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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을 회복합시다. (삿 16:15~22, 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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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을 회복합시다. (삿 16:15~22, 28~30)


시골에 계시던 아버님이 서울에 올라오셨습니다. 그런데 올라오시고 보니 재미가 없었습니다. 친구도 없고 갈 곳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자식들은 다 바빠서 서울 시내 길을 안내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무료하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를 본 아들이 너무 안 되어서 “아버님! 오늘은 집에만 계시지 말고 제가 돈을 드릴 테니까 극장에 가서 극장구경 좀 하고 오세요.” 아버님이 극장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가신지 30분도 안 되어서 돌아오셨습니다. “아니! 아버님 무슨 극장을 이렇게 빨리 보고 오셨어요?” 그랬더니 “글쎄말이야. 서울사람들 다 똑똑한지 알았더니 어수룩한데도 있더구먼. 내가 여기저기 극장을 30분이나 돌아봤는데 글쎄 아무도 돈을 받지 않잖아. 그래서 돈도 안 내고 극장 구경을 잘 하고 왔다야.” 

뭔가 좀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극장 구경하고 오시라는 이야기는 영화를 보고 오란 이야기이지, 극장 건물만 보고 오시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 어찌 보면 우리의 신앙의 삶 속에서도 우리가 이런 비슷한 경우를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는 오는데 예배는 드리는데, 진정 만나야 할 분은 만나지 못하고, 진정 배우고 깨달아야할 진리는 깨닫지 못하고, 그냥 점심만 먹고 가신다면 이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있습니다. 요즘 병원에 가면 좋은 커피숍도 있고, 제과점도 있습니다. 병원에 몸이 아파 가신분이 커피나 한잔 먹고 돌아온다면, 자기 몸을 치료하지 않고 돌아온다면 그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배드릴 때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축복받는 것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본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날마다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가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고 예수님의 보혈로 내 죄가 씻음 받는 것, 우리는 그것을 의롭다 인정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의롭다 인정받은 후에는 우리가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성화의 삶이라고 합니다. 거룩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고 주안에서 어린 아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는 처음에는 죽을 먹고 미음을 먹지만, 나중에 장성해서는 딱딱한 음식도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 안에서, 예수 안에서 늘 자라가야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에만 계시면 안 됩니다.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거룩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보니 “내가 거룩한 것같이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레위기 19장 2절에 보니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구약의 많은 제사의 경우들은 대게 인간의 부정을 씻어내고, 죄를 씻어내고, 그들이 거룩을 경험할 수 있도록 그들의 죄의 더러움을 씻는 예식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집례 하는데 제사장들이 입는 옷을 에봇이라고 합니다. 그 에봇에는 방울이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안에 들어가서 움직이면 방울이 울립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를 어길 때가 있었습니다. 그가 손대면 안 될 곳을 손 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방울소리가 없어져버립니다. 바로 죽은 것입니다. 즉결심판으로 하나님 앞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밖의 사람들이 제사장의 발목과 손에 묶여 있는 끈으로 제사장을 끌어냅니다.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하나님의 거룩의 요구는 장난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이 거룩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잘못된 예배를 드리면 즉시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 거룩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A. W.토저라는 유명한 영성신학자가 계십니다. 이분이 쓰신 책 중에 <이것이 성공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아주 재밌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랜 세월 교회를 출석하지만 늘 영적성장에는 관심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예를 들면 그 그리스도인들은 초등학교 1학년 학생과 같다. 그래서 그들은 늘 초등학교 1학년에 머물기를 즐겨한다. 누군가가 2학년으로 올려주려면 그들은 전적으로 반대하고 거부한다.
  
그들은 1학년이 좋다는 것입니다. 1학년은 별로 복잡한 것이 없습니다. 재미있고 그저 신나고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거기에만 머물기 즐겨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가 와서 그들을 2학년으로 끌어올리려고 과제물을 내 주면 그들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답니다. “하나님! 저 목회자를 다른 교회로 보내주세요. 우리는 골치 아픈 것 싫습니다. 우리는 편안하고 재미있고 쉬운 것만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끝까지 1학년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와서 “당신들 1학년에 얼마 동안 계셨습니까?” “예! 12년째 1학년을 다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1학년 과정이 끝나면 시험을 치고 2학년으로 올라가야 하고, 2학년이 끝나면 3학년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1학년에만 머물려고 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머리 아프고 골치 아프게 왜 2학년에 올라갑니까? 1학년이 좋은데.” 여러분!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많다고 A. W.토저는 고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거룩을 향해서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거룩이란 무엇입니까? ‘카도쉬’, 혹은 ‘하기오쉬네’라고 원어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구별되다’, ‘성별되다’, ‘드리다’, 혹은 ‘깨끗하다’, 혹은 ‘순결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라는 말도 ‘분리된 사람들’, ‘구별된 사람들’, 그래서 우리를 성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쓰는 모든 기구들은 성구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구별된 기구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아니 하나님의 속성 자체가 거룩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 가운데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2절에 보니까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나를 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어야 합니다. ‘아! 저 분을 보니까 정말 하나님이 위대한 분이시구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할 때, 그것이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 증거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하나님께 욕을 돌리고, 하나님께 저주를 돌린다면 우리가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니까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요 거룩한 나라입니다. 왜 우리를 택해주셨을까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들은 정말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이 땅에서 거룩을 추구하며 거룩을 위해 기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프랑스혁명 때 이야기입니다. 혁명을 일으킨 분들이 왕족을 다 참해버렸습니다. 그런데 한 어린 왕족이 살아 있었습니다. 이 어린아이를 죽이려니까 너무 불쌍해서 차마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어린아이를 마귀할멈 같은 이 어린아이를 맡겼습니다. 그 마귀할멈은 아무데나 침을 뱉고, 몸도 더럽고 지저분하고, 욕도 함부로 하고, 상스런 말을 쓰고, 늘 싸우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거룩한 왕족도 이런 여인에게 맡겨서 길러지면 똑같이 닮아가지 않겠느냐 해서 그 아이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변하지 않습니다. 욕을 가르쳐도 욕을 배우지 않습니다. “내 몸에는 거룩한 왕족의 피가 흐르는데 나는 이 상스런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난 이 더러운 행실을 배울 수 없습니다.” 그는 비록 어리지만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거룩한 왕족이기에 이 더러운 말을 쓸 수가 없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 속에 거룩한 예수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혼탁하고 오염된 세태 속에서, 죄가 우리가 우리를 유혹할지라도, 유혹의 손길이 다가올지라도 여러분은 내 속에 예수의 피가 흐름을 아시고 죄와 유혹을 단호히 거부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태는 너무나 혼탁합니다. 우리가 며칠 전, 어제도 신문뉴스에 보니까 강호순씨가 그렇게 많은 여인들을 성폭행하고 죽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짐승처럼 전락해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성이 없습니다. 그저 본능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말합니다. “나도 나를 절제 할 수 없었다. 죽이고 싶은 욕망을 절제할 수 없었다.” 누가 그러는 것입니까? 우리 안에 있는 마귀가, 악한 영이 우리를 악의 길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이 세대에 거룩을 위해 기도하고 거룩을 추구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5절 이하에 보니까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삶을 살지만 이 땅의 삶이 끝나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심판의 날을 생각하면서 이 땅에서 우리의 행실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된다고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면에서 거룩할 수 있을까요? 먼저 개인의 삶이 거룩해야 합니다. 남이 보지 않더라도, 남이 알지 못하더라도 먼저 내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내 말과 언행이 경건해야 합니다. 십계명 중에 4계명이 무엇입니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입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거룩하게 지킬 수 있을까요? 정말 주일을 주일답게 온전히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진심과 정성을 다해 예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주일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예배를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거룩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말 한마디라도 조심해야 됩니다. 그 말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우리는 신중해야 합니다.

우스갯소리입니다만 아버지와 아들이 목욕탕에 오랜만에 같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뼈가 욱신거리고 허리통증도 있었는데 따뜻한 목욕탕에 들어가니 너무 좋았습니다. 아픈 진통이 사라지고 시원했습니다. 그래서 “아이고 시원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아빠! 뜨거워요?” “뜨겁긴 뭘 뜨거워. 시원하고 좋은데. 빨리 들어와.” 그랬더니 아들이 정말 시원한 줄 알고 풍덩 뛰어들었더니 얼마나 뜨거운지 “앗 뜨거워.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네.”라고 했답니다. 아버지도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부모와 자식 간에도 말 한마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신중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수군수군 대는 말, 비판하는 말, 부정적인 말, 헐뜯는 말, 멸시하는 말, 남의 약점 찾아내는 말, 결국 거룩한 언어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입술과 생각과 마음과 몸이 정결함과 거룩함을 유지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정에서도 우리는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신앙의 가정을 제공해야 합니다. 가정에 늘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소망이 있고, 기도가 있고, 찬양이 있는 그런 평화로운 가정을 제공해야 합니다. 냉장고문을 열면 그냥 술병으로 가득 차 있고, 창고를 열면 진짜 주님이 아니라 가짜 술 주님만 주욱 모셔놓고. 거기에 거룩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친척들이 모이면 밤 세워 도박판 벌리고, 화투를 쳐도 그냥 안칩니다. 점당 얼마씩 해서 돈 때문에 싸우고. 여러분! 그건 거룩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부부 간에도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부부간에도 성적으로 순결을 지킬 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내 아내와 내 남편을 오직 하나님이 내게 주신 배필로 사랑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 이하에 보니까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대표적인 타락이 무엇입니까? 마약, 동성애, 성적인 타락, 쾌락의 추구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 시대의 타락상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데 뭐. 요즘 남자친구 없는 여자가 어디 있어.” “여자 친구 없는 남편이 어디 있어? 다 그런 거지 뭐.” 

여러분! 우리는 그런 혼탁한 오염된 세속주의에 그냥 끌려 들어가면 안 됩니다.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홍수가 흘러내려올 때도 죽은 고기는 그 홍수가 밀려서 내려가지만, 살아있는 고기는 그 홍수를 거슬러서 상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 있는 그리스도인, 살아있는 그리스도인, 세상의 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린 세상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들이 그런다고 같이 따라가는 건 그리스도인의 거룩이 아닙니다. 성별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기에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어떻게 교회가 저럴 수 있느냐고?” 교회가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도들이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에 비판을 받고 조롱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적으로 거룩함을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늘 정직해야 합니다. 거짓말해서는 안 됩니다. 신용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직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가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나 한사람의 범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에 손해가 되고 해악을 끼친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3장 8절에 보니 집사의 자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집사들은 일구이언하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익을 취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의 믿음의 비밀을 지닌 자라.” 양심이 깨끗해야 합니다. 믿는 자들의 양심이 더럽혀지면 안 됩니다. 

디모데전서 4장 10절에 보니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경건이라는 건 거룩의 한 단면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경건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경건을 연습해야 합니다. 날마다 기도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날마다 선행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1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시대에 어떤 사람들을 사용하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거룩한 사람들을 찾고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집에서 어떤 그릇을 쓰십니까? 아무리 그 그릇이 비싸고 좋은 그릇이라도 더러운 그릇은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더러운 그릇은 개밥그릇이나 하고 돼지밥그릇이나 하지 사람이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늘 우리의 심령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성결함을 입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 본문에서 거룩함을 잊어버림으로써, 거룩함을 상실함으로써 비참한 몰골이 된 한 사람을 읽었습니다. 그가 바로 삼손입니다. 삼손은 마노아라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가정인데 하나님이 이 가정에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 아들은 날 때부터 나실인입니다. 나실인이라는 것은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일생동안 세 가지를 금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시체에 몸이 닿으면 안 됩니다. 시체가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면 안 됩니다. 세 번째로 이들은 머리에 칼을 대면 안 됩니다. 민수기 6장에 이 나실인의 규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이 규례를 어겼습니다. 시체에 손을 댔습니다. 독주를 마셨습니다. 취해서 어떻게 되는지도 몰랐습니다. 나중에는 머리까지 깎이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엄청난 힘과 능력을 주셨는데 그 힘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블레셋에서 구원하는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사임에도 오히려 음란을 쫓고, 쾌락을 쫓았습니다. 이방여인들과 함께 성적인 타락의 빠졌습니다. 이것이 삼손의 문제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삼손이 물리치곤 했는데 한번은 이 나귀턱뼈를 일천 명의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서 이긴 적도 있다고 합니다. 참 놀라운 힘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 삼손을 어떻게 제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꾀를 냈습니다. 한 여인을 시켜서 삼손의 비밀을 알게 하면 많은 돈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들릴라라는 기생이 삼손에게 붙어서 유혹을 합니다. 삼손은 넘어갔습니다. 그녀는 삼손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힘의 비밀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세요.”하고 조릅니다. 삼손은 그때마다 거짓말을 합니다. “한 번도 쓰지 않는 새끼줄을 가지고 나를 꽁꽁 묶으면 내가 힘을 쓸 수가 없다.” 그랬더니 웬걸요. 사람들을 불렀는데 삼손이 힘을 쓰니 그 새끼줄이 힘없게 끊어졌습니다. 몇 번이나 그런 일이 반복됩니다.

어느 날 들릴라가 작심을 하고 삼손에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합니다. “정말 당신이 나를 사랑합니까? 나를 사랑한다면 내게 이렇게 거짓말을 말할 수가 있습니까?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게 진실을 말해주세요.” 삼손이 번뇌했습니다. 삼손은 마음이 좀 단순했습니다. 이것까지도 거부해야 하는데 삼손은 그만 진실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날 때부터 나실인이기 때문에 머리에 칼을 대지 않았고 머리를 깎아본 적이 없다. 내 머리를 깎으면 나는 이제 힘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삼손이 이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마귀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든 것입니다. 그랬더니 들릴라가 잠자는 사이 사람을 시켜 삼손을 꽁꽁 묶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삼손이 힘을 쓰려고 하니까 이제는 힘이 없습니다. 머리를 깎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떠나가 버리셨습니다. 거룩을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이 삼손을 하나님의 영이 떠나갔습니다. 그는 더 이상 힘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쾌락의 무릎을 베게 삼아 잠을 자고 있다면 우리는 언젠가 삼손처럼 비참한 몰골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 혼탁한 시대에 우리가 깨어있지 아니하고, 기도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언제 절망의 나락에 떨어질지 모릅니다. 쾌락의 무릎을 베고 잠을 자던 삼손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꽁꽁 묶였습니다. 두 눈이 뽑혀졌습니다. 그 용맹하던 삼손이 눈을 잃어버렸습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때 시드기야의 두 눈의 빼고 끌고 갔습니다. 조롱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 이방인들의 조롱거리가 마귀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놋줄로 그를 묶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악습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마귀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감옥에서 그는 연자 맷돌을 돌렸습니다. 연자 맷돌은 방앗간에서 곡식을 빻는 기계인데 소나 짐승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일을 하나님의 사람인 나실인이 짐승처럼 전락해 버렸습니다.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거룩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러나 삼손은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여기서 뼈아픈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하나님! 제게 다시 한 번 힘을 주세요. 저의 모든 죄를 주님 앞에 회개합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삼손이 회개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거룩을 부어주셨습니다. 다시 그에게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잡아 놓고 축제를 벌입니다. 그들의 이방신전인 다곤 신전에 3천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가 삼손을 잡았다. 이놈을 죽이자고.” 좋아했습니다. 잔치를 벌였습니다. 삼손은 마지막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다곤 신전을 받치고 있는 두 개의 큰 기둥을 양손에 붙잡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힘을 쓸 때 그 두 개의 큰 기둥이 부러져 버렸습니다. 그 큰 건물이 무너져서 3천명이 압사해서 다 죽어버렸습니다. 물론 삼손도 죽었습니다. 장렬한 최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에 이 거룩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장렬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는데,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 먹고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가 십자가에 피 흘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고, 우리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려고 했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 우리교회에도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더 이상 성장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신나고 재미있는 것에 만족합니다. 힘든 것을 싫어합니다. 무거운 것 싫어합니다. 제자도 되기 싫어합니다. 그저 1학년이 좋습니다. 영원히 1학년에 있으려 합니다. 1학년은 오후수업도 하지 않습니다. 3학년, 4학년이 되면 점심 먹고 2시간씩 더 해야 합니다. 학교 청소도 해야 합니다. 1학년은 청소도 6학년들이 와서 다 해줍니다. 1학년은 그저 신나고 재미있는 것만 좋아합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신앙이 성숙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앙을 성장시킬 수 있을까요? 어떻게 거룩한 삶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성경에는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말씀을 사모하십니오.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은 성숙합니다. 거룩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할 때 우리는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 보니까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이 세상의 유혹을 이겨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죄악을 거부할 용기가 없습니다. 쾌락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실 때 우리는 우리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성령님께 내 자신을 맡길 때 우리는 거룩한 삶으로 날마다 성장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비둘기는 이 더러운 환경 가운데 있거나, 진흙탕 속을 다녀도 그 몸에 더러운 때가 묻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비둘기의 몸에서 세척제 같은 기름이 흘러 나와서 모든 오염물을 다 씻어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할 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죄악을 떨쳐버릴 수가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셉과 같은 사람은 성령 충만합니다. 그는 노예로 끌려갔지만 자기 주인의 아내가 자기를 유혹할 때 거기에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있습니다. 나는 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그는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순결한 요셉, 거룩한 요셉을 들어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거룩을 지향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 따라해 보십니다. “거룩이 능력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 사람이 바로 능력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거룩해지려면 하나님을 사랑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거룩을 닮아갑니다. 부부간에 왜 닮습니까? 서로 사랑하면 닮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거룩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습니다.

16세기 로렌스라는 유명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강론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수도원의 주방에서 일하는 주방 수사였습니다. 그는 주방에서 밥을 하고 빵을 만들고 그릇을 닦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볼 때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를 볼 때마다 거룩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광체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주방에서 설거지나 하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거룩하고, 저렇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을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릇을 하나 닦으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닦고 있습니다. 나는 밥을 준비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다 거룩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거룩한 품성을 가지고 많은 사람에게 감화를 끼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면 닮습니다. 삼손은 쾌락을 사랑했기 때문에 결국 세상의 더러운 것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린 하나님을 닮습니다. 말씀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거룩이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함으로써 이 혼탁하고 죄악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삶을 회복해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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