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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께 나아가는 공동체 (수 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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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아가는 공동체 (수 1:10~18) 


여러분, 요즘, 우리 모두가 힘든 기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다 어렵기도 하지만 특별히 우리나라 가운데서도 어려운 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작년에도 어려웠지만, 올 상반기에도 역시 어려움이 해소 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그런 예측을 우리가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가 좀 어려운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경제가 어려워짐에 따라 사람의 마음이 위축되고, 가정이 깨어지고, 여기 저기 파생되는 수많은 문제들이 지금 우리 사회를 어둡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가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과연 이 터널 속에 갇힐 것인가? 아니면 빠져나오긴 하겠지만, 어떤 것들이 우리를 기다릴까하는 두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한없는 용기와 기쁨을 줍니다. 우리 주위에 그러한 승리의 소식만 들려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우리가 알듯이 우리의 삶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종종 많은 경우에 교회 안에서 소위 믿음의 사람조차 고난이 올 때 그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불평하고 낙담하는 것을 봅니다. “거룩한 삶의 부르심이라는 책”에서 윌리암 로우는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들어보세요.

“우리의 믿음에 반하는 많은 행위들 가운데서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믿음에 가장 반대되는 것이다.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것을 진실로 믿는 자는 현재 부족한 무엇 때문에 결코 불평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신 안에 불평과 불만이 있다는 것은 당신이 연약하거나 당신이 처한 환경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이 올 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불평과 원망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것을 윌리엄 로우는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질은 고난에 대한 반응에 나타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 믿음이 참 되나, 내 믿음이 얼마나 확고하냐, 내 믿음이 얼마나 분명한가 하는 것은 평탄할 때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난에 대한 반응에서 비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과 원망은 무엇입니까? 내 환경이 어려워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어떻게 불평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속에 불평이 있다면, 마음속에 원망이 있다면, 환경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 어려운 시기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모두가 힘들어하는 한 복판에서 믿음으로 일어나는 여호수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자기 앞에 가나안 땅이 보이지만, 그곳을 정복한다는 것은 너무 벅찬 일입니다. 차라리 2인자로 모세를 따랐으면, 모르겠지만, 모세는 죽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백성들은 능력 있는 모세가 인도할 때도 불평하고 원망하며, 조금의 틈만 있으면 반역하고 지도자를 때려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백성들을 이끌었다가는 하루도 못 가서 맞아죽을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자기가 해야 될 일을 보니까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당장 요단강을 건너야 하고, 건너자마자 여리고성을 정복해야 합니다.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자기 능력으로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여호수아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은 ‘여호수아야, 두려워 말라. 담대하라. 내가 내 종 모세에게 주었던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지켜 행하면 네 삶이 형통하고 어디를 가든지 승리하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았을 때 더 이상 주저앉거나 백성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는 일어납니다. 이 여호수아를 보면 ‘일어난다’는 말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모두 18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주저앉아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일어섭니다. 그리고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몇 가지를 준비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무조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보면 두 가지를 준비하는 것을 보게 되됩니다.

첫째는, 11절에 “양식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무작정 가지 말고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준비한다'는 것은, 마치 농부가 씨를... 밭에 뿌리는 일과도 같습니다. 열매를 기대한다면, 먼저 씨를 뿌려야 합니다. 씨를 뿌리지도 않고 가을만 되기만을 고대하고 열매를 기대한다면, 감나무 아래 누워서 입안으로 감이 '뚝'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사람과도 같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씨를 뿌리며 준비하는 자입니다. 또한 풍성한 열매를 바라보며, 물을 주고 가꾸는 사람입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는 일이 쉬운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실과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안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때를 놓치고 열매를 수확할 수가 없습니다. 씨 뿌리고 가꾸는 일이 바로, 준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여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인 김연아 선수가 우승을 할 때 내가 단지 한국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기뻐 한 것보다도 어린 선수가 그 큰 무대에서 아무 동요 없이 자신이 준비한 기술을 얼음판에서 남김없이 펼쳤다는데 가슴이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불과 몇 당 전에 우승을 놓쳤을 때 그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묻어나 있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우승을 거머쥐니 얼마나 대견스럽습니까? 

그런데 제가 더욱 감동을 받았던 것은 김 선수가 어릴 적부터 어떻게 연습해 왔는가를 소개해 주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빙상에서 수없이 넘어지는 장면과 코치가 어깨에 매달아 준 끈을 의지해서 반복해서 훈련하는 장면이 제 눈시울을 뜨겁게 했습니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다름 아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속해 온 혹독한 훈련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김연아 선수는 7살에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했습니다. 올해 들어 19살이 되었습니다. 김선수는 자신의 분야에 집중해서 실력을 갈고 닦음으로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물론 김선수에게는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될 수 있는 천부적인 자질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선수가 천부적 자질만 가지고 세계적인 인물이 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수많은 시간 동안 뼈를 깎는 반복적인 훈련과 준비를 통해 인물이 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요단을 건너야 하는 것입니다. 11절에 “삼일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요단이라는 장애물을 건너야 그 땅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40년 광야에서 방하???하던 끝에 이제 불과 3일 안에 그토록 갈망하던 가나안에 들어 갈 수가 있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가 충격일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정말 한 순간에 기대감과 흥분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에겐 장애물이 있습니다. 겨우 민심을 수습했지만, 저 요단을 건넌다는 것은 정말 버겁기만 합니다. 그리고 설령 넘었다고 하더래도 그들에겐 여리고성이 버티고 있습니다. 이 장애물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길에는 장애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장애물은 지치게 만들고 때로는 그 앞에 주저앉게 합니다. 우리 중에도 지금 삶의 어떤 희망을 가지고 가다가 장애물 앞에 주저앉아서 가만히 계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고자 했는데 건강에 이상이 옵니다. ‘이번 일만 잘 되면 새로운 인생을 출발할 거야.’ 하는 마음으로 어떤 일을 진행하다가 상황이 더 악화되기도 합니다. 이제는 방황하지 않고 잘 살아야 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더 큰 방황의 여건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합니까? 인생의 거침돌 앞에 중단하고 멈추어 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장애물을 디딤돌로 사용하여 나가는 것이 바로 믿음의 역사가 아닙니까? 지금 여호수아는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함께 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있고, 무엇보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을 설득을 합니다. 12-13절입니다. “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여러분! 이 세 지파는 요즈음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에서 가장 용맹한 사람들을 뽑을 때 항상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지파들입니다. 르우벤 지파: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첫째 아들의 집안으로서 장자 집안이라는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선조인 르우벤을 본받아 침착하고, 정이 많으며, 책임감이 강한 맏형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가나안 정복 전쟁의 최선봉 부대에 포함된 것은 아마도 열두 지파의 맏형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침착하고 책임감이 강하여, 용맹한 갓이나 므낫세 집안의 병사들을 잘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갓 지파: 갓이라는 히브리 문자의 뜻은 ‘군대’입니다. 이 지파가 상징하는 것은 ‘군대가 진 치고 있는 천막’이었습니다. 그들은 원래 출중한 병사들이었습니다. 야곱이 열두 아들들에 대해 예언할 때, 갓에 대해서는 “군대의 습격을 받아도 무섭게 반격하여, 오히려 공격한 자들이 목숨을 구하고 도망갈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워낙 뛰어난 전사(戰士)들인 그들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나운 광야 부족들과 전투를 벌일 때도 항상 선두에서 싸움을 도맡아 하면서 숱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므낫세 지파: 이 지파도 타고난 용사들이 많은 집안으로서, 후에 기드온이나 입다같은 이스라엘의 전설적인 영웅들을 배출했습니다. 므낫세지파의 반만 최선봉 부대에 포함된 것은 그야말로 명성이 높은 무인(武人)의 가문인 므낫세 지파에는 뛰어난 전사들이 워낙 많아서 반만 차출해도 된다는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이들은 지난 날 광야에서 여러 사나운 부족들과의 싸움에서 최선봉에 서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습니다. 승리한 이스라엘군은 전과에 따라서 적에게서 빼앗은 가축을 분배했고, 전공이 이들 지파에게 가장 많은 가축들이 돌아갔습니다.

가축이 많아진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 난감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갑자기 많아진 가축들을 데리고 이동하는 것과 그 가축들을 충분히 먹일 푸른 초장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요단강 동편 땅을 이미 정복해 놓았던 이스라엘에 요단강을 건너기 전, 르우벤과 갓 지파는 광활하여 가축 먹이기에 적당한 그 땅에 그냥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자기들만 편하게 안주하려는 이기적인 것으로, 이스라엘 전체의 화합을 깨뜨릴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까? 실제로 다른 지파들도 주춤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들에게 피를 토하듯 외칩니다. 14-15절에 “너희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고 여호와께서 너희로 안식하게 하신 것같이 너희 형제도 안식하게 되며 그들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얻게 되거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 해돋는 편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지니라” 이 말은 “너희만 잘살려고 하지 말고 모든 백성이 다 잘살 수 있도록 도우라. 우리는 다 한 형제들이다”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형제가 전쟁 중에 있는데, 형제가 굶주리고 위험에 처해 있는데, 어찌 너희들만 편안히 있을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특권층은 많이 누리는 만큼 그에 따르는 의무를 감당해야 된다는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작년에 영국의 황태자가 이라크 전쟁에 최전방에서 전투 요원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뭐,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나 옥스퍼드 대학교에 가 보면, 나라에 전쟁이 났을 때 제일 먼저 전쟁터로 나가서 목숨을 바친 동문들의 사진이 많이 걸려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학교의 자랑이요, 가문의 자랑입니다. 평소에는 남보다 많은 것을 누리는 것 같아도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 가장 먼저 달려가 목숨을 던지는 불꽃같은 책임감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국의 귀족 문화가 오랜 세월 존속될 수 있었던 이유다. 특권만 주장하고 책임을 회피한다면 그는 이미 리더의 자격을 상실할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이런 설득 앞에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여기 17-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는 범사에 모세를 청종한 것같이 당신을 청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무릇 당신의 시키시는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는 자 그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

지금 이들은 여호수아의 이야기 앞에 두 가지 태도를 취합니다. 첫째는 순종입니다.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는 이러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순종의 학교에 입학한다.” 우리가 한평생 배워야 할 것은 순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순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면 홍해가 갈라지는 것 같은 기적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가면 요단강에 길이 생기는 것 같은 기적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지도자를 격려합니다. 18절 하반절에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격려입니다. 뭔가 좀 마음을 먹고 주의 사역에 힘을 쓰려고 하는데, 맥을 끊어 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을 잘하는 솜씨도 아니면서, 그렇게 멋지게 말을 하지는 않으면서도 큰 힘과 위로를 이웃에게 베푸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우리 주님의 공동체의 지체들은 입을 열 때마다 사람에게 용기와 격려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이 새 천년을 이끌고 갈 공동체의 일꾼들입니다. 낙심하도록 하는 것은 사탄의 주된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격려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녀를 격려하는 아버지입니까? 또 어머니들은 어떻습니까? 격려와 사랑이 없는 가정이 얼마나 살벌할까요? 못할 때 마다 징계하고, 잘 할 때만 상주는 딱딱하고 두려운 가정에서 격려와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라서도 열등감 속에서 삽니다. 비판과 분석을 10% 한다면 90%는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비효율적인 언어와 삶의 모습을 갖고 살아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의 격려가 없었더라면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주님 격려를 받고도 남을 격려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리석고 완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이들은 지도자 여호수아를 격려합니다. 미국 최고의 설교자인 척 스윈돌 목사가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어느날 한 성도가 예배를 마치고 참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말에 눈물을 흘리며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누군가 내게 그런 얘기를 해 준 지 정말 오래됐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런 유명한 설교자도 참으로 따뜻한 격려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비전을 주셨습니다. 이제 함께 주님이 핏값으로 세우신 교회의 동역자로서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러기가 갈매기 모양으로 긴 여행길을 날아가는 것은 멋있어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류학자들이 밝혀냈습니다. 갈매기 모양으로 날아갈 때 71%를 더 날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맨 앞에 날아가는 새가 뒤 따라오는 새가 받을 공기 저항을 줄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아가는 도중에, 앞장서 가는 기러기를 뒤따라가는 기러기들이 박자를 맞추어 ‘콩, 콩’하고 울어 댄다고 합니다. 자기들이 뒤에서 쳐지지 않고 잘 따라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그들만의 신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참 날다가 힘들면 앞서 가던 새와 자리를 바꿔 먼 여행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한 마리가 이상이라도 생기면, 다른 두 마리가 같이 내려와 있다가 다른 떼에 흡수되어 다시 날아갑니다. 격려하고 위로할 때 본래 역량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세워 주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여호수아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그를 통해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면, 그래서 우리 역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한 해의 출발을 제대로 한다면, 우리는 실패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한번도 밟아보지 않은 이 한해 개인은 물론, 교회가 함께 믿음으로 주님 주신 귀한 사명을 붙잡고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따를 것입니다. 

우리 이상의 삶을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 능력 이상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고 바라는 것 이상으로 한 해를 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적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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