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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능력 (막 5: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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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능력 (막 5:25~34)


저는 솔직히 말하면 담력이 좀 부족한 사람입니다.   어린이 공원이나 놀이동산에서 가서 손자를 데리고 회전비행기를 타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얼마나 흔들거리고 빠르게 돌아가는지 기분이 그렇게 썩 좋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신나게 타는데, 저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두 번 타라고 하면 타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전에 한번 바이킹이라는 배를 타고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하는데, 꼭 쏟아져 내리는 것 같고, 속이 울렁거리는데, 다시는 타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젊은이들 가운데, 번지점프 하는 사람을 보면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높은 데 올라가 발목에 줄을 묶고, 거의 밑바닥이 닿을 때까지 자유 낙하합니다. 자유낙하라는 말은 사실 고상한 말이지, 그냥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 밑바닥이 땅인 경우도 있고, 강물인 경우도 있습니다.  밑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에 밧줄이 그의 몸을 채면서 부딪쳐 다치지 않게 해줍니다.  수십 미터 높은 곳에 올라가서 줄 하나만 의지하고 고공 낙하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믿음이 크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래서 믿음을 번지점프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말씀을 마음속에 품고 말씀의 줄에 묶여서 번지 점프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벼랑 끝에 섭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합니다. 높이 올라가니 바람이 차갑습니다. 그런데 생명줄이 자기를 묶고 있기에 줄 하나만 믿고 자기 몸을 아래로 던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믿음이 좋습니까?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있다고 칭찬받은 사람들이 있으며, 반대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책망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칭찬받을 믿음입니까?  책망받을 믿음입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는 호되게 책망하시면서 믿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올 때에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면서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고, 예수님은 배에서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다급해진 제자들이 주님을 깨우면서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하였을 때에 주님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시고는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나면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들린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려왔을 때에 그들 제자들은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 변화산에 내려오신 주님이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믿음이 크다고 칭찬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8장에 나오는 백부장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8:10)라고 하셨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 갖은 수모를 무릅쓰고 간구한 여인에게는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15:28)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오늘 본문의 12년을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12년 간 혈루증을 앓아 고생하던 여인이 고침 받은 사건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사건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갈릴리바다 건너편에서 본 동리로 돌아오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에 모여서 환영하였습니다.  

그 때에 회당장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회당장이라고 하면 한 동리의 회당을 관리하면서 예배를 인도하고, 학생들을 교육하는 사람으로 온 마을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12살쯤 되는 외동딸이 있었는데, 무슨 병인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회당장이라고 하면 유대교회의 한 지도자로 예수님을 가까이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을 사람이었지만, 회당장 야이로는 죽어가는 딸아이를 살릴 수 있는 오직 하나는 예수님을 인정하고 예수님에게 문제를 가지고 부탁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요, 곧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니 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에게로 나가서 살려달라고 간구하는 길 뿐이 없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려 간곡히 구하기를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부디 저희 집에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주시고 살려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셔서 어린 딸에게 손을 얹어 기도하시기만 하면 나을 줄로 믿었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만 오시고, 예수님이 어린 딸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시면 고침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회당장이 간청하는 것을 보면 구체적이고,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말을 듣고, 즉시 그의 집을 향하여 가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데가볼리 지방에서 돌아오자마자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어린 소녀를 살리기 위하여 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간다는데 살리러 간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고 당기면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은 호기심에 따라가고 예수님에게 좀 더 가까이 나가기 위해 서로 밀치고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큰 무리 중에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였습니다. 옛날에 의학이 발달되지 않을 때였기에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습니다. 당시 혈루증이라고 하여도 만성하혈증으로 보입니다. 

혈루증은 성경의 정결법에 따라 부정한 병이었습니다.  피가 흐르는 동안에는 성전에 나갈 수 없었고,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 많은 제약이 따랐습니다. 이 여인이 12년간이나 고생하는 것으로 보아 사람의 방법으로는 치유될 수 없는 불치의 병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아주 많은 괴로움을 받고,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처참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긴병에 효자가 없습니다. 12년간이나 가진 재산을 다 허비하면서 병을 고쳐도 낫지 않으니, 그가 받은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가정생활도 엉망입니다. 한 여성으로 참으로 고역스러운 질병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의사인 저자 누가가 하는 말을 보면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라고 합니다.   이 여인은 어느 정도 부유하게 살던 사람으로 보여 집니다.  12년 동안 치료비를 지불하였다고 하니, 그 많던 재산을 다 허비하고 이제는 더 이상 치료비를 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질병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12년이라면 자연치유도 될 수 있었을 터인데, 병을 키운 사람입니다. 그동안의 치료하는 수고가 더 허사로 돌아가 버리고, 가진 모든 것을 다 허비하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절망 속에 살았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힘으로는 도무지 안 된다는 상황에 이르게 될 때에 비로소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이란 예수님에 관한 여러 이야기입니다. 믿음이란 들음에서 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겨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으로 능력이 많더라, 예수님에게 고침 받은 사람들이 많더라, 예수님은 사랑이 많으신데 어떤 사람도 거절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말을 듣다보니, 지금까지 자기를 치료하던 의사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방법이 아니라, 이것은 전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병자를 치료해주시는 일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소문만 들었습니다.  

혈루증이란 병은, 만성하혈증이란 병으로 종교적인 부정한 병이었습니다. 이런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는 사람도 부정하게 됩니다. 그런 부정한 사람이 앉아있던 자리에 모르고 앉았는데, 그 자리는 부정한 사람이 앉은 자리라고 알려주면 저녁까지 부정한 사람이 되어 옷을 빨아야 하고 목욕을 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도 저녁까지 부정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과 접촉을 금해야 했습니다. 피를 흘리는 여인이 피가 멎어도 일주일을 기다려보아 피를 흘리지 않을 때만이 정결한 사람으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제사장을 찾아가서 정결예식을 거행하고 정결케 하는 제사를 드려야 부정에서 벗어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정결법이 까다로운 것은 예전에는 병이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한 특별한 조치로 보여 집니다.   

여성이란 당시에 사람으로 제대로 대접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12년간 질병으로 고통 받고 보니, 사람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부정한 여자라는 낙인이 찍혀 공중 앞에 나설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에 여성이라는 제약, 부정한 여성이라는 종교적인 제약이 있었음에도 그는 질병에서 나아야 한다는 소망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소문을 듣고, 믿음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자기도 예수님 앞에 나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서로 밀치고 에워싸고 따라가는데,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자신의 질병은 낫기를 바랐습니다. 그녀는 예수님 앞에 설 필요도 없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소문에 듣기로는 나병환자를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사람을 살리게 가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자기의 질병쯤이야,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말씀드릴 것도 아니요, 손을 얹고 기도해달라고 하지 않아도, 다만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병이었습니다.  

28절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이 생각한 것을 보면, 참으로 믿음의 여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도 낫는다는 생각이 얼마나 좋은 믿음입니까?  

여러분, 믿음이란 말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습니까? 믿음이란 “믿는 마음, 신앙, 순종, 신뢰, 확고한 확실성, 성실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요즈음에는 ‘영성’이라는 말을 하지만, 사실 영성이란 말은 믿음을 달리 설명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담당하는” 말입니다.  롬1:17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 합 2:4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보아주시는 것도 믿음에 있습니다. 믿음을 말하면 믿음의 조상이신 아브라함을 말하게 됩니다. 창15:6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을 그의 의로움으로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이 너그럽고 양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본래적인 성품 때문에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믿으니, 그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만 믿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힘이요, 하나님만이 나의 길입니다.”라고 믿을 때에,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나는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나를 구원해줄 수 없습니다.  오직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나를 빼놓지 않고 구원하실 줄 믿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렇게 백기를 들고 나오는 사람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히11:6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겉 옷가를 만졌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겉옷 끝단에 옷술을 달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뒤로 와서 겨우 만져본 것이 예수님 겉옷의 옷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을 붙잡은 것도 아니요, 예수님의 허리를 만진 것도 아니요, 죄송하지만, 머릿결을 만진 것도 아니요, 다만 예수님의 겉옷 끝단인 옷술을 만진 것입니다.  

그 때에 여인은 병에서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에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29)고 하셨습니다. 그녀가 느낄 때에 아주 깨끗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피가 흘러내려 끈적거리고 거북하였는데, 흘러내리던 피까지 완전히 마르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우리 하나님이 낫게 하시면 완벽합니다. 혈루 근원이 마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녀의 신앙은 지금 생각해보면 미신적인 부분도 없지 않아 있어 보입니다. 병자를 고쳐줄 때면 예수님이 기도해주시든지, 아니면 예수님이 손을 들어 그의 머리에 안수하시든지, 예수님이 어떤 치유하시는 명령을 말씀하시든지 해야지,  여인이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술이나 만졌다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한 치유방법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자신의 상태를 말씀드린 것도 아니요, 나는 예수님이시라면 능히 고칠 수 있다는 신앙을 고백한 것도 아니요, 예수님이 여인의 말을 듣고 기쁘게 허락하였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저는 여기에 복음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서 설교제목을 “예수님의 능력을 빼앗아간 여인” 아니면 “예수님의 능력을 훔쳐간 여인”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었습니다. 빼앗아간다든지, 훔쳐간다든지 하는 표현이 너무 강하기에 “예수님의 능력을 가져간 여인”이라고 붙인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사람들이 빼앗는다고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능력은 한이 없고, 끝이 없고 인색함 없이 부어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속된 표현 같아 조심스럽지만, 훔쳐갈 수 있고, 빼앗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편에서 보면 한없이 주고 또 주고 싶고, 넘치도록 가져가기를 바라고, 빼앗아가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 사역을 힘 있게 하기 위하여 능력을 받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을 활용하며,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신앙생활하겠다, 자기 힘으로 무엇을 이루어보겠다고 하지 말고, 주님의 능력을 의지해야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며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대단히 합리적인 사람들입니다. 보는 대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밀치고 에워싸고 서로 먼저 예수님 가까이에 나오려고 하는 것을 둘러보면서 어이가 없는 듯이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행한 여인을 보려고 사람들을 둘러보십니다. 이때에 병에서 나음을 입은 여자는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예수님의 앞에 나와 엎드려 모든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병에서 나았음을 간증하는 길 뿐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주님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주님을 자랑하고, 주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이 하셨습니다. 주님의 것으로, 주님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3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 때문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유발한 믿음 때문에 구원받은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더 이상 부정한 사람이 아니라, 정결한 사람이요, 영적으로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선언하시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믿음이란 주님이 가지신 능력까지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기뻐하시는 뜻과는 상관없이 치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을 보시는 주님, 그런 믿음까지도 기뻐 받으시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의 모든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야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생각하고 경험적인 것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말씀에 의지하여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부정적인 말을 금하고 긍정적인 말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말 속에 성공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기대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에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믿음은 말씀에 의지하여 올인(All-In)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안에 더러움을 몰아내시는 능력이 되십니다.  잡다한 생각들, 허망한 생각을 몰아내고, 더러운 병균을 몰아내고 정결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능력을 가져다 사용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씀에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 제약이나 장애물을 뛰어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간증이 되고, 감사할 수 있는 믿음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주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신뢰하면서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믿음이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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