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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불어 사는 공동체 (롬 14: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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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공동체 (롬 14:13~19)


• 변연계가 무너진 현실

우리 사회는 사람들을 공부시키는 곳인가 봅니다. 몇 해 전에는 황우석 박사 덕분에 국민들이 ‘줄기세포’라는 말을 배우더니 요즘은, 강 모씨 덕분에 사이코패스(psychopath)라는 말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말을 몰라도 되는 세상이 좋은 세상일 터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이코패스란 반사회적 인격 장애의 극단적 케이스로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7명의 여성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도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자식들의 미래를 걱정합니다. 그는 일부 신문이 자기 얼굴을 공개하자 “얼굴이 공개돼서 내 자식들은 어떻게 살아가란 말이냐?” 항변하고, “범죄 과정을 담은 책을 내서 인세로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해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왕 시작한 이야기니까 조금만 더 공부를 해볼까요? 사이코패스들의 특징은 사람의 뇌에 있는 변연계(lymbic system, 邊緣系)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변연계는 또 해마와 편도체로 나누어지는 데, 해마(hippocampus)는 언어적 기억, 의식적 기억을 관장하는 곳이고, 편도체(amygdala)는 감정적 기억, 무의식적 기억으로 공포나 분노를 담당하는 곳이라 합니다. 해마에 손상을 입으면 기억에 장애가 생겨서 옛날 일은 잘 기억하지만 최근의 일은 기억을 못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편도체에 손상을 입으면 불안감이나 공포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편도체를 제거한 쥐는 고양이를 보아도 경직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이코패스의 경우 특히 편도체에 이상이 있는 사람으로서, 보통사람이라면 당연히 공포를 느끼게 될 광경을 보아도 불안감이나 공포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죄책감이나 동정심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전 인구의 약 1% 가량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시한폭탄과 같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을 제거해야 하나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느 나라가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하여, 사전에 예방 전쟁을 벌여 그들을 없애겠다는 강대국들의 국방정책이 정당하지 않은 것처럼, 위험성이 있다 하여 그들을 격리하거나 제거하는 것은 반인권적인 폭력일 뿐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회의 구성원 전체가 이들을 궁지에 몰아넣지 않고 보호함으로써 그들 속에 있는 수성(獸性)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길게 하는 까닭은 우리 사회가 어쩌면 ‘변연계’가 마비된 사회가 아닌가 염려스럽기 때문입니다. 돈이 모든 것을 규정하는 사회, 사람들이 저마다 극단적인 경쟁에 내몰리는 사회에서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돌보려는 마음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누군가 불행한 일을 당해도 내 일이 아니기에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그들의 존재를 불편하게 여깁니다. 건강한 사회란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목소리가 경청되고, 약자들의 살 권리를 보장해주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마음을 쓰는 곳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정반대의 방향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조종간을 쥐고 있는 것은 ‘맘몬’입니다. 

종교의 존재 이유는 우리 사회의 변연계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다른 이들의 기쁨을 함께 경축하고, 다른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마음을 우리의 심성 속에, 또 사회 구조 속에 끌어들이는 것이야말로 종교의 사회적 책임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말은 넘치지만 구원받은 자의 삶은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니, 교회가 오늘 사람들에게 돌팔매를 당하는 것은 어쩌면 사필귀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은 성경을 온몸으로 읽어야 할 때입니다. 

• 더불어 산다는 것

오늘 본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차이를 넘어 일치에 이르러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홀로는 살 수 없는지라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끼리 서로 기대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자기와 여러모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입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머리를 형형색색으로 염색하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어딘가 나사가 풀린 사람일 거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편견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살아가는 방식이 나와 다를 뿐입니다. 머리를 물들이고 다니는 사람 가운데도 멋진 사람들이 많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통합보다는 가름에 익숙합니다. 신자와 비신자, 어른과 아이, 적과 동지, 나와 타자, 선진국과 후진국, 흑과 백, 선과 악, 진보와 보수…. 이런 가름은 반드시 차별을 낳습니다. 차별은 나와 다른 진영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 대한 의구심이나 미움을 낳게 마련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상당한 혼란 가운데 있습니다. 좌파니 빨갱이니, 수구니 꼴통이니 하는 말을 사용하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배제와 증오의 대상으로 여기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말을 버려야 합니다. 

로마 교회 역시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계 기독교인들과, 율법에 매이지 않은 비유대계 기독교인들 사이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비근한 예로 교인들은 정결한 음식(kosher)과 부정한 음식을 가르는 율법 규정을 지켜야 하는가의 문제를 두고 팽팽한 힘겨루기를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음식 규정이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해도 율법이 부정하다고 규정한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에 밴 삶의 습속을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음식 규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지, 그릇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가려내고 구별해야 할 것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믿음이 얕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말합니다.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판하지 마십시오.”(롬14:3)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내 눈에는 차지 않아도 그 또한 주님께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동문서답하기 일쑤인 제자들의 못남을 탓하기 보다는 오래 참는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밤새도록 빈 그물질에 지친 제자들을 위해 디베랴 바닷가에 아침 식탁을 차리신 부활하신 주님의 그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 서로 선물 되기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믿음이 약한 형제자매들을 위해서는 자신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이 자유가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고전8:9, 13)

마지막 대목에 나오는 바울의 이 선언은 우리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그는 형제자매를 위해서라면 스스로의 자유를 기꺼이 제한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해서도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은 나의 이익과 나의 편익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서 새롭게 빚어진 사람은 ‘그’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제한하겠다고 말합니다. 우정과 환대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끝없이 외치는 이 시대의 예언자 이반 일리치는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지 못하면 나는 온전한 인간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이 결국은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공동체라고 부르길 좋아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입니다. 사실 공동체를 뜻하는 영어 단어 ‘community’는 서로(com) 선물(munus)을 나누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물질적인 선물만이 선물이 아닙니다. 존재 자체가 선물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공동체를 굳게 세웁니다. 탓하고 불퉁거리고 잘잘못을 가리는 것을 자기의 역사적 사명으로 여기는 사람은 어쩌면 공동체의 기초를 허무는 여우인지도 모릅니다. 믿음이 연약한 형제자매를 위해 기꺼이 자기의 자유까지도 제한하겠다는 바울 사도의 말은 다음의 고백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9:19)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우리가 사람들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전면적으로 다시 돌아본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아버지’라는 고백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도 연결되지만, 우리의 이웃들과도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 이웃들은 우리에게 호의적인 사람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인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 그도 아끼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순간 너와 나를 갈라놓던 유형의 장벽과 무형의 장벽은 허물어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경륜에 눈을 뜬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고전12:13)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3:28)

• 촉매

이런 일치를 맛본 이들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억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시장과 기업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을 돌봄과 배려의 세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들은 돈의 지배를 단호히 거절합니다. 옛 사람은 “얻기 힘든 보화가 사람의 행실을 나쁘게 만든다(難得之貨 令人行妨)” 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용산에서 철거민 참사가 벌어진 것도 결국은 돈 때문입니다. 돈이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나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너라는 걸림돌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세상을 전쟁터로 만들고 있습니다. 용산의 참사는 돈을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사회가 당도할 수밖에 없는 미래상의 축약판입니다. 돈으로 맛볼 수 있는 행복은 불완전합니다. 그곳에는 박탈당한 이들의 한숨과 질시가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라는 바울 사도의 말은 경험적 진실입니다. 나는 ‘누리다’라는 단어를 참 좋아합니다. 그 사전적인 의미는 “[기쁨이나 즐거움 따위를] 마음껏 겪으면서 맛보다” 입니다. 세상의 어둠에만 골똘하다보면 의도 평강도 기쁨도 누릴 수 없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요즘 저는 마음이 울적해질 때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불평스런 마음에 사로잡힐 때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그 말을 거울삼아 삶을 돌아보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따뜻해집니다. 

군대에서 야간 경계 훈련을 받을 때 교관이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뭔가 의심스런 물체가 보일 때는 유심히 그곳만 보지 말고 다른 곳을 보다가 다시 그곳을 보라는 말이었습니다. 유심히 한 곳만 보면 마음에 있는 불안감이 커져서 그 대상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거나 구체적인 형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은 먼 빛의 눈길로 현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선을 바꾸면 현실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의를 감사히 여기는 사람, 마음이 고요해져 평화로운 사람, 내면에 기쁨을 품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사회의 변연계가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우리는 사랑과 평화와 기쁨의 촉매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가르고 나누는 일에 익숙한 세상이지만, 우리는 우정과 환대의 공간을 넓히라는 주님의 초대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있어 사람들의 거친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내면에 깃든 어둠이 밝음으로 전환될 수 있다면 우리는 잘살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삶의 축제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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