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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허사경영(虛事經營) (사 5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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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사경영(虛事經營) (사 55:1~3)


저희 아파트는 17층입니다. 운동 삼아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지하 차고에서부터 걸으면 20층 정도 되는 높이입니다. 제법 운동이 될 만한 높이입니다.

물론 요즘은 아파트키가 대부분 전자키로 되어 있어 키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지만 예전에 열쇠가 있어야만 문을 열 수 있었을 때 만일 열심히 20층 높이의 계단을 걸어 올라갔는데 차 안에 열쇠를 놓고 와서 집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그것도 운동 삼아 올라간 것이 아니고 정전이 되어 억지로 올라간 것이었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아무리 힘들게 올라갔어도 키가 없이 올라갔다면 그 수고는 허사입니다.

그게 아파트 계단 정도라면 그리 심각한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만일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면 문제는 아주 심각해 질 것입니다. 나름 열심히 인생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섰는데 천국에 들어갈 열쇠가 없어서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면 문제는 아주 심각하게 될 것입니다. 아파트 키는 내려가서 다시 가지고 올라오면 되지만 우리의 인생은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의 말씀은 우리가 아주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1절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1절의 말씀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입니다. 2절의 말씀은 ‘그리고’라고 하는 접속사로 1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라고 하는 접속사로 연결된 문장은 순서를 나타내는 것이고 앞에 있는 것이 뒤에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함으로 반드시 먼저 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충성이 중요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장 1절은 그 중요한 충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모르고 하나님께 충성하면 그 충성이 다 허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잘못하면 허사(虛事)가 아니라 망사(亡事)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울이었을 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을 없이 하여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모르고 충성하니 하나님을 위하여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엉뚱한 일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그 때 그 충성은 허사였고 망사였습니다. 충성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서를 썼습니다. 전도서하면 여러분 떠오르는 구절 하나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1장 2절의 말씀입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씀입니다. 솔로몬에게는 부귀와 영화와 쾌락이 마치 강물이 쉬지 않고 바다로 흘러 들어오는 것과 같았습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바라고 욕심내는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삶을 누리고 산 당사자의 최후의 고백은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을 썼습니다. 다윗의 시편 중 가장 유명한 시편을 꼽으라면 아마 시편 23편일 겁니다. 시편 23편의 말씀 중 제가 가장 부러워하고 좋아하는 말씀은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과 너무 반대가 되는 말씀입니다. 

물론 다윗도 왕으로서 만만치 않은 부귀와 영화와 쾌락을 누리며 살았던 사람이었지만 다윗의 삶을 부족함이 없게 하고 넘치게 한 것은 그와 같은 것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 1절에서 부족함이 없고 넘치는 삶을 살게 된 단 하나의 이유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다윗의 이 고백이 고린도전서 4장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비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아파트 열쇠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잊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을 잃는 다는 것은 삶의 목적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욕심에 취해 그냥 열심히 아파트 계단을 오릅니다. 아파트 계단을 성공적으로, 남보다 높이 그리고 남보다 빨리 오르지만 아무 소용없습니다. 아파트 계단은 올라왔으나 아파트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인 이사야 55장에는 하나님의 안타까우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안타까우심이 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정말 자기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미숙함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실 때 우리 인간들에게 그와 같은 미숙함이 아주 극심하여서 우리 인간들은 자신을 위하여 살지만, 그것도 아주 열심히 살지만 정작 무엇이 자신을 위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쓸데없는 짓만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너무, 너무 안타까우신 것입니다.

마음이 아주 소심하여 부모로부터 걱정을 듣는 아들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소심한 아들이 부모에게 산엘 가겠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부모는 그 말에 감동하였습니다. 소심하여 집 문 밖에도 잘 안 나가던 아들이 동네도 아니고 산엘 가겠다니 너무,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흥분하여 아들에게 왜 산엘 가려고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세상에 이 소심한 아들이 호랑이를 잡으려고 산엘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부모는 아들이 위험해 질 것은 둘째 치고 자기 아들이 통이 크고 패기 있는 젊은이가 된 것이 너무 자랑스럽고 기뻐서 호랑이는 잡아서 무엇 하려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의 대답이 너무, 너무 실망스러웠습니다. 아들의 대답은 ‘호랑이 꽁지 가죽으로 송곳집 만들려고’ 였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생명을 걸어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호랑이를 잡으려고 하다가 오히려 호랑이에게 잡아 먹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모험을 하면서 호랑이는 잡았지만 잡은 호랑이로 무엇을 할는지는 모르는 것이 우리의 인생과 같아 보입니다. 기껏 호랑이 꽁지 가죽으로 송곳집이나 만드는 것이 어찌 보면 우리의 인생인지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추구하는 것은 세상적인 성공입니다. 세상적인 성공은 쉽게 말해서 출세하여 높아지고, 강해지고, 유명해지고, 부해지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성공의 반대는 세상적인 실패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쉽게 말해서 낮아지고, 약해지고, 이름 없어지고,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약자가 되어 가난의 아픔과 무명의 설움을 당하는 것은 불행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호랑이를 잡는 것과 같이 힘들고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걸고 사회적인 성공을 얻기 위하여 생명을 겁니다. 그래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합니다. 저들의 소원대로 높아지고, 강해지고, 유명해지고, 부해집니다. 쉽게 말해 호랑이를 잡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들의 목적을 달성한 후에 저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사회적인 실패는 불행이었는데, 그것을 뒤집은 사회적인 성공인 꼭 행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불행을 뒤집으면 행복이 되는 줄 알았는데 행복은 불행의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적인 실패에도 행복은 없었습니다. 세상적인 성공에도 행복은 없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세상적인 성공과 세상적인 실패의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입니다.

세상적인 성공과 실패에 둘 다 다 행복이 없는 까닭은 세상에 행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세상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적인 성공을 부정하거나 부인할 필요 없습니다. 높아짐과 강해짐 그리고 부요해짐을 거부할 필요도 없습니다. 

수필가요 교수셨던 피천득 선생님이 1970년대에 쓰신 ‘나의 사랑하는 생활’이라는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우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지금 돈으로 한 5만 원 쯤 생기기도 하는 생활을 사랑한다. 그러면은 그 돈으로 청량리 위생 병원에 낡은 몸을 입원시키고 싶다. (....) 그리고 우리 딸에게 제 생일날 사주지 못한 비로드 바지를 사주고, 아내에게는 비하이브 털 실 한 폰드 반을 사주고 싶다. 그리고 내 것으로 젊잖고 산뜻한 넥타이를 몇 개 사고 싶다. 돈이 없어서 적조하여진 친구들을 우리 집에 청해 오고 싶다. 아내는 신이 나서 도마질을 할 것이다. 나는 5만 원, 아니 10만 원 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생기는 생활을 가장 사랑한다.”

당시 서울대 교수이셨던 피천득 선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를 마음 놓고 초대하기가 부담스럽고, 사랑하는 딸에게 비로드 바지 하나 척 사주지 못하는 쪼들림이 있었는가보다. 그럴 때 딸에게 비로드 바지 사주고 싶을 때 척 사주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털실 한 폰드 반 정도는 마음 먹을 때마다 사줄 수 있고, 자신을 위해서는 마음에 드는 텍타이 정도 큰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를 부러워하는 마음을 읽으면서 나는 마음이 따뜻해 지는 것을 느꼈다.

무조건 물질적인 여유를 죄악시하고 그것을 사랑하고 동경하는 교수를 유치한 사람으로 매도하는 세상이 저는 참 피곤합니다. 얼마나 인간적이고 솔직합니까? 그 당시 5만 원이면 지금 얼마쯤 되는 돈일까요? 며칠 정도 병원에 입원하여 종합진단 정도를 받고 딸에게 비로드 바지 한 두 벌, 아내에게 털실 한 폰드 반, 넥타이 몇 개, 친구를 초청하여 식사 대접을 하는데 얼마면 될까요? 한 300만 원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그냥 넉넉잡고 한 500만원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늘도 아니고 일 년에 몇 번 정도 그 정도의 여유가 있어서 그런 호사를 부리는 정도의 삶을 욕심내는 피천득 선생의 글을 읽으며 나는 그 분이 참 건강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도 그런 생활을 사랑합니다. 저는 사실 그 정도의 생활을 이미 즐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런 생활을 즐기고 있는 저에게 그와 같은 생활은 ‘사랑하는 생활’ 일수는 있어도, ‘가장 사랑하는 생활’ 일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 중 하나는 결혼식을 한 후 신혼여행을 청량리 다일공동체로 간 청년이 있었습니다. 신혼여행을 갈 돈으로 저들에게 식사대접을 하였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잔치도 다일공동체에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식사대접을 하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 중에는 벌써 여러 해 째 새터민 가족에게 매주일 밑반찬을 만들어 공급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 중에는 남산 쪽방에 사시는 분들에게 밑반찬을 만들어 공급하는 사역을 7년째 계속하고 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우리 교회 교인 중에는 제과점을 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매주일 한 번씩 탈북자 청소년들을 위한 여명학교 학생들에게 빵을 만들어 주십니다. 팔다 남은 빵을 가져다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위하여 일부러 새 빵을 정성껏 만들어 매주 한 번도 빠짐없이 가져다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는 그 여명학교에 가서 아이들의 점심과 저녁을 배식하는 일을 하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 중에는 벌써 여러 해 동안 남산 쪽방을 도배해 주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아마 남산에 있는 쪽방은 거의 다 도배를 해 주었을 것 같습니다. 그 쪽방에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는 청소년들과 어린 아이들을 보살피는 사역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인 중에는 열매나눔재단이 새터민들의 자활을 위하여 세운 공장엘 찾아가 점심도 사주고 상담도 해주고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니고 계속 꾸준히 그렇게 하셔서 새터민들과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새터민들이 마음을 털어 놓고 자신의 고민과 문제를 의논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새터민 식구들에게 저녁을 사주고 싶었는데 핑계가 없어서 자기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저녁을 사준적도 있습니다. 저는 열매나눔재단이 운영하는 그 공장이 성공하게 된다면 일등 공신 중에 한 분이 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인 중에는 자신의 모든 삶을 다 내려놓고 노년에 동토의 땅 러시아 노보니꼴스꼬에에 가셔서 저들에게 살길을 열어 주려고 자신의 삶을 헌신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적지 않은 자신의 사업을 그 일 때문에 다 정리하고 그곳으로 들어가 저들과 함께 살며 저들에게 살 길을 찾아주는 것이 너무 기쁘고 보람되다고 아예 그곳에서 뼈를 묻고 싶다고 영주권을 신청한 분도 계십니다.

사고뭉치들만 모아서 세운 대안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 아이들이 변하였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공부하여 90%가 넘는 학생들이 정규대학엘 갈만큼 변화하였습니다. 그 사고뭉치 아이들을 변화시킨 일등 공신은 그 학교 수위아저씨였습니다. 그분은 정년 은퇴하신 교장선생님 이셨습니다. 아이들이 수위 할아버지라고 우습게 여기고 깔보았는데 그 분이 은퇴하신 전직 교장선생님이셨다는 것을 알게 되자 감동을 받아 아이들이 변화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신혼여행을 다일공동체로 간 우리 교회 청년을 닮고 싶습니다. 새터민과 쪽방의 사람들에게 매주 밑반찬을 정성껏 만들어 공급하는 청년과 교인을 닮고 싶습니다. 매주일 정성껏 탈북 청소년들에게 빵을 만들어 오는 교인을 닮고 싶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새터민들을 찾아가 가짜 생일 핑계를 대며 저녁을 사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도 은퇴 한 후 말썽쟁이들이 모여 있는 학교에 가서 수위가 되고 싶습니다.

얼마나 근사할까요? 얼마나 행복할까요? 얼마나 배부를까요? 얼마나 보람될까요? 그런 일들 다 내 팽겨치고 배부르지도 못할, 행복하지도 못할, 만족하지도 못할 삶만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우리 높은 뜻 교회는 우리를 위하여 예배당 짓는 일을 우선하지 않고 그것을 뒤로 미루었습니다. 그것보다 우선 사회적인 약자들의 자활과 통일을 준비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의 교회가 넷으로 분립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어떤 교회는 예배 처소가 마땅치 않아 매주일 예배를 드릴 때 어려움을 격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우리의 조그만 희생 때문에 수많은 가난한 이웃들과 장애우들과 새터민들이 일자리를 얻어 삶의 활기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배부릅니다. 기쁩니다. 보람됩니다. 감격스럽습니다. 저는 저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저도 피천득 선생처럼 그 정도의 삶의 여유는 누리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싶지는 않습니다. 삶의 목적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식을 좇아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섬기는 것에 두고 싶습니다.

우리는 너무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돈과 능력을 많이 허비하고 있습니다. 허사를 경영하고 허세를 부리는데 너무 많은 것들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행복은 그와 같은 일에 없습니다. 세상에 없습니다. 행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식에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세상에만 욕심이 있고 하나님께는 욕심이 없습니다. 세상의 욕심을 좀 주리십시다. 좀 절약하고 절제하십시다. 세상적인 성공으로 삶의 목적을 삼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뜻과 식에 오히려 욕심을 가지고 그 뜻과 식을 이루기 위하여 쓸데 없는 세상 욕심을 버림으로 오히려 배부르고 목마르지 않고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높은 뜻 식구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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