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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창 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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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창 4:1~15)

 
매주 목요일이 되면 오전과 저녁에 미국 새들백 교회에서 만든 ‘예수님과 함께하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교재를 가지고 성도님들과 성경공부를 합니다. 교재는 여섯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6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즘 ‘예배’라는 주제로 된 마지막 6권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교재의 내용이 지금까지 해왔던 예배와 관련된 성경 공부와는 접근 방식이나 내용이 다른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반적으로 ‘예배’하면 예배의 의미, 예배를 드리는 자세, 찬송과 기도의 의미 등을 다룹니다. 

그런데 이 교재는 전혀 그런 내용을 다루지 않습니다. 제목 자체도 ‘폭풍우를 만났을 때’ ‘무엇이 가장 소중한가’ ‘진정한 위대함’ ‘벅찬 감사’ 등으로 예배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교재의 저자는 교재를 통해서 예배 순서와 예배 드리는 방법과 의식에 대해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예배의 정신을 강조하며 그 정신을 가르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웅장하고 훌륭한 예배 형식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예배의 정신이 살아 있지 않으면 그 예배는 ‘보는 예배’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드리는 예배’는 될 수 없습니다. 예배는 예배의 정신이 살아 있을 때 ‘보는 예배’가 아니라 ‘드리는 예배’가 됩니다. 보는 예배와 드리는 예배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보는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 두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복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의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시면서 한 가지만은 제한했습니다. 에덴동산 복판에 있는 선악과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다른 것은 다 먹어도 되는데 선악과만은 따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분명히 죽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은 창조주과 피조물의 관계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창조주과 피조물의 관계를 깨고 자신이 창조주가 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결국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셨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남으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성경은 영적인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으로 죽음의 상태에 있는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은혜, 즉 선물이 있습니다. 바로 제사 제도입니다. 제사는 죄를 지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속죄물로 짐승을 제단에 드리고 죄 용서함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제사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기에 제사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담과 하와의 자녀인 가인과 아벨이 나옵니다.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 제사를 소홀히 여겼습니다. 정성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제사를 쉽게 생각하고 소홀히 했습니다. 제사를 소홀히 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소홀히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의 만남을 소홀히하며 형식적으로 드리는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동생 아벨은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양의 첫 새끼를 제물로 드리며 정성을 다했습니다. 제사를 정성스럽게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긴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제사’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읽어 보면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제사를 통해 복음의 진수를 맛보게 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제사를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입니다. 노아는 홍수 심판이 끝나고 방주에서 내려와 땅을 밟았을 때 가장 먼저 한 것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이 가장 먼저 한 일도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일입니다. 이삭도,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자신들의 장막을 치기 전에 먼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실 때 그 명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40년 동안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막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중심으로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성막에서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에 임하셔서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걸쳐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들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며 성전을 사모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은 생명과도 같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성전을 사모함은 그곳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고 하나님은 만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시면서 가장 분노하셨을 때가 어느 때인지 아십니까? 성전을 숙청하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성전에 장사하는 사람, 환전하는 사람들로 난장판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제물과 헌금이 필요했습니다. 제사에 드려질 제물을 팔고, 헌금을 드리기 위해 이스라엘 화폐로 환전하는 장소들을 편의상 성전 안에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거래 뒤에는 종교지도자들과 상인들 사이에 검은 돈의 거래가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부패와 부정이 공공연하게 저질러졌습니다. 예수님은 분노하시며 ‘만민이 기도하며 하나님을 만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외치시면서 성전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셔서 죄를 싫어하십니다. 죄와 함께 하실 수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인간은 죄를 주관하는 사단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인간이 사단의 지배를 떠나 하나님을 만나려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 고 외치셨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성전에 있는 휘장이 둘로 갈라졌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휘장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와 사람들이 거하는 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천입니다. 이 휘장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둘러 갈라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가로막혔던 담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제물 삼아 완전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들은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기초하여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시작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는 것입니다. 찬송을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정신과 뜻을 듣습니다. 헌금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헌신과 결단을 고백합니다. 

예배는 교회가 하는 역할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는 사람 중에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교회는 성숙한 교회가 될 수없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가 예배보다 회의를 더 중하게 여기기 시작하면서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는 참석하지 않는데 회의에는 참석합니다. 예배에는 참석하지 않는데 먹고 즐기는데는 참석합니다. 그러한 믿음을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배에 임하는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벨과 같은 자세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본다는 것은 관람하는 것입니다. 지켜보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참여가 없습니다. 잘하는지 못하는지 제 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것입니다. 

예배는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고백적인 모습으로 서는 것입니다. 기도를 잘하는가 못하는가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가대가 찬양을 잘하는가 못하는가를 들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하는가 못하는가를 지켜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직접 기도에 참여하고, 찬송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벨과 같은 자세로 예배하는 모습에는 ‘아멘’이 살아 있습니다. 기도에 아멘으로 동참합니다. 찬양에 아멘으로 동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리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교회에서 시간을 정해 놓고 드리는 예배만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가 하나님을 만나는 살아있는 예배의 자기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삶의 자리가 하나님의 정신으로 지배되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정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과 지도하심을 받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온전한 예배와 하나님 나라, 그리고 성령 충만은 신앙 안에서 별개의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드려지는 모든 예배가 예배의 정신이 살아 있는 예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가 교회에서 정해진 시간에 드려지는 예배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정신으로 살아 나가는 산 예배가 되어지고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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