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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날] 더 나은 본향 (히 1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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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본향 (히 11:8~16)


많은 사람들이 귀성길에 나선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먼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교회에 나오신 성도님들께 주님의 평강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설을 맞이하는 마음은 어렸을 적이나 나이가 든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나이가 들수록 더 가슴 설레는 느낌으로 설을 맞이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젊은이들은 꿈을 먹고 살고,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과 같이, 나이가 들수록 미래보다는 지난 과거를 애틋이 추억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설은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기다려지는 명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평상시에는 바쁜 일상으로 틈을 낼 수 없지만 설이 되면 휴가를 받아 고향에 돌아갈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기다리는 고향이라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지라도 부모님에 대한 추억이 있는 곳이므로 고향은 자석처럼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한국인들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민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중국 고사에 “수구초심(首丘初心)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우는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로 향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짐승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은 더할 나위가 없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노천명 시인의 고향이라는 시는 이런 구절로 시작합니다.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고향으로..

마지막 부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에 가 살다 죽으리-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고국에서 추방되어 근 2천년 동안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온 산이 있는 예루살렘을 잊지 않고 매일 세 번 기도할 때마다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향에 대하여 너무 집착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지상의 고향보다 더 본질적인 또 다른 고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을 때 지체 없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그 결과, 그는 선민의 조상으로서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게 되었고,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 보면, 아브라함이 소망한 것은 지상의 가나안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본향이었습니다. 

첫 번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을 버렸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란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라함을 낳았고, 205세를 향수하고 죽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란을 떠날 적에 데라의 나이는 145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은 고향만 버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조차 버려두고 떠난 것입니다. 정말로 대단한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것은 우리가 성도로서 새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을 믿기 전의 삶을 포기한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비 친척 고향 집을 떠난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살려면 세상적인 삶을 떠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을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삶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세상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가치관이란 무엇을 중요시하느냐를 정하는 기준입니다. 가치관은 곧 세계관이라는 말로도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관 또는 세계관은 하나님 중심 곧 신본주의입니다. 사람 중심 곧 인본주의는 사람이 가치의 기준이지만, 신본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치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아브라함은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혈연을 중시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사회에서 혈연의 중요성은 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족보에 대하여 그리 집착하지 않지만 고대인들은 족보를 생명처럼 귀히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혈연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는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해서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너무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아브라함과 같은 순종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아브라함이 여전히 하란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계속 하란에 머물러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복 된 약속들은 그림의 떡과 같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나게 하는 구절이 노천명의 시 고향에 나옵니다. 

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두메산골에 사는 총각들은 서울 구경이 소원이지만, 선뜻 고향을 떠날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당장에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밭도 갈아야 하고, 씨도 뿌리고, 풀도 매고, 나무도 해야 하고, 부모님을 모셔야 하고, 소꼴도 베야하고, 물도 길어야 하고, 보리도 거두어야 하고, 해도 해도 할 일이 널려 있습니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평생 서울 구경 한 번 못해보고 늙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달랐습니다. 그의 고향은 휴전선 너머 강원도 통천입니다. 그는 19살 때 아버지가 소 판 돈 70원을 훔쳐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갔습니다. 미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고향과 부모님과 형제들 다 버려두고 혈혈단신으로 서울로 가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만약에 그 때 그가 그 같은 결단을 하지 않았더라면 세계적인 경영인 정주영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어 아브라함의 복을 받아 누리려면 떠나야 할 곳에서 떠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하고, 버려야 할 것들을 아낌없이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롯의 아내는 불타는 소돔 성에서는 구출을 받았으나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뒤 돌아보았다가 그만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구원의 초청에 응해서 교회에 들어왔으나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교회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긴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세상의 끈을 끊지 못하고 있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는 주님을 올바로 섬길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갈라디아서 3장 7절에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고 하였고, 9절에는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혈통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지만, 믿음 안에서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해 졌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적인 삶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지음 받은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은 영원한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조차 장막에 거주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나안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가나안에는 헷 족속을 비롯해서 일곱 족속이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왕국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아브라함은 한갓 개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가나안 일곱 족속이 알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기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비록 가나안 일곱 족속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은 아브라함의 실 소유가 아니더라도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땅을 사고 집을 짓고 살지라도 하등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큰 부자였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좋은 지역을 골라서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돌이나 나무로 집을 짓고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평생도록 장막에 거주했습니다. 

지금도 시나이 반도나 아라비아의 사막에 사는 베드윈들은 천막을 치고 목축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염소 가죽을 이어서 만든 천막은 언제라도 철거해서 옮겨 칠 수 있으므로 목축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편리한 주거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막은 아무런 문화시설도 갖출 수 없습니다. 맨 바닥에 양탄자 같은 것을 깔고 그 위에서 잠도 자고 식사도 하고 휴식도 취합니다. 

가나안이 사막이 아니고 비옥한 땅이라 할지라도 천막생활은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였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이곳저곳에 집을 마련해 두고 사용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가나안에 사는 동안 계속해서 장막에서 지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11장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9)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아브라함이 장막에 거주한 것은, 무슨 경제적인 이유나 가나안 족속들로부터 땅을 구입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신앙적인 이유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의 거처를 바라보고 나그네 길을 가는 마당에 세상의 안일함으로 인해 방해 받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름휴가를 받아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해수욕장을 다녀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해변가에 텐트를 치거나 민박을 하노라면 불편한 것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편하다고 해서 그곳에서 집을 사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편을 택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에서 지낸 아브라함의 삶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지상의 삶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날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는 이 땅에 속한 자들이었으나, 구원 받은 후로는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천국을 향하여 길가는 순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천막에 거주했듯이, 성도들은 이 세상의 안일을 탐하지 말고 절제하며 근신하는 생활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마시고 싶은 것 다 마시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그러고도 신앙생활을 잘 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자칫하면 현실에 집착해서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천국을 망각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요한일서 2장 15절 이하에 “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마음 빼앗기면 천국을 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천국을 바라고 순례의 길을 지속하려면 세상의 안일함을 구하지 말고 장막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할 각오가 필요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 아브라함을 위해 영원한 하늘의 처소를 예비하셨습니다.

한번 고향을 떠나서 가나안에 들어온 아브라함은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떠나온 고향을 방문한 적이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떠나온 갈대아 우르나 하란을 고향으로 여겼더라면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다녀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설에 고향을 찾아가듯이, 그도 아버지 데라의 생일에 맞춰서 하란을 방문하고 돌아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의 아내 될 처녀를 구해 오기 위해 충성된 늙은 종을 하란으로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하인은 낙타 열 마리에 예물을 실고 길을 떠났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하란을 다녀올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아버지와 형제를 만나러 가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동은 오늘 한국인의 시각으로 보면 너무나 몰인정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잣대로 아브라함의 행동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 같은 그의 행동은 신앙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에 보니 “13)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지상의 고향이 고향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의 고향이 진정한 고향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나 깨나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고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한 눈 팔지 않고 순례의 길을 지속해 나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설에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고향을 찾지 않은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오히려 명절에 고향을 찾아가서 부모 형제를 만나는 것은 권장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도들의 진정한 고향은 이 땅에 있는 고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천국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은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를 위해 처소를 준비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천국에 우리가 거주할 곳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하나님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인 천국에서 우리가 거할 처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고향의 부모님들은 이번 설에 타지에 나갔던 자녀들이 돌아와서 지내다가 갈 수 있도록 방안에 쌓아둔 물건을 창고로 옮기고 청소를 하고 이부자리를 마련해 둡니다. 바로 이런 것이 처소를 예비하는 것입니다.

미국으로 이민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 미국에 가서 거처할 집을 어떻게 마련해야 좋을지를 놓고 고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 이민을 가긴 하지만, 부자가 아닌 다음에는 좋은 주택을 미리 마련해 두고 가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돈을 한 보따리 사들고 가지 않는 한 미국에 가서 한 동안 고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한국인이 미국에 이민 가면 그곳에서 성공하든 못하든 이방인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낯선 나라로 이민 가는 것이 아니라, 정든 고향집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순례길을 다 마치고 천국의 진주문에 당도할 때 그 감격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구주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될 때 얼마나 반가울까요! 또 앞서 간 성도들을 만날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누추한 세상 일만 생각하면서 얼굴을 찌푸릴 것이 아니라, 천국을 생각하면서 마음에 기쁨을 맛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보면서, 날마다 불의한 뉴스를 접하면서, 탄식하고 분개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언제나 불의하고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우리는 죄와 악과 불의가 전혀 없고 의와 선과 진리가 충만한 천국을 생각하면서 위안과 힘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에게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의 모범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렸던 몇 안 되는 위인 가운데 한 분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우리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자손 된 우리가 조상의 발자취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브라함처럼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방해 되는 세상적인 삶을 버리고, 영원한 본향인 천국을 바라보면서 순례의 길을 지속해 나갑시다. 그리하여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믿는 자들을 위해서 예비해 두신 천국의 본향에 다 함께 들어가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영원히 희락을 누리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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