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왜 고난이 필요한가? (고후 4:16∼18)

  • 잡초 잡초
  • 345
  • 0

첨부 1


왜 고난이 필요한가? (고후 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6∼18절) 

옛말에 ‘입에 쓴 약이 몸에는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약 같은 것을 먹어 보면 좋은 약일수록 입에 씁니다. 입에는 써도 몸에는 병을 치유하고 건강을 가져옵니다. 우리 삶의 과정에서 당하는 고난은 정말 싫습니다. 고난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구나 고난을 떠올리면 몸서리칩니다. 고난을 안 받으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성장하는 데에 꼭 필요한 쓴 약이 고난입니다. 우리가 자라기 위해서는 고난이라는 약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1.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게 한다

배부르고 평안할 때는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내가 잘산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고난을 당하게 되면 내가 얼마나 보잘 것 없고 무력한지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시고 배를 타고 출발했는데 날씨가 좋고 훈풍이 불고 바다가 잔잔하니까 제자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데에 심취하여 예수님을 등한히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하고도 말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냥 배의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점점 날씨가 사나워지고 바람이 불고 파도가 거세어져서 제자들이 배를 바로잡을 수가 없고 그대로 갔다가는 배가 파선하게 될 것 같자 그때야 그들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좋을 때는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희희낙락하느라 예수님을 찾지 않다가 배가 풍랑에 부딪히니까 비로소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디 계시냐? 예수님은 어디 계시냐?” 보니까 예수님은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님을 깨워 흔드니까 그때 예수님이 깨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람이 잠잠하고 바다가 고요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평안할 때는 예수님이 곁에 계셔도 대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풍랑을 만나서 자기 힘으로는 인생을 도저히 항해해 갈 수 없을 때에야 새벽기도를 나오고 철야기도를 하고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면서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우리가 죽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나이까?”하면서 간절히 부르짖고 찾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으면 주님이 우리를 돌보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당하니 교회 출석수가 미국과 한국 모두 크게 늘었다고 합니다. 미국과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가 경제적인 부흥기였을 때 콧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좇아 이리 모이고 저리 모이고 떠돌아 다녔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기고 피 흘려 우리를 구원해 주셨건만 세상의 물질과 쾌락에 취한 사람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듣지 아니하고 귀를 막고 세상을 향해서 나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계적인 경제 위기를 보낸 것입니다. 미국에서부터 출발해서 온 세계에 경제적인 풍랑이 몰아친 것입니다. 중소기업이 무너지고 대기업도 감원하고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월급을 받지 못하고 어려움이 태산과 같이 몰려옵니다. 하나님을 잊어 버렸으니까 당연히 당할 절망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무시게 하고 나자 풍랑이 온 것처럼 오늘날 이 세계는 경제적인 부흥을 구가하며 주님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큰 풍랑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의 풍랑에서 살아날 길은 주님을 깨우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우리를 살려 주소서” 주님을 깨워야 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5장 15절로 6장 1절에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오라 우리가 야훼께로 돌아가자 야훼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주님을 구할 때까지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서 얼굴을 가려 버리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 받을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구할 것이니 그때에 주님께서 돌보아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찢었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주님께서 찢으시는 것은 회개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요, 치시는 것은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이 환난과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기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회개와 변화를 가져온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겉사람이 낡아져야 속사람이 새로워집니다. 겉사람이 건강하고 부귀와 영화와 공명을 다 누릴 때는 속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속사람이 살든지 죽든지 겉사람만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면 된다고 쾌락에 빠져서 사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고 안목의 정욕을 따라서 살고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다가오면 육신이 쇠하여집니다. 육신이 의탁할 곳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속사람이 꿈틀거리고 살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질 때에 속사람이 강해집니다. 약해질 때 우리가 성경을 읽게 되고 약해질 때 주님께 기도하게 되고 약해질 때 열심히 교회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편할 때는 교회에 나오지 않고 친구들하고 놀러 가고 술집에 가고 쇼핑하러 가고 영화관에 가고 노래방에 가고 그러다가 고난당하면 술집도 쇼핑도 노래방도 다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육체가 고난당해서 가시에 찔리고 약해지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라는 간절한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정욕을 좇아가던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게 하는 데는 고난만큼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고난이 없을 때는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뜻대로 해주시옵소서. 내가 가고 싶은 대로 따라 오시고 오고 싶은 대로 따라 오소서” 그러다가 고난이 다가오면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시옵고 주의 뜻대로 하여 주시옵소서.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을 앙망하오니 주님의 뜻대로 이끌어 주옵소서”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겨자씨 만한 고난이 산 만한 영광을 갖다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겨자씨 만한 고난을 고난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가져오는 영광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것이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보이는 세계만 찾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찾게 되는 것은 바로 고난의 역사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영광을 이루는 씨앗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불평하고 원망하고 탄식합니다. 고난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고난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만들어서 큰 영광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천국에 올라가면 얼마나 큰 영광이 다가오겠습니까?

한 선교사 부부가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선교하다가 낡은 가방 하나 들고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오는데 뉴욕 항구에 사람들이 줄을 서있고 팡파르를 울리고 야단입니다. “우리가 아프리카에서 오래 있다가 오니까 환영하는구나”하고 배에서 내려 보니 아무도 자기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발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간 비행사가 그들과 같이 배를 타고 왔는데 그 비행사의 귀환을 환영하기 위해서 뉴욕시민들이 다 동원되고 팡파르를 울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부는 낡은 호텔에 들어가서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주님, 나는 평생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는데 아무도 마중을 안 나오는데 린드버그라는 한 청년이 단발비행기를 타고 처음으로 대서양을 건너 유럽에 도착하니까 이렇게 시민들이 팡파르를 울리고 박수를 치니 너무나 억울합니다. 너무나 억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사람아! 린드버그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너는 아직 고향에 안 돌아왔지 않느냐? 아프리카라는 객지에 있다가 미국이라는 객지에 돌아왔지 고향에 안 돌아왔지 않느냐? 네가 고향에 돌아올 때는 온 천군천사가 동원되고 하늘에 팡파르가 울릴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행인과 나그네와 같이 객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는 환영받지 못하고 축복받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주를 위하여 겨자씨 만한 고난을 당하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해서 하늘나라의 영광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3. 신앙 인격을 성숙케 한다

고난은 잠시지만 그 결과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 인격 속에 이루게 합니다.

진주조개를 보십시오. 진주가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러나 진주가 조개 속에 있을 때 조개에게는 크나큰 고난이었습니다. 진주조개의 살 아래에 모래알이 들어가서 살을 갉아 먹습니다. 진주조개가 움직일 때마다 그 모래가 살을 파먹으니까 너무나 아픕니다. 고통스러우니까 진주조개가 그 모래알을 감싸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것이 모래알을 둘러싸고 둘러싸니까 둥글둥글해져서 살이 아프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래알 때문에 아름다운 진주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모래알이 없으면 진주는 없습니다. 오늘날 인공으로 진주를 만드는 것도 진주조개에 모래알 같은 고통스러운 것을 넣어줘서 조개가 진주를 만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생애 속에서 영광의 진주를 만드는 것은 고난이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회개하게 만들어 주고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 주고 말씀을 읽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평안할 때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더 주님을 간절히 찾고 더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영혼의 진주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깊이가 없고 경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조금만 좋으면 호들갑을 떨고 “할렐루야”하다가 조금만 어려우면 “나 죽는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도 고난당하게 되면 호들갑이 사라지게 됩니다. 깊이 생각하고 오래참고 자기 영혼 속을 살펴보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신중한 크리스천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에서 인내가 제일 중요합니다. 좋을 때도 너무 좋아하지 말고 나쁠 때도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항상 마음속에 잔잔한 기쁨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은 고난을 통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운동을 할 때 우리 몸에 근육이 생겨나는 것처럼 고난은 우리 인격의 근육인 인내심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3절로 4절에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자기중심으로 살던 사람이 고난당할 때 이웃 사람을 위하여 헌신하게 됩니다. 자기가 고난당하므로 고난당하는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고난당하면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려봐야 배고픈 사람의 사정을 알고 배고픈 사람을 도와줄 수가 있습니다. 내가 목마를 때에야 남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나누려고 합니다. 내가 나그네 됐을 때 집 없이 방황하는 사람들의 슬픈 사연을 알고 도와주려고 합니다. 내가 헐벗었을 때 옷이 없어 벌벌 떠는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그들에게 옷을 나누어 입게 합니다. 내가 병들어봐야 병든 사람을 이해하고 병상에 찾아가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중심으로 살던 사람이 이웃과 고난당하는 사람을 위하여 헌신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고난 당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5절로 36절에 주님께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향해서 말하기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의인들이 말했습니다. “언제 우리가 주리신 주님을 먹게 했으며 목마를 때 마시게 했으며 언제 주님이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했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나이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네 이웃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우리가 이웃의 고통당하는 사람과 고통을 나누고 함께 도와주는 것은 예수님을 도와주는 것과 같아서 주님의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4. 새로운 축복을 받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그릇이 있어야 무엇을 담을 수 있습니다. 고난이 우리를 큰 그릇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고난 받기 전에는 그릇이 조그마합니다. 축복받기 전에 고난이 와야 우리 그릇을 크게 만들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욥기 23장 10절에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단련하시고 난 다음에 내가 순금과 같이 되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돌멩이 같지만 단련을 받으면 순금이 되어 나오겠다고 욥은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축복을 받을 때 축복의 귀한 것을 알고 올바르게 쓰도록 하십니다. 고생을 많이 하고 돈을 번 사람은 돈을 벌 줄은 알아도 쓸 줄은 모릅니다. 아까워서. 그러나 고생하고 돈을 번 사람은 절약할 줄 알지만 부모에게 큰 상속을 받아서 어릴 때부터 조금도 고생 안하고 돈을 번 사람은 돈이 귀한 것을 모릅니다. 돈을 허랑방탕하게 쓰다가 나중에 빈털터리가 될 일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은총과 축복을 고맙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신명기 8장 15절로 16절에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의 끝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시험과 환난과 고난을 당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시고 시험하사 마침내 복을 주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를 주려고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릇을 키우고 겸손하게 만들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귀한 것을 깨달아 알도록 한 다음에 마침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할 때 하늘을 바라보고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고난 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 안 하다가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너무 오냐오냐 하면서 키우면 할아버지의 수염도 뽑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엄할 때는 엄하게 해야 질서가 바로 섭니다. 너무 좋기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교육할 때도 무엇이든지 자녀가 원하는 대로만 하면 자녀를 망나니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는 뜨겁게 사랑하지만 잘못했을 때는 엄하게 종아리도 때리고 꾸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고난 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영원한 영광을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다가올 때 중도에서 믿음을 포기하고 낙심하고 뒤로 물러가고 원망하고 탄식하고 깨어져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고 영광의 귀한 것이 다가올 것을 기대하고 믿음으로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뿐 아니라 세계에 경제적인 큰 유라굴로의 풍랑이 다가와서 생활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이켜 하나님을 찾고 우리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마음속에 받아들이며 우리 인격이 변화돼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기간을 우리가 인내와 믿음으로 견뎌내면 다음에는 이 환난과 고난보다 더 큰 축복이 우리 개인과 가정과 생활과 자녀와 사회와 국가에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혼자 왔다가 혼자 지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고난은 축복을 등에 걸머지고 와서 나중에 축복을 불어넣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받는 사람은 오히려 고난을 기쁘게 여기고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고난을 보낸 것은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훌륭한 인격자로 만들기 위해서임을 알고 깨달았습니다. 고난이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자기를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중한 것을 이루려고 왔다는 것을 알고 고난을 쫓아내지 말고 받아들여서 변화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기적이 고난을 겪는 모든 성도들에게 나타날 것을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