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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 (딤전 3: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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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 (딤전 3:14~16)


영감 받은 사도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목회서신이라고 합니다. 목회서신의 기록 목적은 디모데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습니다. 

Ⅰ.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1) 사도 바울의 교회관입니다. 

(1)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5절에 『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먼저 하나님의 가족이 모인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만일 하나님의 자녀의 모임이 되지 못한다면 그곳은 참교회가 아닙니다(요일 3:10-17). 

(2)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본문 3장 15절에 『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입니다. 

(3)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 『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라고 했습니다. 

(4) 교회는 '진리의 기둥'입니다. 
본문 3장 15절에 『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여기 '진리의 기둥'이란 기둥이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5) 교회는 '진리의 터'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19절에 『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는 교회가 성숙한 믿음을 소유하지 않고는 진리를 바로 세울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진리의 빛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2) 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가 회집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크게 둘로 구별됩니다. 그것은 
(1) 무형교회(보이지 않는 교회, The Invisible Church)입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택함을 입고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어 있는, 하나님께만 아신바 된 무리들입니다. 즉 성령 안에서 하나 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2) 유형교회(보이는 교회, The Visible Church)입니다. 
이 교회는 예수는 교회의 머리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기록하신 진리의 성지(聖旨)인줄 알되 각각 저마다 자기의 신경(信經)과 예식과 규칙과 정치가 같지 않게 존재하는 지상 조직 교회들을 말합니다.


Ⅱ. 유형(有形)교회의 이해입니다. 

1) 교회의 본질적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에 『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고 했습니다. 
개혁자들이 가견적(유형) 교회와 비가견(무형)적 교회를 구별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가견적 교회와 비가견적 교회의 차이점을 구별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결코 두개의 서로 다른 분리된 교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의 교회의 두 가지 면일 뿐입니다. 

프랑소와 벤델은 이 점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비록 교회가 두개의 뚜렷한 면모로써 우리들에게 나타날지라도 그 중의 하나는 신앙의 대상이며 다른 하나는 체험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것을 다시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의 교회와 우리에게 보이는 대로의 교회인 두 개의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특히 교회의 가견적인 면에 언제나 크나큰 강조를 두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참'교회는 교회 위에 그 어느 곳에 떠도는 어떤 '플라톤적(이론적, 혹은 정신적)인 실재'가 아니라 우리가 땅 위에서 보는 그대로의 교회였습니다. 그에게 있어 눈에 안 보이는 영적인 성격으로서의 교회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집행되고 권징이 시행되는 지상(地上)의 단체 안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받아들여지며 성례가 그리스도의 법령에 맞게 집행되는 현장에 권징이 신실하게 시행되는 곳마다 하나님의 교회가 있는 곳입니다. 

에베소서 2장 20-22절에 『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약속이 헛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 『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교회에 대하여 '어머니'라는 이름의 사용이 또한 이와 보조를 맞추고 있습니다. 어머니(교회)가 우리를 그의 모태(母胎)에 잉태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의 품속에서 우리를 양육합니다. 마침내 육신을 벗어 버리고 천사들과 같이 되기까지 우리를 보살피고 인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생으로 들어갈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 『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라고 했습니다.

칼빈은 "교회는 모든 경건인의 공동모체로서 왕들이나 농부들이나를 막론하고 그의 자녀들을 낳아 양육하며 성장시켜서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그리고 이는 목회에 의하여 수행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개혁가들이 참으로 차원 높은 교회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결코 영성화(靈性化)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의 영적인 본질을 인식하고 이 영적인 교회는 가견적 교회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을 동시에 주장하였습니다. 


2) 교회의 다양한 정치적 형태입니다. 

(1) 교황정치가 있습니다. 
이 형태는 교황의 전제로 교회를 관리하는 정치인데 로마 카톨릭이나 희랍 정교 등입니다. 이 정치의 특색은 ① 교황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대표라고 칭합니다. ② 교인들은 교황의 말을 정확무오한 것으로 알고 복종하게 합니다. 

(2) 감독정치가 있습니다. 
이 형태는 감독회가 옛날 사도회로부터 전권을 받아 교회를 주장한다는 원리를 따릅니다. 이는 감리교회 계열입니다. 인사권, 경제권이 모두 감독회에 의하여 전행되고 있습니다. 

(3) 자유정치가 있습니다. 
이 형태는 각 개교회가 범사에 제각기 모든 일을 논의하여 작정하고, 다른 회의 관할이나 치리를 받지 아니하는 원리를 취합니다.

(4) 조합정치가 있습니다. 
이 형태는 자유교회와 방불하나 공회가 있어서 각 교회가 총대를 파송하여 각 교회의 유익문제들을 논의합니다. 그러나 각 교회가 독립적으로 신경이나 교회 행정을 처리합니다. 

(5) 장로교회 정치입니다. 
이 형태는 치리하는 권세가 장로회에 있는데, 장로는 교인들의 투표로 택하여 세웁니다. 교회정치 제 5장 23조에 장로 가운데는 훈도(설교=강도)와 치리를 겸하는 목사와 치리(행정)를 분담하는 장로로 두 반이 있습니다. 이 두 반(목사, 장로)의 조직체를 당회라 하고 이 당회가 지교회를 관할합니다.


3) 교회의 조직에 따른 여러 직분입니다. 

(1) 교회의 창설 직원
교회의 창설 직원은 사도들입니다. 
이 사도들에게는 3대 권능이 있었습니다. ① 성경 기록의 영감(요 14:36, 16:13) ② 이적과 권능(마 10:8) ③ 안수함으로 성신이 임하게 함(행 8:17-18)이었습니다. 오늘에 있어서 사도직은 존속하지 않습니다. 

(2) 교회의 항존직
교회의 항존직은 예수 재림하실 때까지 지상교회에 존속할 직분인데 셋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 장로, 집사입니다. ① 목사는 설교와 치리와 성례를 겸하고 있습니다. 이 직분은 전도하고 교육하는 직분입니다. ② 장로는 신령한 중에서 치리(다스림)하는 직분입니다. ③ 집사는 구제하는 직분으로(행 6:1-3) 당회의 감독 아래 교회의 일반 재정을 관리하는 일까지 담당하고 있습니다(행 6:3-5).

(3) 교회의 임시직
교회의 사정에 따라 안수 없이 임시로 직원을 둘 수 있습니다. 
① 남녀 전도사입니다. 당회의 추천으로 노회가 인가하여 유급교역자로 당회나 목사가 관리하는 지교회 사무를 돕게 하며 그 임명권은 당회가 주관합니다. ② 전도인입니다. 유급으로 불신자에게 전도하는 자를 둘 수 있습니다. ③ 남녀 서리집사입니다. 교회 혹은 목사나 당회가 진실한 남녀를 선정하여 집사의 직무를 하게 하는 자입니다 ④ 기타 여러 직원입니다. 지교회 발전과 육성을 위하여 당회가 각종 직제에 해당하는 봉사자들을 임명하여 충성케 합니다. 

(4) 교회의 준직원
강도사와 목사 후보생을 준직원이라고 합니다. 
① 강도사는 총회 직영 신학교를 졸업하고 강도사 고시에 합격하여 노회의 인허를 받고 당회 관할 하에서 사역하되 치리권은 없습니다. ② 목사 후보생은 목사직을 희망하는 자로서 노회의 자격심사를 받고 그 지도대로 신학에 관한 학과를 수학하는 자입니다(신학전문). ③ 강도사와 목사 후보생은 개인적으로 지(枝)당회의 관할에 속하고 , 직무상으로는 노회 관할에 속하여 있습니다.


4) 직분의 목적입니다. 

(1) 교회의 성장을 위함입니다. 
에베소서 4장 11-12절에 『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교회 직분 맡은 자를 가리켜 『 새 언약의 일군 』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3:6). 『 영의 직분 』이라고 했습니다(고후 3:8). 이 영의 직분은 살리는 직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직분이 영광되다고 하였습니다. 

(2) 구원에 대한 보은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의 사랑에 감격한 새 생명의 보은의 표현이 바로 교회 직분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감격적인 것이고 자원적인 것이고 희생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돈이 아니라 신앙고백의 한 수단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 이 땅의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내 관 뒤에 이 땅에 보화를 싣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생전에 앞서 보낼 수는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새로운 종교 개혁이 필요합니다. 평신도들이 이 일을 솔선수범해 주어야 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16세기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에 와서 16세기를 운운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당시의 종교개혁 가지고는 지금의 교회를 바르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교회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로 만들기 위하여 새로운 방법들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과제는 교리적 가르침과 교리 논쟁의 부활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감독들의 각성이 필요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 17절에 『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따라서 목사들은 교리적 진리를 설교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리적 논쟁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단을 경계하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사도 바울은 특별히 이단을 엄히 경계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 『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라고 했습니다. 
교리적 설교야말로 교인들로 하여금 믿는 바를 명확히 알고 행하도록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쓴 서신에 약 3분의 2를 신앙교리에 할애하고 나머지 3분의 1이 우리의 생활과 행위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초기 종교 개혁자들의 설교는 교리적 설교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아무리 평이한 성경이라도 교리적 틀에 의해 해석되어야 하고 교리적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설교는 설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리가 성경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과제는 치리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치리를 부활시켜야 합니다. 현재 교회가 겪고 있는 난국의 주요 원인들 중에 하나는 치리를 무시한 결과 때문입니다.

① 교회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교회 회원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1925년 세계적인 보수신학자로 한 시대를 이끌었던 J. 그래삼 메이첸 교수는 "현재의 종교 상황의 가장 큰 악 중에 하나는 『 나는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합니다 』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증거를 조금씩 보여주지 않고 이와 같은 말만을 단순히 뇌까리는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구두상(口頭上) 신앙고백으로는 불충분하고 신앙고백은 신용할만한 신앙고백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앙고백이 행동화 되지 못하는 이러한 사람들은 비록 교회 명부에 올려져 있으나 예배 의식에 불규칙하게 참석하거나 전혀 참석하지 않는 일도 빈번하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의 신앙고백과 행정에 반대되는 견해를 공공연히 주장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미 정죄된 활동에 참여하는 일까지 빈번하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일을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② 교회 감독들의 역할이 성경이 명하는 대로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명시된 규칙에 따라서 기독교적인 치리를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목사와 장로(당회)의 의무입니다. 
오늘날 갈수록 장로직의 영광스러움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개혁교회 장로들이 치리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면 거룩한 교회로서의 기능은 되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는데 가장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다른 책을 읽기 전에 성경적 진리 지식으로 겸손하게 무장해야 합니다. 합리주의자들은 이성에 기초해서 보니 모든 것이 캄캄한 암흑일 뿐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비관론(Pessimism)에 이르게 됩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이나 실존주의자들은 보편구원론(Universalism)의 경향을 띄게 됩니다.

그들은 사람들 간의 구별은 수직적(Vertical)이 아니라 수평적(Horizontal)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또 어떤 사람은 의롭다 함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옳기도 하고 모든 사람이 다 잘못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합리주의자들이나 이성주의자들이나 실존주의자들은 세상이 마치 교회인 것처럼 세상을 향해 말하고 교회가 마치 세상인 것처럼 교회를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성경에 대한 어떠한 실제적 개념도 생소하기 때문에 바른 교회관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합창곡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이 익숙하게 쓰는 말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또 한번 기억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사탄이 우는 사자와 같이 믿는 자 중에서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각자에게 하는 말을 듣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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