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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슬에 매인 바울의 기쁨 (빌 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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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에 매인 바울의 기쁨 (빌 1:12~18)


(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오늘 말씀처럼 바울의 형편을 잘 드러내는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12, 14, 17절에 연거푸 ‘나의 매임’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감옥이 에베소 감옥인지 로마 감옥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습니다. 진보적인 학자들은 에베소 감옥을 주장하고 보수적인 학자들은 로마 감옥을 언급합니다. 그 감옥이 로마든 에베소든 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매우 불편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감옥은 고대의 감옥에 비하면 양반입니다. 고대시대에는 감옥 안에서도 사슬에 묶어 놓습니다. 사도행전 28장에서 로마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 있던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쇠사슬에 매였다”(행28:20)고 표현합니다. 아마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이 감옥에서도 쇠사슬에 매여 있었을 것입니다.

단지 육신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판결 결과에 따라 죽음에 이를 수도 있기에 정신적 고통도 매우 심했습니다. 에베소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매일 자신을 부인한다는 심리적 차원을 의미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매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쓴다는 표현입니다. 

이어지는 15장 32절에서는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은 에베소 감옥을 말합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것은 거의 죽는 줄 알았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지금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바울의 형편입니다. 바울은 누구를 위로할 형편이 못 됩니다. 자기 한 몸 추스르기도 힘들고 오히려 위로를 받아야 할 형편입니다. 그러나 이런 형편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18절입니다.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기뻐한다는 말을 두 번이나 거듭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몸은 비록 사슬에 매였지만 속에서는 그 속에서는 기쁨이 솟아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의 위대함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사도 바울의 이 기쁨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형편이 좋고 좋은 일이 있을 때 기뻐하는 것은 구지 신앙이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위대함은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기쁨이 솟아나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모두가 어려워하는 이때에 신앙인답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만 위기에서 예외가 되고 나만 축복받는 것입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수입니다. 믿지 않는 자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인다움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나 못합니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희망을 말할 수 있다는 데 신앙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뻐하는 이유와 그 근원에 대해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좀 더 자세히 살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의 진보

사도 바울이 기뻐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복음의 진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일선에서 복음을 전하던 대사도가 잡혔다는 소식은 신도들을 위축시켰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14절입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바울이 잡히니까 다 달아나거나 잠잠해진 것이 아니라 바울이 없는 빈자리를 자신들이 채우며 열심히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작은 수가 아니라 다수가 그랬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그래요. 핍박이 있고 어려움이 있을수록 복음은 더 흥왕하게 증거됩니다. 교회 박해기에 터툴리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희 관리들은 우리 교우들을 십자가에 매달고 고문하고 때리고 죽이라. 너희들이 하는 핍박이 극심할수록 우리들은 더욱 더 큰 열매를 거둔다. 참으로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 교인들의 씨앗이니라” 순교자의 피는 마치 씨앗처럼 피가 뿌려진 곳마다 교회가 서고 복음을 흥왕하게 만듭니다. 핍박이 있을 때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면도 있지만 오히려 그 마음이 더 비장해지기도 합니다. 핍박은 그 동안 미적거리거나 미지근했던 사람들을 차갑거나 뜨겁거나 확실히 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적거리던 사람이 열심을 낼 때 그때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열심을 냅니다. 아마 바울이 갇혀 있던 곳의 성도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사슬에 매였지만 기뻐합니다. 바울의 빈자리를 다른 작은 바울들이 메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어떤 핍박이나 환란이 와도 그 때문에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내가 없다고 해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세우셔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하나님의 역사는 측량할 길이 없나이다.’ 하며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감옥이라는 상황은 복음의 후퇴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보를 만들어냈습니다. 바울 자신에게서는 두 가지 면에서 그랬습니다. 하나는 13절에서 보듯이 온 시위대 안에 복음이 알려졌습니다. 시위대는 친위대를 말합니다. 로마 감옥이라면 황제의 근위대를 말할 것이요, 에베소 감옥이라면 이 지역의 총독 관저에 있는 관리들일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열심히 복음을 전했고 그들 중 일부가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역사는 이미 빌립보 교회 개척 과정에서도 경험했던 바입니다. 

빌립보에서 바울을 감옥에 가두고 관리하던 간수가 바울과 실라가 밤중에 찬양할 때 착고가 풀리고 옥문이 열리는 놀라운 기적을 봅니다. 이어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는 바울의 말을 듣고 자신과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기회가 아니면 사실 어떻게 바울이 정부 관리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상황을 기회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재수가 없어서 아니면 실수해서’ 하며 원망하지 말고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십시오. ‘하나님께서 새로운 만남을 주시려고 이런 환경으로 인도하셨구나.’ 하며 희망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94년에 끔찍한 방법으로 사람을 다섯 명이나 죽였던 지존파라는 살인마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회개시켰던 분이 사랑의 교회 이재명 집사란 분입니다. 이분은 쉼 없이 복음을 전하다 어느 날 그만 폐암에 걸리고 그것도 말기에 가까운 3기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 정도 상황이면 좌절할 만도 한데 오히려 감사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인정하였습니다. 이분이 이후 50여 차례에 이르는 항암 치료를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매일 하루 두 번씩 예배를 드리며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분을 다른 암환자들을 위한 전도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암환자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암환자와 그 가족들 60여명을 주님을 영접하게 하였습니다. 나중에 이분은 완치된 후『암, 너 잘못 걸렸어』란 책까지 쓰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감사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암이나 어떤 극단의 환경도 그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만남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어떤 절망스런 상황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절망하지 마세요. 헬렌 켈러는 “한쪽 문이 닫히면 하나님은 다른 쪽 문을 열고 계신다. 우리는 닫힌 문만 바라보다 등 뒤에 열린 문을 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감옥은 새로운 환경일 뿐입니다. 바울은 그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전도대상을 만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어 기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변명함

바울이 기뻐하는 다른 하나는 바울이 감옥이라는 환경에서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고, 복음에 대해서 더 체계적으로 정리를 확실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16절에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을 변명한다는 것은 복음을 변증한다는 말입니다. 법정에서 자기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80년대에 “항소이유서”라는 것이 유행을 했습니다. 주로 운동권 학생들이 자신이 왜 운동에 뛰어들게 되었고 한국사회에 대한 자신의 시각과 비전은 무엇인지를 최후진술 격으로 법정에 제출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자신들의 운동의 근거를 화인하게 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이런 재판의 상황과 계속되는 외부의 공격을 받으며 복음은 더 정교하게 되고 더 날카롭게 됩니다. 사도행전 22장에서 26장까지는 사도 바울의 법정 변론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법정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예수를 믿고 사도가 되었는지 두 번에 걸쳐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소상히 밝히며 그것을 증거하는 계기로 삼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잡히고 가이사랴에 있는 2년은 마치 버려진 시간처럼 보입니다. 아닙니다. 이 기회를 통하여 바울은 복음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법정 진술을 통하여 이후 초대교회 교인들이 법정에 끌려갔을 때 어떻게 증거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재판의 기록들은 기독교의 복음이 사회에 전혀 해롭지 않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감옥에서의 이런 경험들이 사도 바울 사상의 확립이나 로마서와 같은 복음에 대한 대 논증서를 기록하는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또한 감옥에 있으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더 강렬해 집니다.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푯대로 달려가는 삶으로 결정합니다.

감옥이라는 상황은 열악하지만 그것은 결코 버리거나 잊어야할 고통의 순간만은 아닙니다. 이런 고난이 있었기에 한 인간의 사상이나 교회의 신앙은 더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빙산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빙산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은 30%에 불과합니다. 70%는 잠겨 있습니다. 이 감추어진 70%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빙산의 크기와 무게를 결정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감옥과 같은 시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바벨론 포로기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망하여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성경에는 바벨론 포로기 상황이 잠깐씩 언급되지만 학자들은 이 바벨로 포로기를 이스라엘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파악합니다. 바벨론 포로기의 과정을 통하여 대부분의 성경이 완성이 되었습니다. 주요하게는 모세오경입니다. 물론 모세로부터 내려온 율법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율법들은 성문화 되지 않은 채 구전으로만 전해지거나, 성문화 되었어도 파편화되어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 율법들을 모아서 모세오경이라는 책으로 만든 것이 바로 바벨론 포로기 때입니다. 책으로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출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이 이것을 모세오경으로 인정하기까지의 동의의 과정과 운동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때에 역사서도 기록이 되었습니다. 

신명기서부터 여호수아, 사무엘 상하, 열왕기상하를 학자들은 신명기 역사서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신명기 말씀에 근거하여 역사가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역사가 그렇듯이 역사는 일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 기록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민족인데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들은 왜 자신들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는지 말씀을 통해서 추적했고 그것이 바로 성경에 있는 대부분의 역사서들입니다.

회당이나 안식일 제도 등이 정비된 때도 바로 이 바벨론 포로기 때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는 더 이상 우상숭배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의 마음판에 율법이 새겨졌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유대교의 모습이나 구약성경의 체계는 바로 보이지 않는 바벨론 포로기라는 감옥과 극한의 상황이 만들어내었다 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말라기 이후 예수님이 오시기전까지 약 400년 동안의 침묵기가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침묵기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결코 침묵의 시기가 아닙니다. 메시야의 탄생을 기다리며 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했던 시기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페르시아와 헬라의 통치 이어서 로마의 통치에 이르는 암흑기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에 하나님나라에 대한 대망이 강렬하게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구지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림은 모든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도 이 침묵기에 완성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당연히 생각하는 천국과 부활에 대한 것은 구약 성경에서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바로 이 천국과 부활에 대한 비전도 바로 이 침묵기에 형성이 되었습니다. 천사론과 선교적 사명에 대한 자각도 이 때 생겼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고난의 때가 결코 회피하거나 잊혀져야 할 때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신년초에 토정비결이나 금년도 운세를 많이 봅니다. 신앙인들도 심심풀이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금년 한 해 삼재(三災)가 끼었다는 말입니다. 삼재가 낀 때에는 사람들은 조심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금년도 취직운이나 시험운이 없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맞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신앙적으로도 틀렸고, 이치적으로도 별 소용이 없는 운수보기입니다. 

신앙인들은 고난의 때도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단순히 피해야 될 것만은 아님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때는 물론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이 고난을 거쳐야 사람이나 사업이나 단단해집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이나 인격은 더 성숙해집니다. 물론 삼재가 끼어서 어떤 일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안 좋은 역경 속에서도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발판이 되어서 내년이나 그 후 어느 때에 아름다운 열매로 돌아옵니다. 고난의 때는 무조건 피하고 외면해야 하는 때가 아닙니다. 우물을 더 깊이 파야 할 때입니다. 지금의 노력이 반드시 훗날 아름다운 열매로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난국의 상황도 그렇습니다. 경제적으로 위기요, 정치적으로는 극심하게 분열되었습니다. 민주주의의 위기라 할 정도로 공권력의 횡포는 심하고 정부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가까운 용산에서 일어난 철거민들의 불행한 사태는 우발적인 일이 아니라 어쩌면 갈등 상황에서 빚어진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저 경제 위기가 빨리 지나도록 기도만 해야 합니까? 아니면 또 한 번의 촛불 집회를 통하여 정부에 각성을 촉구해야 합니까? 물론 이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정말 겉모습만 바꾸는 싸움에 불과합니다. 경제위기 위기하지만 우리가 IMF 사태를 맞은 지 채 10년도 안 되어 똑 같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정치도 이 사람 세웠다가 싫으면 또 다른 사람 세웠다가 얼굴만 바꾸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마리 앙뜨와네트와 그 시녀의 유명한 대화가 있습니다. 마리 앙뜨와네트가 시녀에게 혁명이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시녀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혁명은 제가 왕비가 되고 왕비님이 시녀가 되는 것입니다.” 

참 정곡을 찌르는 대답이라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위 아래만 바꾸어서는 사회에 진정한 변화가 없습니다. 세상을 바꾸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내 자신을 바꾸어야 합니다. 계속 시소게임만 하지 말고 지금의 경제체제에 대해서 심각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해서 불평등도 없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분들도 자신의 정권만 유지하려 들지 말고 보수가 이런 식으로만 해서 한국 사회에 발전이 있을까? 진보적인 분들도 우리가 다시 집권하면 정말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가 고민해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은 우리 정치나 경제가 사방으로 포위된 감옥 같은 상황과 같습니다. 이 때는 깊은 성찰을 통해서 자신의 인격을 다지고 하나님의 뜻을 근본적으로 물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할 때만이 복음의 진보가 있듯 우리 인생과 사회에도 진정한 진보가 있게 될 것입니다.

386 세대가 비판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찰이 없습니다. 386세대는 이제 좋든 싫든 우리 세대의 주류입니다. 그들이 대한민국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80년대 느꼈던 부자유함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소망들을 이제 무엇보다 자신 안에 실현해 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386은 너무 빨리 권력의 자리에 갔고, 내적 성찰보다는 파워게임에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자기 자녀들을 누구보다 학원이나 선행학습으로, 조기유학으로 몰아가면서 대한민국 교육을 개혁하겠다는 것은 표리부동한 일입니다. 그 주장에 전혀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감옥의 시기, 곧 어려움의 시기를 잘 보내야 합니다. 이 때는 생각해야 하는 때이고 성찰해야 하는 때입니다. 이런 성찰이 우리 인생과 사회의 진보를 만들어 냅니다. 


시기와 다툼으로 일하는 사람들

바울이 이렇게 기뻐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큰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은 15절 이하의 말씀에서 잘 나타납니다. 바울이 갇히고 난 후 착한 뜻으로 또 사랑의 마음으로 더 열심을 내어 복음을 전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와 반면에 바울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또한 복음을 전했는데 그 동기는 투기와 분쟁심이었습니다.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저들이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고 평가합니다. 이들이 분명히 누구인지는 파악이 잘 되지 않습니다.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바울에 반대 하는 세력이고 이들 또한 신앙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더 소란케 할 목적으로 복음을 전했을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들은 사도 바울에 대해 반대하다 그가 감옥에 갇히니까 교회 내에 자기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열심히 복음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마음을 더 괴롭게 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 수준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시기하며 옹졸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사도 바울도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열심을 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도 바울은 마음이 옹졸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목적은 자신의 세력 확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시기하는 작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오로지 생각했던 것은 그리스도였습니다. 어찌되었든 그리스도가 전파되었기에 그는 그들의 동기가 비록 시기심과 분쟁의 목적으로 하였다 할지라도 언짢아하지 않았습니다.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도가 전파되기에 그는 상관없고 오히려 기쁘다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넓은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보다 크고 영원한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가족보다 민족을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이 더 넓습니다. 민족보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민족주의의 편협성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이나 명예보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사람이 그 마음이 더 넓고 자유롭습니다. 

한국에 수많은 교단으로 분열되어 있고 사회나 교회적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하나 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보다 물질이나 세상에 대한 욕심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리나 기득권을 빼앗길까 염려합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했다면 진작 교단의 장벽은 훌훌 털어버렸어야 할 것입니다. 태양빛을 본 자는 촛불을 가지고 싸우지 않습니다. 부모는 아이들처럼 먹을 것 가지고 싸우지 않습니다. 관심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세상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연연해하거나 시기하고 다투기까지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를 푯대로 달려가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이름은 사라질지언정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또한 바울에게는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시기로 하든 다툼으로 하든 전해지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요, 하나님 말씀은 자체가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길을 갈 것이며 그 뜻을 이룰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55:10-11) 하나님 말씀은 인간의 형편이나 의도가 어떠하든지 자신의 뜻을 이루어갑니다. 이런 확신이 있기에 바울은 기뻐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사도 바울의 자신감은 자신 스스로의 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런 신뢰가 있을 때 우리에게 여유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일을 이루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기쁨으로 우리 인생의 길을 달려가며,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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