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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내부의 적 (느 5:1~5) ; 생각, 말,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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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내부의 적 (느 5:1~5)


저에게 가끔씩 새롭게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작자 미상의 미국 시 ‘The Cold Within'입니다. 그리고 그에 관계되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의 추위’ 라고 번역될 수도 있는 이 시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여섯 사람이 추운 어느 날 우연히 한 곳에 모여 고립되게 됩니다. 그 여섯 사람 앞에는 모닥불이 하나 있습니다.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여섯 사람은 각자 나무 지팡이를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닥불이 꺼져갑니다. 나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두다 나무 지팡이를 가지고 있어서 그 나무 지팡이를 집어넣으면 사그라지는 모닥불이 다시 붙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이 점점 꺼지는 것입니다. 여섯 사람 모두 다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습니다. 

첫 번째 한 여자는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자기 나무 지팡이를 꽉 움켜쥐면서 ‘내 지팡이를 태워서 저 흑인을 따뜻하게 해준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말하면서 지팡이를 내놓지 않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남에게 베푼다는 것은 교회에 나가서 하는 일이지 세상에서야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나?’ 라고 말하면서 나무 지팡이를 더욱 더 움켜쥡니다. 세 번째 사람은 남루한 옷을 걸친 사람입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런 게으름뱅이 부자들을 위해서 왜 내 것을 있는 희생시켜야 돼, 어림없는 일이지 있는 사람들이 더 내어놓아야지 없는 나 같은 사람이 내놓을 수 있나?’ 

네 번째는 부자입니다. 그는 지금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지금까지 모은 재산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이렇게 힘들게 쓰지도 않고 모아둔 이 귀중한 재산을 한 푼도 축내지 아니하고 오히려 날이 가면 갈수록 조금 더 모을 수 있는가 이것만 골똘하게 생각합니다. 불이 꺼져서 지금 자기가 죽어가고 있는지, 다른 사람이 죽는지 생각하지 못합니다. 다섯 번째는 흑인입니다. 마음속에 복수의 감정이 뜨겁게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내가 같이 죽는 한이 있어도 백인들을 위해서는 내놓지 않겠다고 백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있습니다. 같이 죽자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자기 지팡이를 내놓을 리 없습니다. 여섯 번째 사람입니다. 자기 지팡이를 내어 불을 피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다 지팡이를 가지고 있는데 자기만 지팡이를 내어 불을 피운다는 것이 너무 억울합니다. 결국 이 사람은 나무 지팡이를 집어넣지 못합니다. 

그 시는 이렇게 결말지어갑니다. 결국 그들은 모두 얼어 죽었다. 지팡이를 움켜쥔 채……. 그리고 마지막을 They didn't die from the cold without, They died from the cold within. 바깥의 추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 아니라, 마음의 추위로 말미암아 그들은 모두 얼어 죽었다는 뜻입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세 차례에 걸쳐 유대로 다시 돌아왔는데 세 번째 돌아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성벽을 재건하였습니다. 당시 성벽재건이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로서는 성벽이 재건되든 아니든 별 상관없는 것이라 생각되지만 그 당시는 성벽이 없으면 백성들의 안위를 돌볼 수 없었습니다. 외적이 마음대로 침입하여 강탈하고, 도둑도 마음대로 도둑질하기 때문에 성벽재건이란 대단히 중요한 일인데 이 일을 함에 있어서 많은 방해가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그 모든 방해에도 불구하고 잘 진척시켰습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대민족들 간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외부의 문제는 잘 막았는데 안에서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이 일이 최고의 지도자 느헤미야의 귀에 들려옵니다. 이때 백성들은 페르시아에 세금을 내기 위해서 도탄에 빠졌습니다. 흉년이 들어 세금을 낼 돈이 없었으므로 가옥과 토지를 저당 잡혔지만 갚지 못해 가옥과 토지를 빼앗기는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더한 것은 빚을 갚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 이방인들에게 있었던 일들인 아들과 딸들이 다른 사람 집에 종으로 팔려가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 소식이 느헤미야 귀에 들려온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기가 막혔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포로에서 돌아왔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이럴 수 있는가? 라고 통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적은 외부에 있는 것만 아닙니다. 적은 내부에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니 자주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훨씬 더 무섭습니다. 그리고 내부의 적은 공동체 내부의 적뿐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나라나 사회나 직장 같은 공동체 속에 있는 내부의 적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속에도 내부의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무서운 것은 우리 자신 속에 있는 내부의 적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여러 가지가 많습니다. 먼저 욕심이 있는데 욕심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그리고 시기심이 있습니다. 해당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이 시기심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또한 경쟁이 있습니다. 특별히 남성들에게는 경쟁심이 치열한데 이 경쟁 때문에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한 채 아등바등 하다 세상을 끝내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분노, 화내는 것입니다. 참 무섭습니다. 인간은 분노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분노 중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한 의로운 분노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인간인지라 감정적인 분노도 있을 수 있습니다. 좋지는 않지만 우리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다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감정적인 분노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감정적인 분노이든지 혹은 의로운 분노이든지 간에 이것을 잘 처리해야합니다. 감정의 분노도 처리만 잘하면 괜찮습니다. 마찬가지로 의로운 분노도 잘못 처리하면 나 자신을 힘들게 하고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고 가족을 힘들게 하고 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잘 아십시오. 분노는 그것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별로 좋지 않는 말이지만 ‘분노’ 라는 단어까지 붙여줄 수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분노’ 라는 단어에 ‘천박한 흥분’이라는 말을 붙일 수밖에 없습니다. 분노라는 것도 별로 좋지 않지만 그 단어조차도 붙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가정들 그리고 붕괴된 가정들을 연구 조사한 결과 그렇게 된 까닭의 제 1 원인이 분노를 잘못 처리한 것이라고 합니다. 많은 가정들이 분노만 잘 처리하면 됩니다. 남편이 화가 나고, 아내가 화가 나고, 때로는 자식이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이때 말 한 마디만 잘하면 끝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여 이들 간의 관계가 깨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부지간에도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남편이든 혹은 아내이든지 간에 미안하다,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이 소리를 하지 못해 파탄 나는 가정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한테 가르쳐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화목한 가정을 위해서 제일 먼저 배워야할 것은 분노의 처리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분노를 만들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가기 때문에 기대하기 힘듭니다. 어쩔 수 없이 화를 낼 수 있지만 그 화를 잘 처리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젊은 사람이든 나이든 사람이든 누구든지 그렇습니다. 

유능한 지도자는 이것을 잘 처리합니다. 그리고 인격자도 이것을 잘 처리합니다. 아무리 괜찮은 사람도 이것을 잘못 처리하면 유능하지 못하고 아주 추하고 초라한 지도자가 되고, 인격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조금 모난 사람 같아도 이런 것만 잘 처리하면 그 사람은 유능한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노란 아무리 좋은 분노라고 할지라도 오래 가지고 있을 것은 아닙니다. 빨리 처리해야합니다. 분노를 오래 가진다는 것, 오래 가지고 간다는 것, 기억에 남는다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그것은 분노에게 지는 것입니다. 분노에 지지 마십시오. 화에게 지지 마십시오. 아무리 그럴듯한 포장이 있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화에게 지지 마십시오. 남편에게 대한 것, 자식에 대한 것, 아내에 대한 것, 또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에 지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분노에 지는 것은 그 순간 내 자신의 주인이 내가 되지 못하고 분노가 주인이 되기 나의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히 처리를 해야 합니다. 이것을 잘 생각해야합니다. 분노에 지면 지금 당장은 큰소리 치고 대단한 사람 같지만 아주 초라하고 추한 모습이 됩니다. 그 때 거울을 한 번 보십시오. 여러분 얼굴이 얼마나 초라한지 모릅니다. 분노에게 지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주인 자리를 분노에게 내어주지 마십시오. 

분노는 대단한 에너지를 만들어냅니다. 참 큰 힘이 있습니다. 어마어마합니다. 거기서는 대단한 힘이 나므로 참으로 무섭습니다. 이 에너지를 잘 처리해야합니다. 이 에너지를 가두어둘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이든지 터져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나갈 때 나가지 못하면 풍선처럼 터지고 말아버립니다. 이 터져 나오는 에너지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사람은 인생이 달라지고, 가정도 운명이 달라지고, 사회도 회사도 공동체도 운명이 바뀌어 버립니다. 

감정적인 대응, 이것은 일을 처리하는데 가장 어리석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혹시 이런 일이 있을 때 한 번 더 생각하고 또 생각하십니다. 그때 제일 좋은 말은 내일 하자는 것입니다. 내일이 되면 또 내일이 있지 않습니까? 특별히 아버지에게 부탁드립니다. 자식들에게 내일 하십시오. 내일 하면 됩니다. 내일, 내일 조금만 더 가면 그 자식들이 아버지가 됩니다. 그때가 되면 아버지 심정을 다 알게 됩니다. 좀 참으십시오. 지도자 되시는 여러분들 내일 하십시오. 사람들은 다 양식이 있고 나름대로 지각이 있기 때문에 내일이면 다 압니다. 혹 내일이 되어도 잘 모르면 그 다음 내일이 되면 반드시 알도록 되어있습니다. 

내일 하지 못하고, 나중에 하지 못하고, 한 번 더 참지 못하고 터져나가면 감정이 폭발됩니다. 감정이 폭발하면 그 감정은 이성을 건드리지 못하고 감정을 건드립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이성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감정으로 대응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그 사람은 일의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것이 더 나은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만 방어하게 됩니다. 인간 본능입니다. 자기를 건드린다고 생각하게 되면, 자기를 공격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자기를 방어하게 됩니다. 자기를 방어하게 되면 사람들은 방어에 그치지 않습니다. 최고의 방어가 곧 공격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방어에 그치지 않고 공격을 합니다. 이렇게 가정이 깨어지고 공동체가 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감정이 격해질수록 이성적으로 되어야 합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일인데 저는 이 이야기를 참 재미나게 들었습니다. 한 신사가 바빠서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페스트 푸드를 먹기로 하였습니다. 그것도 제대로 된 페스트 푸드를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서 차에 들고 가서 먹어야했습니다. 균일가인 페스트 푸드 가게였으므로 빨리 들어가야 했기에 주차장에 급히 차를 세우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빵’ 그리는 신경질적인 크락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여자가 창문을 열고 욕을 하는데 이 사람이 평생 들어본 욕 중 가장 심한 욕을 들었습니다. 

저도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중곡동에서 차를 몰고 가다 잘못된 길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트럭 한 대가 뒤에서 빵빵 거리다 제가 제대로 비키지 못하니 창문을 열고 욕을 하는데 얼마나 심한 욕을 하든지 10년이 훨씬 넘었는데 그대로 기억이 날 정도였습니다. 

이 사람도 자기 평생 듣지 못할 욕을 들은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했지만 그래도 한 마디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신사는 신사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창문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가슴을 진정시켰습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사람의 음식 값을 대신 내주자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계산대에서 그 사람의 음식 값을 치르자 판매원이 “아마, 가족이신가부죠?”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신사는 ‘저런 여자 만났다간 내 명에 못살지요’ 라는 생각을 하면서 “천만에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여자의 음식 값을 치르고 난 후 그 사람의 반응이 궁금해서 지켜보았습니다. 판매원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자초지종을 들었을 그 여자는 완전히 충경을 받아 얼이 빠진 사람 같았습니다. 그러자 조금 전에 그렇게 분노가 들끓었던 그 신사는 분노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참으로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입니다. 한 번만 더 생각하면 됩니다. 분노가 터져나갈 때는 내가 잘못한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이란 감정으로 공격받으면 감정으로 대응하게 되고 잘잘못을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이 분노를 잘 처리했습니다. 느헤미야도 마찬가지로 사람인지라 분노가 생겼습니다. 이럴 때는 의분이지만 그 의분을 오래 가둬두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가 분노한 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6절에서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노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참으로 인격자이고 대단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분노를 그대로 발산하지 않고 깊이 생각했다(7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좋은 말입니다. 화내기 전에, 생각하기 전에, 행동하기 전에 거꾸로 생각하기도 하고 뒤집어서 생각하기도 하고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영국에 오말이라는 유명한 검술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검술솜씨가 아주 뛰어났는데 그가 유명한 것은 인격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오말은 최고의 검술사가 누구인가를 가리기 위해 최대의 라이벌인 어느 검술사와 대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상대방 검술사가 실수하여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말이 이길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인데 그 순간 말에서 떨어진 상대방 라이벌이 오말에게 침을 뱉었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 쳐다보고 있는 그 순간, 오말은 칼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내일 우리 다시 합시다. 오늘은 그만 끝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이유를 물었습니다. 오말은 “나는 화가 났을 대는 절대로 검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방금 저 분이 내게 침을 뱉는 순간 화가 너무도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가지고 겨루어서 이긴 경기에서는 절대로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검을 내려놓았고 내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경기는 그 다음날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말에서 떨어진, 오말의 얼굴에 침을 뱉은 그 경쟁자가 오말의 제자가 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길은 이렇게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도자, 인격자는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아주 훌륭한 아버지, 특별히 나라의 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물론이겠지만 정당 지도자들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깊이 생각하되 당리당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귀한 것을 위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깊이 생각하는 저들이 되었으면 너무도 좋겠는 아쉬움이 참 많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의분을 충분이 터뜨릴 수 있는 분노였지만 깊이 생각하고 그 다음 수순에 들어갔습니다. 느헤미야는 먼저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일방적으로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그런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말하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때 특별히 조심해야할 것은 뒤에서 비난하는 것입니다. 뒤에서 비난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지도자, 인격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충분한 해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본문 7절에 대회를 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8절) 라고 물었습니다. 신문한 것입니다. 이렇게 기회를 준 것인데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방에게 같이 이야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이런 자리를 열어주어야 하고, 만약 지도자 자신이 잘못했다면 사과할 줄도 알아야합니다. 아내에게도 자식에게도 사과할 줄 알아야합니다. 이렇게 한 마디만 하면 자식들이 넘어지는데 이 사과에 인색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난 후, 그 사람들이 충분히 해명할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납득할 만한 말을 하지 못하면 그때서야 여러분이 잘못했다고 책망할 수 있습니다. 이런 느헤미야를 보고 배울 참으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일에 있어서 느헤미야는 늘 앞장서고 모범을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성경을 보면 느헤미야는 먼저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7절) 그들에게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8절)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잠잠하여 말이 없었다(8절)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해명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납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느헤미야는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해할 것이 아니냐(9절) 라고 나무랐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만 끝난다면 훌륭한 지도자가 되지 못합니다. 훌륭한 지도자는 이것을 뛰어넘습니다. 느헤미야는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치라(10절).. 

우리는 이자를 받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이자를 주고 받는 것입니다. 적당한 이율은 정부에서도 보장해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어려울 때 나라의 지도자가 나는 먹고 살 것이 있으니까 이것 정도는 포기하였다고 말한 것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내 형제들과 나와 함께 일한 부하들도 다 그렇게 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4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은 대단한 모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년부터 제삼십 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14절).. 12년 동안 받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나는 녹을 받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것이지만 이런 일이 있으면 돈 있는 사람들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소위 투자를 합니다. 노예도 종도 싼 값으로 사들이는 일을 하는데 느헤미야는 자기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모본을 보여준 것입니다. 도리어 개인 돈을 털어서 나라의 일에 개인 돈을 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어른의 모습입니다.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백오십 명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15-17절).. 자기 개인 돈으로 일하는 감독자들을 대접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분입니다. 배워야합니다. 그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쥬’입니다. 

하나 더 보겠습니다. 8절을 보면 대단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자기 힘으로 속량될 수 없는 종들을 자기 개인 돈을 털어서 그 사람들을 종에서 해방시켜주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영화 ‘쉰들러 리스터’를 생각합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연합군이 승리하여 나치들은 물러나고 러시아군들이 들어올 때 유대인들은 금이빨을 빼서 반지를 맞춰서 쉰들러에게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그런데 쉰들러는 그렇게 많이 수고했음에도 자기 앞에 있던 자동차를 보면서 이 자동차만 팔았으면 열 사람을 더 구할 수 있었는데 라고 생각하였고, 자기 옷에 있었던 핀을 보면서 이 핀을 팔았다면 두 사람은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후회했습니다. 

느헤미야가 그러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기회를 이용해서 싼값으로 종을 샀습니다. 그때는 종을 팔수 있었으므로 종을 사는 것은 일종의 투자였는데 느헤미야는 도리어 자기 돈으로 해방시켜주는 일들을 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할 때, 특별히 나에게 잘못할 때 반응하는 데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권리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잘못하고 있을 때 저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이 미치는가를 생각하고, 특별히 나에게 잘못하고 있을 때 내 권리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소인배라고 이야기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을 때 자기 의무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이런 사람이 어른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러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높은 자리를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많은 재산을 모았는데 다른 사람이 다 힘들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시대에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얼마나 필요한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절절한 심정으로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까? 

귀 있는 여러분들 들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와서 들을 소리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들을 소리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 시간에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시는가? 느헤미야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어렵습니다. 

대단한 하나님의 사람 느헤미야, 이 느헤미야는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었는가? 그 답을 오늘 5장 마지막 절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19절) 라고 기도한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기도를 잘못 생각하면 무슨 대가를 바라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기도의 뜻은 내가 이렇게 한 것은 전부다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에서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 인격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서원하는 것은 별 것 아닙니다. 어떨 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즉 내 모든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하나님 앞에서 할 때 이럴 수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지도력을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하십시오. 생각도 말도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느헤미야에게 주셨던 그 지혜와 지도력을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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