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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날] 복 있는 사람(팔복)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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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팔복) (마 5:1~12)


내일이 설날입니다.  고국에서는 설 연휴를 맞이하여 설날 귀성객들이 엄동설한에 고향을 찾아가느라 무진 애를 쓰는 모양입니다. 춥고, 얼고, 미끄럽고 도로가 온통 귀성차량으로 뒤엉켜 고향길이 고생길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경기 한파까지 몰아 부치는 중이라 많은 분들이 이중 삼중으로 마음 고생하며 이번 설날을 우울하게 지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옵니다.   

우리야 어차피 설이 되어도 고향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신경 쓰지 않아 편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없는 빈 자리를 보고 허전해 하실 부모형제들을 생각하니 마음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금 어려운 시절을 지내고 있는 가족들이나 어려운 형편에 있는 분들이 이 명절을 너무 외롭게 지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얻기 바랍니다. 우리도 오늘 예배를 드리며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주 안에서 한 가족으로 서로를 축복하며 새해를 감사와 기쁨으로 지낼 수 있도록 주님께 간구하는 날이 되기 바랍니다.  
    
새해 덕담 한 마디가 즐거움을 줍니다.  일년 중 제일 많이 주고 받는 인사 ‘복 받으라’는 말을 하는 명절에 우리 교우들이 금년 내내 그리고 일평생 누리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성경이 전하는 소중한 복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흔히 세간에서 말하는 오복이 있습니다.  중국 고전 서경 홍범편에 나오는 말로 수(壽), 부(富), 강녕 (康寧), 유호덕 (攸好德), 고종명 (考終命) 이 다섯 가지를 가리켜 오복이라고 합니다.   소위 천수를 누리는 장수의 복, 큰 부자는 아니지만 열심히 일하여 안락한 생활을 하는 복, 평생 사는 동안 큰 질병 없이 건강하여 평안하게 사는 복, 좋은 덕을 쌓는 성인의 살, 그리고 하늘이 내린 수명을 다 누리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복이라고 하니 이런 복은 누구나 기대하고 또 누리고 싶은 복들입니다.  

할 수 있으면 우리 교우들이 이런 복을 누리기 바랍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굳이 이런 세속적인 의미의 복은 필요 없고 그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지 맙시다.  대단히 믿음이 좋아 보이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 신령한 복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모든 좋은 것은 신령한 복입니다.  그 복 중에는 위에서 말한 수, 부, 강녕, 유호덕, 고종명도 포함됩니다.   이런 복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불신자나 차별이 없이 누구에게나 돌아가는 삶의 복입니다.   하늘의 태양이 사람 차별하지 않고 고르게 비취고 이슬과 단비가 모든 사람에게 고르게 내리는 것처럼 세상이 말하는 그런 복들은 해 아래 사는 모든 이들이 공평하게 누리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복입니다.  

다만 그 복이 누구에게서 나오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구하고 있는 차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절간에 가서 불공하고, 어떤 이들은 계곡에 가서 촛불 켜고 치성을 드립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열심히 공부하고 부지런히 살면 출세도 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삽니다.   거기다 건강의 복까지 있어서 무병장수하다가 죽을 때도 고생하지 않고 평안히 가기도 합니다. 나름대로 천복을 누린 셈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만이 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누리고 있을지라도 그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치도 아니하고 더 나아가 그보다 정말 소중한 복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산다면 헛된 삶을 살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아침에 나누고자 하는 복은 예수께서 산 위에 올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셨던 설교 가운데 나오는 여덟 가지 복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8복이라 부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복 중의 복이라는 뜻에서 ‘The Beatitudes’라고 부릅니다. 가장 좋은 행복, 지고의 복이라는 의미로 Beatitude라는 영어식 표현에 정관사를 붙여 산상수훈에 나오는 8복을 ‘The Beatitudes’라 부릅니다.   

우리 모든 교우들이 세상에서 말하는 5복을 풍성히 누리기 바라지만 혹시 그런 복과는 상관 없이 고생스럽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실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런 것들은 지금 없을지라도 이 다음에 얻을 수도 있는 것이며 또 없다고 해서 인생을 망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8복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꼭 있어야 할 나의 것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8복은 여러 면에서 세상의 5복과 그 내용이 너무 다릅니다. 5복은 사람이 어느 정도 노력하면 손에 쥘 수 있는 덕목들이지만, 8복은 사람의 노력만 가지고 될 일이 아닙니다. 5복을 얻으면 말 그대로 일생 동안 남부럽지 않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지만, 8복을 가졌다고 세상에서 출세하고 무병장수하는 것도 아닙니다. 5복은 누구나 한 번쯤 가지고 싶어 구미가 당기는 덕목들이지만, 인간의 욕심으로 8복의 내용을 가만히 살피면 솔직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성인 성자들이나 추구하는 딴 세상의 윤리덕목처럼 보여 매력이 없어 보입니다. 어찌 가난하고 주리고 목마름이 복이고 슬퍼하고 핍박과 욕을 먹는 것이 복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나마 매번 뒤 따라오는 복의 약속이 있어서 위로가 되지만 솔직히 가난과 주림과 핍박과 욕 먹는 일은 아쉬울 것 없이 거절하고픈 것이 사람들의 본심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전하신 산상수훈(마5-7장)을 가리켜 현세에 이루어질 윤리덕목이 아니라 이 다음에 예수님 오시면 이루어질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윤리라고 이해하고 다음 세대로 넘기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죄악 세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도저히 그런 요구에 따를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이상주의적 윤리 기준은 사람으로서 이루기는 불가능한 것이니 애초부터 의미가 없다고 철저하게 무시해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가 반대로 적용되어 기독교를 핍박하는 자들이 산상수훈만은 교회 안에서 열심히 읽히고 선포되도록 허용한 아이러니컬한 예도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이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어 조선 사람들의 지식이 늘어가고 세상에 대한 눈이 떠지고 국가와 민족의식이 싹트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성경을 통해 배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와 자주의식이 일본에 대한 저항으로 표현되는 것이 두려워 목사와 교인들을 감시하고 설교와 성경을 검열하여 맘대로 읽지 못하게 하며 기독교인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서 가운데 유일하게 산상수훈의 내용만은 그들의 판단에 안심이 되어 자유롭게 읽어도 좋은 부분으로 오히려 권장할 정도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8복에 나오는 내용들이 그렇고, 그 다음에 연속되는 살인하지 말라, 형제와 화목하라, 너를 해치는 사람을 복수하지 말고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 뺨도 돌려대라. 속옷을 달라 하면 겉옷까지 벗어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함께 가라. 누가 너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면 거절하지 말고 주라. 그리고 네 이웃을 사랑하되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 뭐 이런 내용의 덕목들이 줄줄이 적혀 있으니 세상에 바보가 아니고서 어찌 이런 요구를 순순히 따를 수 있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 순사들이 식민지 조선 백성들에게는 이런 교육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읽고 그대로 살라고 권장했던 복음입니다. 힘 없고 무능한 백성들은 현실 세계에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이런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글이나 열심히 읽고 서러운 마음을 달래며 힘 있는 일본의 정책에 잠잠히 순종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마치 성경을 무슨 환각제나 아편처럼 여기고 고난의 현실을 도피하는 출구로 생각했던 사람들의 무지한 처방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산상수훈을 오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구약의 율법과 동일한 방식으로 받아들여 예수께서 가르치신 이 윤리법칙을 열심히 지켜 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크게 잘못이 아닌 듯 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오해에서 비롯된 생각입니다.  산상수훈이란 구약의 율법을 좀 더 세련되게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이것을 잘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율법주의적 오해에서 나온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천국 윤리를 선포하심은 결국 사람이 율법을 준수함으로 의로움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깨닫게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주심은 오직 그 율법을 제정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구원을 완전히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믿고 의지함으로 십자가의 복음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나아오도록 초청하심입니다.   

산상수훈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읽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산상수훈을 따라 사는 것이 분명 복 있는 사람의 길이지만 구약의 율법처럼 산상수훈의 요구를 다 이룰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산상수훈을 따르되 순서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이처럼 실천 불가능한 고난도의 윤리강령을 내 스스로 이룰 수 없고 오직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은혜로만 가능함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복이 됩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여덟 가지의 복의 내용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찌 가난함과 애통함과 온유함, 그리고 주리고 목마름 같은 부정적인 덕목들이 이 살벌한 약육강식의 세상적인 기준에서 복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무능하고 비굴한 종교인들의 현실도피와 소극적인 처세술이고 자기 합리화를 위한 탈출구에 불과하다는 말로 외면당하기 십상인 교훈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실 산상수훈은 교회 밖의 불신자들을 전도하기 위한 복음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불리는 교인들이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강령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분들 중에 어떤 분들에게는 이 말씀이 여전히 어렵고 가슴에 와 닿지 않으며 나와는 거리가 먼 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허무맹랑한 가르침이라 여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왜 이런 실천 불가능한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주고 부담을 지우셨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신 분이 이런 실천 불가능한 무거운 윤리강령을 제시한 것은 이율배반이 아닌가 질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너그럽고 사랑스런 주님의 마음, 곧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문제와 아픔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짐을 대신 감당하시는 주님께로 나오라는 초청입니다. 예수께서 명하신 팔복은 설날 아침에 어른들이 손아래 사람에게 던져주는 5복 같은 복이 아닙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근심 걱정이 없이 복 받아 평안을 누리는 또 하나의 비결을 알려주는 열쇠로 주신 것도 아닙니다. 이 복은 복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그 본뜻이 제대로 이해도 되고 또 은혜가 되며 나에게 진정한 복이 됩니다.  

오늘 아침에 소개하는 8복은 여덟 가지 내용을 하나하나 분석하여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을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기에 나오는 8복을 비롯하여 산상수훈 전체의 말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듭남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누리는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 중에 누가 산상수훈의 요구를 충분히 만족시키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미국의 강해설교가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은 만일 누군가 그렇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산상수훈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며 거짓말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산상수훈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사람이 스스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율법과 마찬가지로 산상수훈의 기준 역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하고 무능하며 더럽고 추한 죄인인가를 깨닫게 하는 거울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자신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죄의 짐을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도록 우리를 맹렬하게 몰아가는 복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듭난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구별된 삶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이 복을 좇아 살아야 합니까?  예수께서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친히 이런 삶을 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들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시며 우리의 대변자로 하나님 앞에 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나를 위하여 하나님의 엄청난 요구를 대신 만족시켜주신 그분을 따르고 그분의 삶을 닮아간다는 고백입니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감사 고백에서 나오는 삶의 자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결코 나의 능력으로 내 마음이 청결하게 되고, 온유한 마음을 소유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면 내 자신의 죄가 얼마나 두렵고 엄청난 것인지 미처 깨닫지 못하여 교만하고 스스로 의로운 척하고 살 뻔 했는데,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발견하고 난 이후 비로소 나의 모습이 너무 비참하고 고통스러워 애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 간절히 찾는 사람이 누리는 복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나의 전부이며 그분에게서 내려오는 의로움만이 나를 온전하게 할 수 있다는 빈 마음, 가난한 마음에서 나오는 간절한 목마름이고 주림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가난함과 애통함과 온유하고 주리고 목마름을 경험하는 거듭난 사람이 십자가에서 나를 향한 사랑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긍휼을 비로소 체험하게 됩니다. 그 긍휼은 절대로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나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조의 손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긍휼을 체험한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에게 그 긍휼을 아주 조금씩이나마 나누며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이 나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었습니까? 아니, 나에게 먼저 긍휼을 베푸신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두 마음을 품은 가식적인 삶을 살기보다는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그 은혜 얻기를 사모하는 빈 그릇처럼 정결하게 잘 닦여진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 얼굴 뵙듯 나의 이웃을 정결한 마음으로 대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힘씁니다.  이런 마음이 진정한 화평을 추구하고 이런 화평을 이루는 사람이 참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세상에 살아가셨던 이런 식의 삶의 방식과 가르침은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결코 환영 받지 못하였습니다. 업신여김을 당하고 시기와 미움을 받았으며 핍박과 조롱을 당하였고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자신의 삶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고 너희가 나의 제자가 되려면 나의 길을 따르며 나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은 복이 있으니 하늘에서 상급이 크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자세이며 그런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복의 내용들입니다.   

이렇게 주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닮는 삶으로 첫째는 자신 스스로에게 복이 될 것이며,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자신을 태우고 녹이며 이웃을 복되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게 됩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닮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영광을 돌리는 자리에 있게 됩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에게 즐거움이고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영광스런 복입니다. 

그렇다면 8복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의도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광스런 복을 누리기 위하여 우선 먼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발견하고 절대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르라는 영광스런 초청입니다. 설 명절을 지내며 일년 내내 복된 생활을 원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주 안에서 이런 복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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