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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마 12: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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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마 12:14~21)

  
오래 전에 미국에서 방영된 유명한 텔레비전 프로로서 "Life Styles of the Rich and Famous"(부와 명성의 인생)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대재벌이나 유명 연예인들이 그들의 돈과 명예를 가지고 어떠한 최상류의 생활을 누리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프로였습니다.
  
그것이 또한 높은 시청률을 올리면서 오랫동안 재방송까지 되었던 것은 실제로 그런 호사를 전혀 누려 보지 못하는 일반인들의 동경심과 욕망을 강력히 자극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물욕과 명예욕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욕심이지만 그 둘 중에서 또 하나를 가려낸다면 아마도 명예욕이 좀 더 강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저 돈만 추구하는 것은 저질스러운 인생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들도 자기 이름이 유명해지는 것을 그다지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또한 가진 재물은 없지만 심오한 학식이나 고고한 사상이나 비범한 인격으로 유명한 분들이 자기의 명예를 훼손당하는 일이 생길 때면, '이름 석 자 가지고 사는' 자신의 인생에 큰 타격을 주었다고 화를 내면서 당장 소송을 거는 것을 보아서도 '세상에 물욕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명예욕 없는 사람은 없다.'라는 말도 성립될 법한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상 이 점에 있어서 유일한 예외가 될 만한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는데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물욕은 두말할 필요 조차 없지만, 당신 자신의 이름이 유명해지는 것조차 극도로 꺼리시면서 가시는 곳마다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경계하시는" 참으로 신기한 분이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서 오해되어' 유명해지기를 결코 원치 아니하셨고 오로지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알려지기만을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전 인류 역사를 통하여 전 지구상에 가장 유명하게 알려진 이름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이란 그 당사자께서는 "정말이지 나를 그런 식으로 소문내지 말라."고 극구 만류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도 알려지기를 원하신 당신의 진짜 모습,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대하여 성경이 온 인류를 향하여 선포하고 있는 참된 사실은 과연 무엇입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우리 기독신자들이 '나타내지 말도록' 경계해야 할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우리 자신부터 확실히 깨닫고 온 세상이 그 이름을 바랄 수 있도록 반드시 '나타내어야 할' 예수님의 진짜 명성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는 스타'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알려 주시는 심판주'이십니다. 

14절부터 16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14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15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16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을 다니시면서 놀라운 신유의 능력을 베풀어 주시자 가시는 곳마다 "사람이 많이 좇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오로지 병 고침을 받고자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지어 찾아오는 사람들을 조금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저희 병을 다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런 엄청난 대중 인지도와 인기는 매사에 '사람에게 보이기를 즐기는' 바리새인 같은 자들에게는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라고 머리를 싸매면서 질투하게 될 정도로 폭발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전혀 뜻밖에도 그런 인기를 조금도 즐겨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당신을 그처럼 떠받들면서 몰려드는 무리에게 오히려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셨는데, 이런 말씀은 비단 본문에서뿐 아니라 사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유명해지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시는, 일견 이상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취하신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당신의 이름이 그저 무슨 용한 의원이나 신기한 신유 능력의 소유자로만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육신의 병을 고쳐 주는 것이 당신께서 세상에 오신 본연의 사역이 결코 아니었으며,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사람들에게 오해된 가운데 유명해지기를 결코 바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이 어떻게 알려지기를 원하셨습니까?
바로 그것에 대하여 이어지는 17절과 18절에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18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참 목적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구약에서부터 벌써 예언해 주셨던 말씀을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한 종"을 택하셨다고 했는데, 이 '종'이란 물론 '비하된 신분'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주인의 일을 맡아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이루고자 하시는 어떤 중요한 일을 완전무결하게 해 낼 수 있을만한 한 종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다른 '종'을 사용하실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 즉 독생자 예수님을 직접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그 종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사역이 온 세상 사람을 지극히 아끼시는 성부 하나님께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사람들도 집안의 어떤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고 반드시 같은 가족들끼리 힘을 합쳐서 해결하듯이, 지금 '성부'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사랑하시는 '성자' 하나님을 친히 보내시면서 또한 "성령" 하나님까지 동행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처럼 전권을 부여받아서 오신 그 중차대한 '하나님의 일'이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는 사역이었습니다.

여기 우리말 번역에 "심판"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얼핏 '악인에 대한 심판'이라는 국한된 의미로 생각되기 쉽지만,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 이 단어를 'judgment' 즉 '심판'이 아니라 'justice' 즉 '공의'라고 번역하고 있는 대로, 본문의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에 알게 하리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처럼 '선과 악을 판단'하고 '죄를 징벌'하며 '의를 포상'하시는 등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전반적인 공의를 단지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전 세계 만민에게 선포하실 것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에게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고 또한 마지막에 가서는 그 공의를 친히 완성시키실 심판주가 되실 분이셨기 때문에 당신을 그저 '유대인 병자들 몇 명만 고쳐 주는 의사처럼 나타내지는 말라.'고 경계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의 '스타'들은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고 유지하는 일에 목숨을 걸다시피 합니다.
그래서 설혹 자기 자신은 옳다고 판단되는 일이라도 소위 '안티팬'(anti-fan)들이 생길 것이 뻔한 일들 즉 다수의 대중이 싫어하는 말이나 행동은 절대로 피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도 그런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기 원하셨다면 그야말로 최고의 '슈퍼스타'(superstar)가 되고도 남음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가시는 곳마다 그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병이나 고쳐 주시면서 그런 신유의 초능력자로 자신을 홍보하셨더라면 누가 그런 예수님을 싫어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정반대로 사람들이 싫어하고 꺼려할 인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바로 당신께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온 세상에 알리시고 또한 집행하실 심판주로 왔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의 첫 일성은 "내게로 오기만 하면 무슨 병이든지 다 고쳐 준다."라는 말씀이 아니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육신의 병보다도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이 진짜 고질병에 걸려 있음을 일깨워 주시고, 바로 이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지 아니하면 무서운 영벌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온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해 주시며,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예수님 자신이 장차 그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성취시킬 심판주가 되실 것이라고 자신을 스스로 나타내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 중에서조차 이런 예수님을 '심판주'로는 알지 못하고 그저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스타'처럼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순전히 병 치료나 돈벌이나 자녀교육이라는 자기의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며, 전도한다는 것도 그저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라는 기복적인 구호로만 일관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으면 그런 복도 받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만 알고 전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예수님께서 '자기를 그런 사람으로 나타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면서 경계하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친히 이 땅에까지 보내셨을 때 겨우 무슨 '용한 의사' 한 명 되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성부께서 '당신의 택하신 종'으로 하여금 '성령충만을 입게' 하신 목적이 세상의 연예인들처럼 무슨 개인기를 보여 주고 매력을 발산시킴으로써 자기 인기를 모으려는 것 따위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사람들은 싫어하고 거부할 것이 뻔하지만, 오로지 '죄가 무엇이며 그것이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알게' 해 주시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중으로부터 '스타' 대접을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무서운 손에 빠져 지옥의 심판에 빠지지 않도록 일깨워 주시기 위하여 스스로 사람의 몸으로 비하되신 '종'으로 오신 분이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스타'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독생자'이시며 그런 까닭에 '사람의 욕구 충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 선포'를 위해 초림하셨고 또한 그 '하나님의 공의 성취'를 위해 반드시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성경 말씀이 증거하는 그대로 믿고 영접하며 또한 온 세상에 나타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를 높이는 영웅'이 아니라 '당신의 택자를 끝내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본문 19절에 "19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들레지 아니하다'라는 표현은 '시끄럽게 소리치지 아니하다'라는 뜻입니다.
당신을 향하여 살기등등하여 어찌하든지 꼬투리를 잡으려고 따라다니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결코 흥분하시거나 맞싸움을 걸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앞서 15절에 나왔던 대로, 바리새인들이 당신을 죽일 음모를 꾸밀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저 조용히 "떠나"가셨습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자기를 따르는 무리가 그토록 많다면 그런 경우에 "보시오. 이 바리새인들이 나를 잡아 죽이려 하고 있소."라고 선동하여 사건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대중의 미움을 받도록 유도했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다투지도 들레지도 아니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이 동네에서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가르치셨던 것과 일치되는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행동과 이단적인 교리에 대해서는 맹렬하게 책망하셨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적 싸움'이었을 뿐이며 공생애 기간은 물론이요 마지막 수난 주간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사회적, 정치적으로 부각시키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정치가들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일이 벌어진다 싶으면 온 동네에 나팔을 붑니다.
억울하게 당하는 일은 두말할 것도 없고, 사실상 자기가 저지른 불법 때문에 당연히 검찰에 소환을 받고 처벌을 받는 일인데도 '정치적인 탄압' 운운하면서 플래카드를 내걸고 연좌농성을 하는 둥 야단법석을 떠는 것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그렇게 여론몰이를 하여 자기를 지지하는 지역구민의 감정을 격앙시킴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자는 속셈입니다.

하지만 공생애 3년 내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 이르기까지 유대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온갖 미움과 중상모략과 박해를 받고 끝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그들과 '정치적인 다툼'을 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 상에서 그들을 위하여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까?
그 질문에 대하여 바로 이어지는 20절이 대답하기를 "20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성한 갈대도 한 손으로 간단히 꺾을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상한 갈대"야 오죽하겠습니까?
또한 등잔불은 가뜩이나 바람에 취약한 것인데 하물며 기름이 달랑달랑해서 지금 막 "꺼져 가는 심지"의 약한 불이야 그저 사람 코의 가벼운 숨결에도 쉽게 꺼지고 말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이런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는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기만 해도 얼마 못가서 저절로 꺾이고 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야말로 그 당시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던 사람들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병 고치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으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듣고 자기들도 그 '떡맛'을 한번 맛보고 싶어서 모여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라고 치켜세우기도 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이라는 것은 '상한 갈대'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 믿겠다고 했던 그들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라는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 앞에 오히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고 고개를 흔들면서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일반 대중들은 물론이거니와 예수님의 가까운 제자들까지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서도 처음부터 확고부동한 믿음을 가지고 따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찬송가 가사 그대로 모두 다 '허물 많은 베드로'요 '의심 많은 도마'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처럼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은 그들의 불안하기 짝이 없는 신앙을 완전히 꺼지지는 않도록 끝까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의심에 확신을 주셔서' 결국은 온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게 만들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란 것도 참으로 연약하기 짝이 없는 갈대요 참으로 위태롭기 짝이 없는 등불과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주 원망하고 의심하는 것은 물론이요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조금만 생기면 '교회 못 나겠다.'는 말을 교역자에게 큰소리처럼 내뱉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신앙생활했으면 지금쯤은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서 적어도 자기 구역이나 교구에서는 좀 쓸 만한 일꾼이 되었어야 마땅할 터인데 여전히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답보 상태로 머물면서 주일예배 참석조차 불안해서 담당 전도사가 매주일 아침마다 전화를 해야 할 수준인 것입니다.
  
만약 목사나 전도사에게 이런 한심하기 짝이 없는 교인들의 신앙 성장이 달려 있는 것이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당신 같은 교인은 싹이 노랗다.'라고 포기를 해도 한참 전에 벌써 다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목자장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성부께서 당신께 주신 자들을 '하나도 멸망치 않도록 끝까지 보전하여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즉 한번 택하신 자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도중에 포기하지 않으시는 구세주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이 '약한 신앙'이라도 완전히 꺾이지는 않도록 붙잡아 주시고 이 '못난 신앙'이라도 완전히 꺼지지는 않도록 다시 불붙여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만 해도 정말 놀랍고도 고맙기 그지없는 일인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보전의 사역'을 얼마 동안이나 인내하면서 계속해 주시는지 아십니까?
  
본문 말씀을 다시 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심판하여 이길 때"란 바로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재림하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성취하심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거두실 때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자면 당신의 택하신 성도를 결코 사탄에게 빼앗기지 않고 구원받는 자리에 틀림없이 세우시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중단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연약한 신앙을 이리저리 싸매어 주시고 고쳐 주시고 보살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이사야 42장 4절에서 "그는 쇠하지도 낙담하지도 않으시고 세상에 공의를 이루시고야 말 것"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신앙을 격려하고 독려해 주시는 사역에 이처럼 왕성한 원기와 한없는 열정을 '세상에 공의를 완성하시는' 그 날이 올 때까지 부단히 발휘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이켜 보면서 스스로도 주님 앞에 얼굴을 들지조차 못할 정도로 부끄럽고 또 낙심될 때가 있습니까?
이렇게 힘들어서는 예수님을 믿고 따라간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겠다는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까?
  
혹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포기해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오신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은 세상의 그 어느 영웅이나 호걸이나 가인이나 재사보다도 더 스스로를 높이고 온갖 권세와 명예를 다 쥘 수 있는 분이셨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마다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를 높이는 영웅'이 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절망적인 죄인을 회복시켜 주시는 구세주'가 되어 주려고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높임을 받기 위하여 '다투고 들레고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시고 오로지 '상한 심령'을 온유함으로써 고쳐 주시고 '꺼져 가는 인생'을 사랑으로써 회복시켜 주기 위하여 오신 이 고마우신 예수님을 자신의 진정한 구세주로 영접하고 고백함으로써 '둘째 사망의 심판을 이기는' 그날이 올 때까지 온 세상에 바로 이런 주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결론에 해당되는 21절은 "21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라는 말씀으로써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결국 온 세상에 끼치게 될 결과를 또한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이름을 바라리라"는 말은 '그 이름에 모든 소망을 걸고 열렬히 사모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결국에 가서는 최고의 '스타'보다도 더한 인기를 얻게 될 것이며 역사의 그 어떤 '영웅'도 필적할 수 없는 최고의 명성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예수님께서는 어떤 인기몰이를 통하여 대중의 사랑을 받은 분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공의'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시는 심판주가 되심으로써 세상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름에만 모든 구원의 소망을 걸게 만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업적을 성취함으로써 사상 최고의 '완전한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오로지 '택자를 끝까지 보존해 주시는 겸손과 사랑'으로써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의지하고 사모할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의 이름을 역사의 정점에 남기셨던 것입니다. 

세상의 연예인들은 인기를 끌기 위해서 스스로 납치극을 조작하기도 하며 인기 회복의 가능성이 없으면 아예 자살해 버리기도 합니다.
  
역사상 자기 이름을 영웅호걸가인으로 남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들 또한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결코 그런 세속적인 스타나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님은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는' 즉 '온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최고의 사모함을 받는' 존재가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완벽하게 공의로우신 심판주'요 '자비롭기 한이 없으신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어떤 이름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고 있습니까?
혹시 주님께서 바라지 않으시는 이름, 주님께서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하신 이름을 날마다 자기 입에서 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게 뭐 어떻습니까?"라고 누가 물어 오면 "그게 뭐 별 게 있겠습니까? 다 그저 그렇지요."라고 대답하고, "그러면 교회는 왜 다니십니까?"라고 물어 오면 "신앙생활하는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으니까요."라고 얼버무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 자신부터가 심판주의 이름이 그리 두렵지도 않고 구세주의 이름이 그리 고맙게 여겨지지 않고 있는 교인은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이 이런 식으로 알려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실 것 또한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뭐가 잘 됩디까?"라고 누가 물으면 "예, 저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고 천당 구원을 약속 받음으로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당신도 이런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이렇게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체험해 보십시오."라고,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시는 심판주 예수님'을 증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전에 교회 좀 다녀 보았는데 집안에서 반대가 심해서 그만 두었습니다."라고 누가 말하면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당신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 주고 계십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을 찾아보십시오."라고, 우리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구세주 예수님'을 그들에게 알려 주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이 '온 세상과 모든 이방에 나타내 주기를' 바라시는 당신의 진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만이 자기와 같은 죄인에게 최고의 영적 스타요 영웅 같은 주님이 되시는 것을 체험한 신자만이 그렇게 그 이름을 자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필연적으로 임할 심판을 엄중히 경고해 주시면서도 또한 그날이 올 때까지는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시고 끊임없이 도와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속사를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하고 계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신이 먼저 믿고 소망하면서 또한 온 세상을 향하여 크게 나타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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