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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삶 (빌 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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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삶 (빌 1:19~26)


바울을 보면 그는 참으로 못 말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것 중 하나는 죽음이요 다른 하나는 감옥에 갇히거나 병에 걸리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두 가지 문제에 있어서 모두 초연합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주님을 변론할 기회가 되었다고 기뻐합니다. 또 죽음 앞에서도 주님을 만날 날을 더 사모한다고 합니다. 사는 이유도 그리스도 때문이요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유익이 된다고 하니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처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바울은 신앙인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우리는 어떻습니까? 칼은 고사하고 작은 굶주림의 위협에도 비겁해지는 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오늘 사도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삶을 반성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기도로 서로 돕는 삶(19)

바울의 담대함은 혼자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게 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중요한 하나는 지금 바울의 형편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처음에는 바울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바울은 자신의 서신들에서 에베소 감옥의 경험을 말하면서 죽음 직전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고 이어지는 32절에서는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에서는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라 말하였습니다.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은 곧 에베소 감옥을 말합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는 지금은 바울의 사정이 좀 나아졌습니다. 곧 감옥에서 나갈 것 같은 희망적인 모습도 보입니다. 19절 말씀이 그렇습니다.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여기 ‘구원’이라는 단어는 오해되기 쉽습니다. 이것은 헬라어로 ‘소테리아’입니다. 그러나 이 뜻은 구원받는다 곧 salvation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와 달리 헬라어로는 구출, 석방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에서는 “내가 풀려나리라”로 번역하고 있고, NIV, RSV, 뉴킹제임스버전 등은 구출을 의미하는 deliverance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25절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바울은 석방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는가? 19절에서 두 가지를 바울은 언급합니다. 하나는 너희 곧 빌립보 교인들의 간구요, 다른 하나는 성령의 도우심이라 말씀합니다. 저는 이 두 가지 것 중 빌립보 교인들의 간구에 대해서 더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지만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서 다시 살 소망이 생겼습니다. 바울은 이 원인이 바로 빌립보 교회의 중보기도에 있음을 인정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간절히 또 밤을 새워 기도한 덕분으로 바울은 어려움의 고비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중보기도는 이만큼 중요합니다. 우리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기도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은 서신서 곳곳에서 기도 부탁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살후3:1-2) 기도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서도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후1:11)고 요청하였습니다. 

빌레몬서에서는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22)고 하였습니다. 로마 교회를 향하여서는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롬15:30). 

기도 부탁하기를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사도이며 모든 능력을 행했던 바울이지만 기도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 부탁하지 않는 것도 교만입니다. 자기 스스로 해나갈 수 있다는 교만이요, 하나님의 약속과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기도의 공동체입니다. 내가 힘들 때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내가 힘이 날 때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서로를 위해서 기도할 때 힘이 납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아름다운 중보기도 사역으로 인하여 바울은 곧 석방될 희망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런 중보기도 사역이 활발하기를 바랍니다. 서로 기도요청을 하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기쁨과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저를 위해서도 항상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영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부끄럽지 않은 삶(20)

바울은 감옥과 재판이라는 두려운 상황에서 무엇보다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20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부끄럽지 아니하고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법정에서 담대히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이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엔도 슈샤꾸의 『침묵』이라는 책은 약 5백 년 전 일본에 기독교가 전해질 때의 핍박기를 무대로 한 소설입니다. 그 소설에서 신앙인들을 시험하는데 어떻게 시험하냐 하면 성모 마리아나 예수의 초상화를 땅에 놓고 그것을 밟도록 합니다. 그것을 밟으면 배교한 것으로 인정을 합니다. 이 초상화를 밟는 것은 단순한 행동이지만 그것이 바로 부끄러운 행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초상화를 밟지 않고 순교의 길을 갑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로마 황제를 주로 시인하고 배교하겠다고 하면 살아나고 그렇지 않으면 풀려났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삶은 공개적으로 예수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재판에 악영향을 줄지라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그것이 자신의 간절한 소망이요 기대라고 말합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옳은 것은 옳다고 시인하겠다는 태도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고문과 핍박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얼마나 우리는 부끄러워집니까? 그 정도까지면 말을 안 합니다. 작은 위협이나 손해 앞에서도 부끄러운 짓을 서슴지 않습니다. 요즘 정부 공무원들의 모습이 그래요. 공무원들이 공공연히 주고받는 말 가운데 하나는 ‘가늘고 길게 살자’입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삶의 태도입니다. 적당히 눈치 보며 오래 살자는 태도입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것은 아니라 해야지요. 자기 소신에 어긋나면 직언을 해야지요. 이것이 한국의 선비정신입니다.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죽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자기 자리가 위태로워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맙니다. 그러니 나라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겠습니까? 누가 정권을 잡든 공무원들이 부끄러운 모습은 보이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을 때 나라가 흔들리지 않고 옳은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목회자도 성도들의 눈치를 봅니다. 선배 목회자들은 목회자가 처음 부임하면 주보의 글자 하나도 고치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이 건수가 되어 장로나 성도들에게 밉보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와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그것을 포기해서는 안 되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오래 살 수는 있으나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당당하게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끄럽지 않은 삶입니다. 하나님은 각기 종류대로 만드셨습니다. 각기 종류대로 자기 은사와 뜻을 행할 때 교회나 사회는 건강하게 성장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눈치 보며 살도록 가르치려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당당하고 바르게 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군대에서 흔히 줄 잘 서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우리는 미꾸라지가 아닙니다. 요리조리 교묘히 빠져나가는 인생은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요행수나 바라보도록 하면 결국 사람들의 눈치만 보는 인생으로 만들고 맙니다. 우리 사회는 어렵게 살아서 그런지 적당히 눈치 보며 살 것을 요구하는 속담도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모난 돌이 정 맞기 마련이다’입니다. 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색깔과 성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가장 자기답게 사는 길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입니다. 요즘은 반대로 튀어야 성공합니다. 자기 자신과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전부가 된 삶(21-25)

사도 바울이 감옥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습니다. 21절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사는 이유도 그리스도 때문이요 죽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 연합이니 유익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로만 충만합니다. 바울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빼면 바울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울에게서 그리스도는 그의 전부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처음 예수를 만났던 그날은 죄인 중 괴수가 죽고 새로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이 약할 때 그의 힘이 되어주셨고, 그에게 모든 영감과 활동력을 주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의 생애 목표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좋고 유익했던 것을 모두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데 해가 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목표가 그리스도였는데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와 온전한 연합을 이루기 위하여 죽기마저 소원하고 있습니다.

22절에서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바울이 육신으로 살면서 열매를 맺는 것 이것은 곧 계속적인 선교적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강렬한 소망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죽어서 그의 목표요 소원인 예수와 함께 거하는 것 이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바울의 죽음에 대한 견해에 주목하십시오. 바울은 죽음을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거나 어둠이 아니라 행복의 극치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어둠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무엘 존슨 박사는 죽음의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마지막 갈등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극한 번뇌였으며 무서운 비애의 정적이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음울한 공포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죽음에 대한 이런 암울함이 전혀 없습니다. 그에게 죽음은 환한 빛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부터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을 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그리던 그리스도와 더 농도 깊은 연합에 이르는 것이며, 부활의 때에 그 연합은 완전한 완성에 이를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 두 사이, 곧 사는 것과 죽는 것 사이에 끼였다고 합니다. 바울은 신앙인이기 때문에 자살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죽음의 위기를 겪고 있기에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이 두 사이에서 고민하는데 바울의 소원은 죽어서 그리스도에게 가는 것이지만 빌립보 교인들의 기도와 소원을 듣고, 또 자신이 기도하다보니 하나님의 뜻이 다른 데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소원보다 교회의 필요가 더 우선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의 유익을 위하여 살아서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자기 뜻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젊어서는 마음대로 다녔지만 이제는 주님께서,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마음은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받았던 은혜입니다. 목사 안수를 받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는데 그때 들었던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제는 주님께 완전히 엮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묻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 입니까? 아골 골짜기 빈들에도 주님의 뜻이라며 가겠습니다. 제자는 이제 하나님의 뜻에, 또 사람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 매인 자들입니다.

바울은 죽음마저 소원할 정도로 그리스도가 그의 인생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그가 감옥이라는 환경도 죽음의 위협이라는 극단의 상황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그 곁에 함께 하셨기 때문이고, 바울의 필생의 목표가 그리스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필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 기쁨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한 인격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장 크고 영원한 것을 사모할 것을 원합니다. 우리 마음은 천하보다도 더 커서 세상의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 마음은 그리스도로 채울 때 만족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분을 예배하고 이분을 우리 마음에 모실 때 우리 안에서 생명과 기쁨이 솟아오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삶(26)

바울은 다시 석방될 것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26절입니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는 바울이 감옥에서 풀려 빌립보 교회를 방문할 것이라는 확신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갇혀 있던 감옥이 에베소 감옥이었다면 바울의 확신대로 바울은 풀려났고 사도행전에 보면 3차 선교 여행 시기에 빌립보를 방문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기도와 소원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기도가 이루어진 순간에도 바울의 관심은 그리스도에게 가 있습니다. 26절은 오역되기 쉬운데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내가 다시 너희와 함께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이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또 하나의 간증이 추가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기도한 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셨다는 간증입니다. 

그 간증의 중심은 우리의 무용담이 아니라 이 일을 이루신 그리스도에 대한 자랑입니다. 우리의 자랑은 철저히 그리스도에 대한 자랑이어야 합니다. 저는 이를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것보다 실제로 자신들이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룬 일이나 지위, 업적이나 상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말은 주님의 은혜야 하면서도 은근히 자신에 대한 자랑으로 갈 때가 있습니다. ‘나는 이만큼 대단해, 잘 났어.’ 식의 태도입니다. 그것이 설령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나 다른 사람의 공로로 이루어질 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가질 때만이 우리는 자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자기 공로가 아니기 때문에 겸손하며, 하나님의 유익을 위하여 그 결과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겸손히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인생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와 기적들을 베푸실 것입니다. 이 은혜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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