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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듭난 새사람 (벧후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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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 새사람 (벧후 1:1~4)
 

파키스탄의 어느 시골에 큰 맷돌을 가는 소가 있었습니다. 맷돌 주위를 빙빙 돌면서 맷돌질을 하는데 가만히 보니 눈이 가려져 있어요. 주인에게 “왜 소의 눈을 가렸습니까?” 하니 “소가 매일 같은 곳을 도는 줄 알면 지쳐서 일을 하려 하질 않습니다. 눈을 가리면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계속 돌면서 맷돌질을 잘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사람도 때로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인생의 방향이 어디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마냥 달리기만 합니다. 노벨상수상자인 헤밍웨이는 “인생에는 목적이 없다. 인생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물을 필요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사람이 그렇게 말한 것은, 그가 똑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한 번밖에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영적 생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헤밍웨이를 만나셨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물과 성령으로 한 번 더 태어나야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당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한 번 더 태어나야 한다고 한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인간은 반드시 한 번 더 태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우리가 부모로부터 한 번 태어나 이 땅에 살다가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을 받아 영적으로 한 번 더 태어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사람이 한 번 더 태어나면 어떤 존재가 되는지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4절 끝에 보면, 하나님께서 거듭난 자에게 ‘신의 성품’(divine nature), 즉 하나님의 성품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즉 새로운 성품(new nature), 새로운 본질을 주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간의 본성, 즉 죄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요, 부모로부터 생명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이미 죄성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죄성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도 우리가 “본질적으로(by nature) 진노의 자녀들”이었다고 선언합니다(엡2:3).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 죄를 범하고 죄의식을 지니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썩어져 가는 이 세상의 습관을 따라 살다가 결국 몸도 마음도 영혼도 망가져 하나님 없이 영원히 죽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어린이를 하나하나 개인적으로 보면 아주 착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밖에 나가 또래들을 만나면 “여럿이 모였으니 동네를 위해 좋은 일을 하자!” 하지 않고 나쁜 생각을 하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멀쩡한 아이가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면 엉뚱한 짓을 합니다. 가게에서 슬그머니 물건을 훔쳐 나오다가 경비원에게 들켜서 집으로 연락이 옵니다. “당신 아이가 우리 가게에서 물건을 훔쳤으니, 아이를 데리러 오십시오!” 부모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지요. “아니, 내 아이가 얼마나 착한데 그런 일을 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 아이는 그럴 아이가 아닌데 친구를 잘못 만나서 그렇다고 생각하며 당황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를 돌이켜보면 착한 아이였어요. 어머니께서 바느질하실 때 항상 옆에서 도와드렸고, 학교에서는 우등생이고 말썽 한번 부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잘못한 것이 한 가지 생각납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새총으로 쐈습니다. 어떻게 제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친구랑 둘이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쐈는데, 그 사람이 얼마나 놀랐겠어요. 어디서 돌이 날아왔는지도 모르고 두리번거리며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재미있던지! 여러분, 제가 그런 짓을 한 아이처럼 보입니까? 그러면서도 주일에는 성경 들고 교회에 갔습니다. 만약 그 때 저희 부모님께서 아셨다면 “우리 상복이가 그런 짓을 하다니!”하고 통곡을 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그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어요. 

어린 아이가 누가 시켜서 그런 행동을 할까요? 부모님이 저에게 그런 짓을 하라고 시키신 적이 없습니다. 특히 제 어머니는 우리 입술에 좋지 않은 단어 하나라도 올라가면 용서치 않으셨어요. 그렇게 철저한 교육을 받았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한 번 더 태어나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죄인으로 살다 죄인으로 끝나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원한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은 점잖은 의사들 여섯 분이 모인 자리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라고 했더니, 한 분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이셔요. 잠시 후에 귀에서 연기가 막 피어오르더군요. 그래서 “교수님, 화가 나셨군요!”했더니 고개를 번쩍 들면서 “왜 날보고 죄인이라고 합니까? 내가 뭘 잘못했소?”라고 소리를 지르셨어요. 그래서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죄라는 말이 무슨 큰 악을 저질렀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하나님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며, 과녁을 향해 쏘기는 쏘는데 잘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분 얼굴이 점점 펴지기에 제가 농담을 했습니다. “박사님이 완벽한 사람인지 아닌지 교수님 부인에게 한 번 물어볼까요?” 했더니 “뭐 그런 걸!”하면서, 죄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정하고 수긍을 하시더군요. 감사하게도 그분이 예수를 믿어 좋은 신앙인이 됐고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 모교인 연세대학에 10억원을 기증했더군요.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왜? 새로운 성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면 우리 속에 하나님의 본질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가장 완벽하게 닮은 분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었던 예수님입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그 안에 있는 영생을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점점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안에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받아서 성장하면 점점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인간은 죄성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도바울도 절규하였습니다. “오호라 나는 비천한 사람이로다. 선을 행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고, 악을 피하고 싶은데 자꾸 나타나는구나. 도대체 나는 왜 이럴까? 내 속에 있는 죄성 때문이구나. 오, 나는 정말 피곤하고 비천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 나를 가만히 두면 결국 영원히 죽고말 텐데, 누가 여기서 나를 건져내랴!”(롬7:24-25). 그러나 이어서 그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8:1)고 선언합니다. 예수를 만났을 때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성품을 주십니다. 만지거나 사진을 찍을 수는 없어도, 죄를 고백하고 예수를 믿고 영접하면 영원한 하나님의 성품이 여러분 안에 나타나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 새로운 성품을 성장시켜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을 닮아가는 축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간이 거듭나면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이 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께서 우리를 새롭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이전의 모든 것이 다 없어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과거의 잘못된 것들이 새로워진다는 말입니다. 내 속의 욕망이 거룩한 욕망으로 바뀌고, 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했던 재능이 성령의 은사가 되어 하나님을 위해 사용됩니다. 내 것이던 재산은 하나님의 것으로 바뀌고, 성은 타락한 쾌락을 위해 사용되지 않고 성화되어 가정생활을 원만하게 만드는 행복의 요소가 됩니다. 창조적 에너지로 변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릴 때, 우리의 옛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것을 받아 새롭게 변화시켜 우리에게 돌려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는 육체가 우리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후 이 육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뜻이 달라졌습니다. 육체를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쓰게 됩니다. 어느 연세가 많으신 분이 평생 담배를 피우시다가 얼마 전에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설교를 듣고 당장 끊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도하고 하루 만에 끊었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속에 들어와 계신 줄 알게 되니 이렇게 변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거듭나면 속에 새로운 마음(new heart)이 생깁니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겔36:25-27). 

저도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거듭난 이후에도 한동안은 좋지 않은 것을 향한 예전의 경향이 남아있어서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달라지면서 힘들지 않게 되었고, 내가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새 마음’(new heart)을 주신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내 멋대로 살려는 돌처럼 굳은 마음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을 발견합니다. 여러분도 이런 체험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사십시다.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것이 쉬워집니다. 어렵지가 않습니다.

또한 거듭나면 새로운 관계(new relation)가 성립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예수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 (예수님과 1대 1의 관계를 맺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신 것처럼 예수님과 새로운 개인적 관계가 형성됩니다. 예수 믿기 전에 예수는 그저 유대인이고 기독교의 창시자일 뿐입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주일에 학교에 나오라고 하더군요. 저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서 “저는 주일에 교회에 가야 하기 때문에 학교에 못 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이 똑똑한 아이가 왜 이렇게 되었지?’하는 얼굴로 저를 불쌍하게 보시면서 “상복아, 너 그렇게 예수 믿으면 안 돼! 예수님은 옛날에 갈릴리의 목수였고 기독교의 창시자일 뿐이야. 학교에서 매 주일마다 나오라는 것도 아닌데, 예수 믿는다고 학교에 안 오면 안 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그 선생님이 얼마나 불쌍해 보였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그저 기독교의 창시자 정도로 밖에 모르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영원한 구원자가 됩니다. 내 일생의 모든 죄를 다 덮어주시고 내게 부활과 생명을 주시는 구주가 되십니다. 관계가 달라집니다. 새로운 관계가 됩니다. 

또한 거듭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습니다. ‘권세’는 권리를 의미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하셨다는 것입니다. 양자의 권리지요.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the children of God'으로 복수형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갑자기 수많은 형제자매가 생깁니다. 우리 교회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 세계의 23억 인구가 내 형제자매가 됩니다. 세상 어디를 가도 내 형제가 있고 자매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예수 믿지 않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믿는 친구들이 많아집니다. 새로운 관계들이 점점 늘어납니다. 신앙의 형제자매들은 만나면 금방 알아보고 서로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가 되고 믿는 사람들이 전부 내 형제가 되어 어느 나라 어디를 가도 외롭지 않습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는 참 외로웠습니다. 방학 때 큰 학교 건물에 혼자 있으면 ‘내가 왜 여기 와서 이렇게 사는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빵과 우유를 먹을 때는 밥 생각이 간절해지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주일에 미국 사람들의 교회에 갔더니 내가 잘 아는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찬양을 하고 설교를 하더군요. 그 때 ‘아, 내가 집에 왔구나. 여기도 내 형제, 내 친척들이 이렇게 많구나!’하고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새로운 관계가 형성됩니다. 여러분은 이 좋은 새로운 관계들을 많이 누리시기 바랍니다.

또한 거듭나면 새로운 통찰력(new insight)이 생깁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말씀은 거듭나면 하나님의 나라, 영적인 세계가 보인다고 말씀합니다. 기도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성경말씀이 좋아지고 깨닫게 됩니다. 설교가 들립니다. 기도를 할 때마다 “아멘!” 소리가 나옵니다. 왜? 느끼고 깨닫고 새로운 통찰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조금씩 깨달으면서 점점 발전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고난마저도 내게 유익이라. 내가 이 시련을 거치고 나면 정금과 같이 빛나리라”는 욥과 같은 고백이 됩니다. 고난 중에도 의미를 찾고 희망이 보이고 앞이 보입니다. 새로운 통찰력이 생깁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거듭나면 새로운 도덕적 경향(new ethical inclination)이 생깁니다. 예수를 만나서 새 생명을 얻으면 우리 속에서 이상하게 악이 점점 싫어집니다. 하나님과 선이 좋아집니다. 새로운 도덕적, 윤리적 성향이 생깁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엡4:23). 

형제자매들이 다 내 가족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하루아침에 달라지지는 않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신앙생활을 함에 따라,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점차 변해갑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며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8-29).

우리가 잘 아는 성 어거스틴은 젊었을 때 망나니짓을 하고 살았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았을 때 아이를 낳아, 그 이름을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뜻의 데오필러스(Theophilus)라고 지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를 믿은 후 어느 날 옛날에 알던 술집 여자가 길에서 그를 알아보고 왜 자기를 보러 오지 않느냐고 하자 “옛날 어거스틴은 죽었다. 나는 새 사람이 되었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새 사람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새로워져서 선과 악을 구별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며, 가정과 이웃과 직장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날마다 드높이며, 주님께서 주신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김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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