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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 (마 5: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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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형제와 화해하라 (마 5:21~26)


살인마 강호순의 천인공노할 살인행각은, 계속되는 경제 위기나 심지어 북한의 전쟁 위협 발언까지도 압도할 만큼, 온 국민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같습니다. 무고한 생명을 일곱명씩이나 살해한 살인마의 만행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서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범죄행위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개탄스러운 일은 이런 끔찍한 살인마들이 우리 사회에 계속해서 출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스물 두 명이나 죽인 유영철 같은 살인마들의 사형이 아직도 집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통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언필칭 인도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저는 악한 인간들이 때로는 하나님보다 더 자비로운 척 하며 위선 피우는 것을 보면 참으로 못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고 하셨고, 또한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인본주의적인 휴머니스트들은 아무리 흉악한 살인범일지라도 사형을 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사형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강호순 같은 살인마들이 그들의 아내나 딸을 무참하게 죽여도 계속 그러한 주장을 할 것인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흉악범 강호순과 같은 살인죄를 짓지 않고도, 장차 하나님께로부터 살인죄에 버금가는 무서운 심판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오늘 본문 21-22절에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율법에 관한 설교를 자주 들었습니다. 그러한 설교 가운데 하나가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성경을 읽어서 이 말씀을 알기보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로부터 듣는 것에 의존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오늘날도 성도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진리의 광맥을 찾아내서 그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하기보다는, 일주일에 한 두 번씩 교회에 나와서 설교자가 전해주는 말씀에 의존하여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느 날 저 유명한 종교개혁자 ‘루터’가 닫혀졌던 책인 성경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을 때,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기독교는 성경이 말씀하는 기독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향한 루터의 눈이 열리자,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물론 그의 구원관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종교개혁을 단행하는 위업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설교자가 전해주는 말씀을 들으려고만 하지 말고, 성경을 자신의 눈으로 친히 읽고 스스로 말씀을 취해서 먹을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에서 잘 못 가르친 점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옛 사람에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하시면서, 더 높은 권위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래 전부터 여러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해 오신 율법의 수여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선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주님만이 율법의 정확한 의미를 올바로 주해하여 우리에게 전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의 참된 해석자로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가르침 가운데서 잘못되고 거짓된 가르침을 교정하고, 진정한 율법의 근본정신을 가르쳐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십계명 가운데 제 육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에 바리새인들이 덧붙인 것이 있는데,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고 세상 법정에서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덧붙인 해석은, 율법의 정신을 왜곡시킨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동기를 고귀한 수준에서 저급한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말았습니다. 왜 살인치 말아야 하는가? 바리새인들의 이유로는 법정에 가지 아니하려거든, 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감옥에 가지 않으려거든 살인치 말라 하는 식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바리새인들의 잘못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할 진정한 동기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1. 율법의 정신을 진심으로 따르고자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율법의 문자만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미움이나, 증오를 품는 정신적 살인을 하고 있으면서도, 문자적으로 살인하지 않고, 감옥에 간일도 없고, 재판 받은 일도 없으므로 율법을 잘 지켰다고 자위 하면서 살았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고, 법을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선량한 시민으로 자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신다.” 사람의 마음과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형제를 향한 미움과 경멸과 시기와 분한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은 이미 살인의 시작으로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순종하는 동기가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창피와 무안을 당하고, 체면과 위신이 손상되고, 재판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니까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의로운 계명을 사랑하고, 주님의 거룩한 인격을 사모하기 때문에, 기쁨으로 또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요 1서 5:3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살인에 이르게 되는 세 가지 단계를 말씀합니다. 

1) 형제에게 노하는 것 

여기 ‘노하는 자’에 해당 원어는 ‘오르기조메노스’라고 하는데, 악의를 가지고 남을 해하고자 하는 지속적인 분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은 재판을 의미합니다. 유대나라에는 어느 도시, 어느 성을 가던지 일곱 명의 장로로 구성된 지방 재판소가 있었는데, 예수님은 형제에게 분노하는 자마다 이런 재판소에 끌려가 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2)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것 

여기 ‘라가’란 욕설을 말합니다. 본래의 뜻은 ‘멍청이’나 도덕적인 정도가 낮은 ‘사악한 자’를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잡류, 비류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상대방에 대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짓밟고 인격을 모독하는 심한 욕설입니다. 또한라가란 상대방을 나쁘게 보이도록 이야기 하는 모든 것, 즉 타인에 대한 편견, 시기, 모함, 헛소문 등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듯 상대방을 향하여 ‘라가’라는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공회는 칠십 명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최고법정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형제를 향해서 ‘라가’라 하고, 경홀히 여기고, 인격을 모독하고 욕설을 하는 사람은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가 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3) 미련 놈이라 하는 것 

주님께서는 형제를 향하여 분노를 품는 것보다, 욕설을 하는 것보다 미련한 놈이라 하는 것을 더 무서운 범죄로 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왜 주님께서 그토록 엄하게 말씀하셨을까요?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본래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전혀 가치가 없는 놈이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어쩌면 저렇게도 어리석게 만들어 놓았을까?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말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선전포고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주님께서 그러한 죄를 가리켜 지옥 불에 들어가야 할 범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분노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1) 분노가 일어날 때 그것을 죄로 인정해야 합니다. 

분노는 가벼운 죄가 아니고 무서운 죄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1931년 5월, 미국 뉴욕에서 경찰이 ‘크로울리’라는 살인범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죽인 흉악범이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자신의 모자를 다치기만 해도 총을 쏘았습니다. 경찰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해도 총을 쏘았습니다. 그리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을 살해하였습니다. 재판 과정에서도 전 미국인들에게 충격적인 말을 했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정당하다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항상 이유가 있었고, 절대로 잘못이 없었고, 항상 정당하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마침내 전기의자에서 최후로 사형을 받는 순간 그는  말하기를 “내가 오늘 이 지경이 되어서 내 생을 마치는 것은, 끝까지 내가 내 죄를 합리화하려 했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죄를 합리화 하지 마십시오. 의로운 분노, 정당한 분노라고 합리화 시키지 말고, 형제에게 분노한 것이 죄인 것을 시인하고, 주님께 용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2) 먼저 화해의 길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23-24절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문자적으로 살인하지 않았으니 하나님 앞에 당당히 예배할 자격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시기와 질투를 보시는 주님은 “예배를 중단하고 가서 미움을 풀고 화해하라. 그리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살인한 일이 없고,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은 한 걸음 더 나가서 “가라. 그 사람과 그 형제와 화목 하라.”고 하십니다. 예배 그 자체는 물론 귀합니다. 봉사하는 일, 기도하는 일, 그 자체는 다 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 나와 사람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없으면 모든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말렉 사람과 그들에게 속한 육축을 모두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쓰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축들을 남겨두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양의 울음소리를 듣고 어찌된 영문인가 따지니까, 사울 왕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함이라고 변명을 하였습니다. 

그 때에 사무엘 선지자가 통렬히 책망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주님은 이 시간 본문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배를 여러 번 드리는 것보다, 너희 주변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올바른 관계를 맺어라! 그리고 그 후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려라!” 시편 기자는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님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듣지 아니하시면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고,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시면 드리는 예배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3) 즉각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25절에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화해는 바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엡 4:26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타주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분을 풀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의 인격은 사탄에게 정복당하고 맙니다. 그래서 너절너절하고 추하고 더렵혀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해가 지기 전에 분을 풀어버리십시오. 아직 생명이 붙어 있을 때에 기회가 있을 때에 속히 화해하십시오. 죽음의 침상에서 뒤늦게 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부름 받는 마지막 순간에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마십시오. 내가 먼저 부름을 받을 수도 있지만, 나와 관계가 있는 사람이 먼저 타계해버릴 수도 있고, 그것이 오늘이나 내일에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에, 기회를 다 놓치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변명하려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고 오셨던 주님께서 “살인하지 말라”는 6계명을 어떻게 보다 심화시키시고 완성시키셨는가를 배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6 계명을 문자적인 의미로만 생각하여 실제적인 살인을 하지 않은 것으로 만족했고, 그 동기도 몹시 저열하여 재판받지 않고 감옥에 가지 않으려면 살인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수여자이신 주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정확하게 해석해주셨는데, 문자적인 살인에 그치지 않고 살인에 이르게 하는 마음의 분노까지를 금하셨습니다. 

노와 미움과 증오 이것이 얼마나 독한지 아십니까? 화를 낸 엄마의 젖을 어린아이가 먹으면 당장에 설사를 한다고 합니다. 또한 사람이 노했을 때의 독기를 채취해가지고 실험하는 쥐에 주사했더니 금방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옛말에 “一笑一少 一怒 一老”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향한 미움과 분노는, 사실 자신의 신앙과 영혼에 끼치는 해악이요 자기 파멸인 것입니다. 세네카는 “분노는 단기간의 광기”라고 하였고, 키케로는 “분노가 일어날 때 아무것도 바르게 할 수 없고, 분별력 있게 될 수 없다”고 했으며, 김준곤 목사님은 “사람이 성을 낼 때에는 자기 속에서 성령대신 마귀가 발언한다.”고 했으며, 그러면서 자기 속에 성난 귀신 한 마리가 들어갔다 나갔다 한다고 탄식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급하게 노하는 경향이 있고, 그러한 성벽은 타고난 것이어서 절제할 수 없다고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우리 가운데 있다면 잘 들어보십시오. 프러시아군의 라퐁텐 군목과 부대장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군목이 노여움이 낳는 죄와 어리석음에 대해서 설교를 했더니, 부대장이 항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군목이 “부대장님은 국왕의 면전에서도 화를 낼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왕 중의 왕이 되시는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도 화를 낼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부대장은 “목사님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이제부터 타락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될 때에는, 언제고 그 왕이 생각나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성미가 급하고 그래서 한바탕 퍼부어대야만 직성이 풀리는 분들, 그러한 분들은 격정이 일어날 때 왕 중의 왕 되시는 주님 앞에 여러분이 서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 말씀이 이 시간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마음속에 형제를 향한 미움과 증오라는 죄악의 불길이 타고 있는 한, 예물을 제단 위에 올려놓아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의 예배도 받으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영국 왕 죠지 4세가 성례에 참예하고 싶어, 사자를 보내어 주교를 궁정으로 모셔오도록 했는데, 심부름꾼이 시간을 지체하여 주교가 늦게 도착하였습니다. 이에 굉장히 화가 난 왕은 사자를 불러 심하게 책망을 한 후 그를 해고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왕은 주교에게 “자 이제 성례를 시작하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교는 “왕의 마음속에 분노가 남아있는 한 성찬식을 집행할 수 없습니다.”고 했습니다. 왕은 “주교의 말이 옳습니다.” 라고 말한 후 신하를 불러 사과하고 복직을 시켰습니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성찬식에 참예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하고 예배에 참여하도록 하십시오. 그 일을 하되 속히 하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25-26에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재판관은 하나님을 의미하고, 옥이란 지옥을 말하며, 길은 인생길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인생길을 다 가서 죽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사람간의 미움과 불화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이 오늘로 끝이 나고 내일 아침에는 여기에 있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화해하러 가는 여러분의 발걸음, 화해하고 온 여러분의 발걸음에 문제는 없습니까? 어거스틴은 “형제에게 가라는 것은 다리로만 아니라, 마음으로 가라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요일 3:15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평생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모든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이 땅에서 드리는 예배마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아 주시고, 장차 하늘나라에서 삼위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기쁘게 받아주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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