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그 이름 예수, 그 이름 예수를 들먹이면서 설교합니다. “예수 이름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 

객관적인 환경은 주눅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죽이려고 모인 살기등등한 재판관들 앞에서 말입니다. 누구 앞이라고 감히 예수를 전합니까?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 이름이 오늘 이 병든 사람을 낫게 하였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항상 뭔가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셋 중 하나의 지배를 받습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든지, 자아의 지배를 받든지, 성령의 지배를 받든지 셋 중 하나입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좋은 환경에서는 기뻐하지만, 열악한 환경에서는 분노하고, 주눅이 들고, 기가 꺾입니다. 

이보다 나은 사람은 자아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과 지혜, 경험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려운 환경에 처하면,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강한 의지로 문제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풀 수 없는 문제가 많습니다. 인간의 경험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자신의 의지로 환경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의지의 한계에 봉착하게 되면, 두 손들고 맙니다. 

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한이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능력은 불가능이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면,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주눅들지 않습니다. 담대해집니다. 성령 하나님은 환경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힐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잔잔해졌습니다. 

성령님은 자연환경, 기업환경, 정치적 환경, 인간관계의 환경을 바꾸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이 성령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성령의 손 안에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건, 사고, 문제들은 성령 하나님 안에서 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담대해집니다. 
성령충만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담대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5. 성령충만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19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은 지금 자기들을 심문하는 대법관들 앞에 서 있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인식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으며,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심을 확실히 믿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조사해보았더니, 성경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 365회 나온다고 합니다. 일년 365일 내내 두려워할 일이 생깁니다. 일년 내내 두려워하지 말라고 365번 나온 것이라고 말하는 분도 계십니다. 

40년 광야생활동안 불기둥으로,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하나님, 메마른 광야에서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을 주셨고, 적군의 공격을 막아주신 하나님은 오늘도 광야같이 메마른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결코 주리지 않습니다. 결코 패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십니다. 


6. 성령충만한 사람은 신앙의 체험이 많기 때문에 더욱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20절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베드로와 요한은 보고 들은 것이 많았습니다. 체험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의 사건이지 제자들의 자신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충만을 받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평생 하반신 마비로 살아온 장애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쳐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그들 안에서 역사함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자기들 안에서도 일어난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이제 자기들 사건으로 경험된 이상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해졌습니다. 
그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저는 서울의 달동네에서 10년동안 빈민들과 함께 살면서 가난해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돈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보세요. 제 아내가 그 증거입니다. 저는 신학교 가기 전에 중고등학교 교사로서 5년간 일했습니다. 제가 번 돈은 일부 용돈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모님께 드렸습니다. 부모님은 그 돈으로 저의 형님 사법고시 공부하는데 쓰고, 미국에서 공부하는 둘째 형님 생활비 일부를 지원하셨습니다. 제가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저같이 못생긴 남자, 키도 작고 얼굴도 야위었고 두꺼운 안경을 낀 남자, 게다가 돈도 없는 남자가 뭐 그리 좋다고 저와 결혼할 마음을 가졌는지 저는 아직도 몰라요. 돈 없어도 저렇게 좋은 아가씨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와 아내, 그리도 아들, 세 식구는 돈이 없다보니까 서울의 삼양동 달동네에 전세 200만원짜리 단칸방에서 살았습니다.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저희 가정에 풍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돈 없어도 공부할 수 있다, 돈 없어도 장가 잘 갈 수 있다, 돈 없어도 건축할 수 있다, 돈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앙, 담대한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담대한 믿음, 이것은 성령충만한데서 나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담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기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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