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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 (마 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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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 (마 16:13~20)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개혁을 한다는 말 자체는 무엇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 됩니다. 나빠진 상태를 새롭게 만든다는 뜻으로 리뉴(renew), 리스토어(restore, 리프레시(refresh), 리노베이트(renovate) 이런 말들을 써서 이 날을 기념합니다.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어떻게 잘못 되는가 여기에 대한 신학적 대답은 지상의 모든 교회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교회를 세우셨지만 교회 나오는 교인들은 모두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모여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다보니까 교회의 기본 진리를 변질시킬 수 있고 어떤 때는 망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훌륭하게 발전시킬 수도 있고 빛을 발하는 교회를 만들 수도 있었던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보통 교회사 연구가들이 결론을 내립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교회의 모습이 가장 번영했고 변질되었던 때가 언제인가? 거의 중세기 시절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명령한 사람이 로마 사람이었고 망치로 못을 박은 사람들도 로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약 300년 이상 기독교에 대한 아주 심한 박해를 가했습니다. 우리는 로마 원형 극장을 외국 여행 갈 때 관광지로 삼고 구경합니다. 며칠 동안 사자들을 굶겼다가 운동장에 풀어놓고 예수 믿는 사람들 옷을 벗겨 거기 들여보낼 때 신경 조직이 멀쩡한 사람을 먹잇감으로 뜯어먹었을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관광지로 한번 가서 보고 옛날에 그랬다고 생각하지만, 그 현장을 찬송가를 부르면서 죽어간 성도들은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십자가에 살아있는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박해 기록은 어디나 나타나고 있는데 기독교인을 사형시키는 방법을 최대한 잔인하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유는 그래야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게 참혹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새남터 순교성지라고 있습니다. 네 마리의 말을 데려다가 사람을 네 방향으로 향하게 묶어 말을 때리면 사람이 네 조각으로 찢어지도록 한 것이 새남터 순교지이고, 여러분이 지금 제3한강교를 지나가시다 보면 절두산에 순교기념 예배당 건물이 하나 지어져 있는데 거기 지형이 아주 묘하게 낭떠러지로 되어 있습니다. 밑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절벽 끝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끌고 가서 목을 치면 머리는 강물로 떨어져 내려가고 몸뚱이는 그 산에 그냥 남아있게 됩니다. 그래서 목을 쳐서 절두산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유럽은 여러 군데 박물관이 있습니다. 저는 모두 다 견학하고 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잡아다 고문해서 죽이던 기구들을 모아둔 그런 박물관이 많습니다. 민망해서 설명하기 힘든 기구들이 많습니다. 사람을 의자에 묶어놓고 뒤에서 나사못을 돌려서 뒤통수를 뚫고 들어간 나사못이 앞에 눈으로 나오게 된 기구들이 다 그대로 진열되어 있습니다. 또 쇠기둥이 하나 뾰족하게 서있는데 맨 끝이 바늘끝 같습니다. 그런데 점점 굵어지는 쇠기둥입니다. 그것을 뭐에 썼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묶어 알몸으로 그 바늘 끝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체중에 의해 바늘이 항문을 통해서 머리끝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그 기구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아! 오늘 나는 너무 편하게 예수를 믿고 있구나.’ 나의 게으름이 비교됩니다. 사실 지금은 박해 시절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안일하고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몸만 조금 피곤해도 교회 안 나오고,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면 교회 더 안 나오고 이 핑계, 저 핑계 가능하면 교회 안 나오는 핑계를 잡고서 그래도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유럽의 교회가 다 그렇게 되어 버렸고 이렇게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각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이 진리의 빛은 온 세상을 비췄고 절대 중단할 수 없는 교회 발전의 역사를 가져다 준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의 신앙은 로마를 정복하고 말았습니다. 태양신을 섬기던 로마 황제 콘스탄틴 1세가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여 개종하게 되었고, 국력을 동원해서 박해를 하던 사람들이 그 때부터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언했습니다. 

지금 이태리에 가시면 밀라노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313년에 밀라노 칙령이라는 것을 발표해 황제 고난의 복음을 선포함으로 그렇게 길고도 험난했던 기독교 박해 역사가 끝이 났습니다. 이제는 로마 정부의 후원을 얻으면서 약 2000년 동안 유럽 전역으로 기독교 복음이 확산되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콘스탄틴 황제는 혼란스러웠던 로마 정치 주변과 항거 세력을 모조리 통일한 절대 영웅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 힘의 도움을 받는 기독교는 그때부터 세상에 후원을 얻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독교가 왕성하고 부흥하니까 역작용이 생겼다는 겁니다. 진리의 빛을 잃어가기 시작해서 부패가 되므로 교회가 병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당시의 종교 개혁을 필연적 하나님의 심판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가 이렇게 항상 기복의 길을 갔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심판이란 뭔가? 하나님의 뜻대로 가지 않는 역사를 수정하는 작업을 말하는데, 종교개혁이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정의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개신교회를 프로테스탄트라는 단어를 씁니다. ‘항의하다, 이의를 제기하다, 주장하다’의 뜻으로 기존의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개혁해서 프로테스탄트라고 말하는 겁니다. 뭐가 잘못되었는가? 구원에 대한 진리성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당시는 인간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의 의가 효과가 있다는 신학의 정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지을 때는 인간의 발걸음이 거의 올 수 없는 아주 험악한 지역의 낭떠러지 속에 수도원을 짓고 이 세상을 보지 않고 가능한 한 혼자서 살아가는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이렇게 착하고 죄 안 짓고 깨끗하게 살면 내 의가 쌓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런 고난과 모든 역경을 참고 견디고 이기는 내 의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하나의 증거가 되는 그런 이상한 신학이 퍼졌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를 변화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셨죠?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입니다. 신비스러운 광경을 체험한 베드로는 “예수님, 여기서 살아요. 세상에 내려가지 말아요. 여기서 초막 세 개만 짓고 살아요. 세상에 내려가면 죄 짓고 복잡하고 싸우는데 여기서 그냥 깨끗하게 예수님 모시고 이 산속에서 살다가 죽으면 죄도 안 짓고 복잡할 것도 없고 예수님 옆에 계시고, 여기서 죽으면 이대로 곧바로 하늘나라 가고 이게 우리 삶 아닙니까? 그러니 내려가지 마십시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슨 소리냐? 마을로 내려가자.” 금방 제자들을 데리고 내려오셨습니다. 

사실 인간은 산 속에서 그렇게 살 수도 있습니다. 요코이시오베라는 일본 군인, 오노다히로라는 일본 대위 이런 사람들은 제2차 대전 때 필리핀 정글 속의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길을 잃어 산 속에 혼자 남았는데 그 날부터 한 사람은 15년 동안, 한 사람은 29년 동안 그 때 입은 옷 한 벌을 입고서 생활했습니다. 생활비 하나 없이 한명도 만나지 않고 15년, 29년을 혼자서 산 속에서 살다가 1974년에 발견이 되어 일본으로 데려왔는데 지금도 일본 정부에서는 누가 또 있을지 모른다고 계속 수색작업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같이 이 산에서 그렇게 넉넉히 살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절대 아니다.” 왜 그렇게 데리고 오셨는가? 그 산 속에서 10년을 산다 하여도 베드로는 베드로이지 예수님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2000년 기독교 역사에 가장 훌륭한 삶을 살았던 바울의 고백을 우리가 들을 수 있잖아요? 객관성 있게 자신을 놓고 바라봤을 때 자기는 그렇게 깨끗하고 그렇게 주님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면서도 문제아라고 봤습니다. 왜냐하면 “내 속에서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데 내가 실제로 행하는 것은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악에 물들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통한의 눈물과 절규의 함성을 질렀던 바울의 모습을 우리가 성경에서 보잖아요?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가?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있는 0.1퍼센트의 능력도 없는 것이 곧 나다.”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러한 나도 하나님께서 그냥 선물로 구원하여 주신다는 기독교 신학의 정의를 그렇게 말하잖아요? 

그러면 바울과 같은 성자 칭호를 받는 사람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복을, 육신으로는 죄인으로 섬겼다고 자신이 말했는데 누가 자신의 의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계셨던 당시에도 이 구원 문제에 있어 율법주의들이 많았습니다. 율법을 행하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울이 갈라디아서라고 하는 성경을 쓴 것입니다. 

율법이 하도 많아서 다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것을 다 지켜야만 그 의가 쌓여 내가 하나님께 착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 나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주의 구원관을 정립했습니다. 그러나 다 지킬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형식주의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책망 설교를 하신 겁니다. “이 회칠한 무덤이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율법주의에 걸려 무한한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이 하신 선언이 뭡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짐은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복음으로 오라. 복음을 믿은 구원의 문제는 그 순간으로 해결되는 것인데 누가 너희들 보고 그 율법으로 행하고 그 의로 말미암아서 구원받으라 했느냐?” 이렇게 예수님이 책망 설교를 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이 모두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 백성이 되어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구원의 백성이 되었는가? 복음의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택함을 주셨다는 겁니다. 왜 나를 택하셨는지 그것은 내가 알 수 없습니다. 

찬송가에 보세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각이고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그래서 택함 받은 사람은 감사할 뿐입니다. 로마의 라테라노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면 무릎이 다 까지고 고통이 심해 피가 절절 흐릅니다. 그렇게 올라가면서 이 고통을 겪고 또 겪으면 그 의로움이 내게 쌓여서 그것이 내게 도움을 준다는 당시의 신학을 마틴 루터가 벌떡 일어나 내려오면서 “인간의 이런 치사스러운 의가 인간을 구원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는 무슨 효험인가? 기독교의 복음을 변질시켜 고행 종교로 만들지 말라.”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옆에 두 강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중의 한 강도가 구원받았습니다. 그 사람의 신분을 생각해 보세요. 강도일 뿐입니다. 그 사회에서 하도 흉악한 일을 많이 저질러서 죽여야 될 죄인이기 때문에 지금 십자가에서 죽일 뿐입니다. 그 사람은 교회 집사를 한 일도 없고 선행한 일도 없고 전도한 일도 없고 예수를 믿은 일도 없고 그냥 흉악범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서 예수님께 말 한마디를 했잖아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한 마디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됐어요? 그 자리에서 구원이 이루어져서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가리라.” 이것이 기독교의 장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를 어제 믿었던지 10년 전에 믿었던지 아무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들어와서 예수의 십자가 공로를 고백하는 자에게 그 시간으로 구원이 약속되어지는 진리! 그래서 예수님이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내게로 오라. 그러면 인간 구원의 역사가 여기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 아닙니까?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그냥 공짜로 받은 겁니다. 그런 공짜로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 당시에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서 의를 만들었다고 그것을 빙자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이만하면 자격이 되는 사람으로 생각하니까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신학의 기초를 다 뿌리째 뽑아버린 겁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그냥 주신 선물입니다. 

저같이 목회자가 된 사람이 생각해 봅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복음 사역자가 되었는가?’ 바울이 이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에베소서 3장 7절에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 그것을 따라서 내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노라.” 하나님이 그냥 시키신 겁니다. 여기 관계되신 분들도 더러 계시니 시험받지 마세요. 

가끔 목회자들이 교인에게 요청합니다. “이번에 이런 직분을 맡으셔서 이렇게 교회를 위해서 봉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거의 많은 대답이 이겁니다. “어휴! 목사님,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그럴 때 저는 묻습니다. “그러면 언제 준비가 되시겠습니까?” 준비는 평생 안 되는 겁니다. 그냥 순종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직분에 거하면 하나님이 그때마다 할 수 있는 힘을 주어서 가는 것뿐입니다. ‘나는 이만하면 깨끗하게 살고 이만하면 자격 기준이 되니까 하나님이 교회에서 목사도 되고 뭐도 되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준비가 안 된 겁니다. 그냥 우리는 순종해서 가면 됩니다. 

지난 주간에도 제가 사회를 보면서 141명의 목사 안수식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을 인터뷰 할 때 한 사람이라도 “당신은 왜 목사가 되고자 하느냐?” “하나님이 저를 소명으로 불렀습니다.” “오케이!” 그 이상의 질문이 없습니다. “이만하면 내가 공부도 했고 의롭게 살았고 잘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만하면 내가 목사 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은 절대 목사 안수를 안 줍니다. 그냥 소명을 순종하는 자는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할 수 있는 힘을 주시니까 그 은혜를 입고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자격 기준이 되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절대로 자기 기준이 안 되는데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셔서 그 선택의 응답을 해 그 일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보세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죄인으로 있을 그때 하나님의 의가 나를 붙잡아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겁니다. 이렇게 우리가 신앙을 정리해야 종교개혁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의는 아무리 쌓아도 내 의는 나를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그냥 우리를 선택해서 백성으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거기에 인격적 응답을 한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무엇이나 다 불완전합니다. 나 자신도 불안하고 교회도 불안하고 세상도 불안합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이 상황에서 완전을 향해 우리가 가면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나를 통해서 이 땅에 구원 사역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지금 날마다 우리 자신을 개혁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오늘 아침에도 여러분들은 교회 나오시기 위해서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하게, 한강 줄기가 보내주는 세균 작업이 끝난 수돗물에 우리 몸을 씻고, 아주 성능이 좋은 샴푸나 비누를 써가면서 우리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그러면 그 순간은 다시는 몸을 닦을 필요가 없을 만큼 기분이 상쾌하고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그런데 24시간만 지나면 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애라, 또 더러워질 텐데 뭐 하러 씻어? 그냥 살자.’ 그러면서 계속 살아보세요. 나는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신체 변화가 오게끔 되어 있습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의 책임은 하나님이 우리 자신에게 의무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에도 때가 끼고 먼지가 묻고 하면 날마다 정화 작업을 영적으로 하기 위해 우리가 이렇게 예배드리고 그래야 합니다. 사실 오늘날 너무나도 문화권 안에서 예수 믿는 모습들이 게으릅니다. ‘내가 예배당에 나와서 이렇게 예배드리는 거 하나님이 나한테 감사하시오!’ 그런 마음의 자세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옛날 성도들이 그렇게 생명을 바쳐가면서 우리에게 물려준 이 귀한 기독교의 영혼 구원의 유산을 우리들이 지금 잘해야 우리 후대들도 그렇게 훌륭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땅에 세워진 모든 교회는 다 불완전합니다. 잘못된 부분을 계속 개혁해 나가야 한다고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전통이라든가 인간적 체면 때문에 관료주의적 색채가 나게 만들면 안 됩니다. 잘못된 부분을 매일매일 계속해서 세척해 나가는 그런 노력이 바로 종교개혁의 뜻입니다. 

신앙이란 뭐냐? 잘못된 나의 생각과 고집을 버리고 주님의 생각과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를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흔히 사용하는 언어 가운데 보수적이란 말이 있고 보수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을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구분해야 되나? 보수적이란 말은 옳은 것을 끝까지 지킨다는 말이요, 보수주의란 새로운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과거의 것을 고집하는 주의입니다. 예수님은 보수적 사람이요 바리새인은 보수주의였기 때문에 보수와 보수주의가 만나 충돌해서 십자가 사건이 생긴 겁니다. 

교회 개혁운동이란 뭐냐? 언제나 목표는 똑같습니다. 더 좋은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이것이 개혁의 정신입니다. 컴퓨터가 나왔는데 주판을 사용하면서 이것이 제일 좋은 수학 방법이라고 고집하는 사람이 있으면 되겠습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내가 평생을 옳다고 고집하여 내 뜻일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잘못이 나타났을 때는 단숨에 집어던질 수 있어야 그것이 개혁정신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나? 완전을 향해서 항상 가고자 해야 됩니다. 이에 대해 바울신학이 우리에게 아주 좋은 방향 제시를 합니다. 바울이 어느 날 뭐라고 그랬습니까? 그렇게 훌륭하게 사는 사람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이만하면 내가 신앙생활을 주님을 위해서 할 만큼하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내가 온전해졌습니다. 아니라. 오직 나는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지금도 계속 달려갑니다. 

푯대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해지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그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나의 인생입니다. 이것이 개혁입니다. 그 목표를 향해서 하늘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영생을 누릴 때까지 우리가 쫓아가노라.”


결론적으로 한국 교회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는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유럽화 되지는 않는다고 믿습니다. 이유는 유럽의 그 많은 교회들은 너무 신학사상 의존도가 컸었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판단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가기 보다는 어떤 신학자가 발표를 하면 그곳으로 확 쏠렸다가 또 이런 발표를 하면 또 거기로 확 쏠렸다가 유럽 신학이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혼란해져서 교인이 다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은 지금 교회적으로나 신학적 수준에서 세계적입니다.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만큼 한국 교회가 성장했고 이제는 세계 교회가 한국에 와서 배우고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더군다나 한국 교회의 성장은 세계 역사에서 유래도 찾아볼 수 없는 일들이 한국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교회 성장학 교수들은 다 한국 교회 사래를 가지고 가서 지금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절대로 한국 교회나 한국의 신학자들이 외국 신학에 뒤떨어지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는 복음적 성격을 가지고 아주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건강한 교회로 잘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큰 신학자가 나와서 무슨 발표를 해도 그의 신학적 발표 때문에 우왕좌왕 흔들리지 않는 것이 한국 교회 모습이기 때문에 절대로 유럽의 교회와 비교하지 말라고 저는 항상 세미나에서 말합니다. 

그 다음에 영성의 문제가 유럽의 교회들과 절대로 다릅니다. 유럽의 교회들은 새벽기도 하나도 안합니다. 일부러 저는 다니면서 찾아봅니다. 저는 PCUSA 미국 장로교단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지만 새벽 기도하는 교회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새벽기도를 보세요. 영성 훈련이 되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새벽에 행복한 잠을 자야지 그 새벽 3시, 4시 일어나 교회까지 와서 기도를 드리고 간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한번, 두 번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생 하잖아요? 한 교회, 두 교회가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다 하잖아요? 이것이 영성훈련 되었다는 겁니다. 유럽 교회와 비교하지 말라! 유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영성이 한국 교회에서 잘 훈련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영성의 기도가 있는 한 절대로 한국 교회는 계속 성장하고 세계 교회에 빛을 발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총회에서 저에게 공문이 왔습니다. “장년 예배 주일날 3,000명 이상 모이는 교회 담임 목사만 모이라.” 그래서 저도 거기에 해당되니까 갔습니다. 그런데 12,000개 교회 가운데서 50교회가 그런 교회라서 50명의 담임 목사가 왔습니다. “왜 총회에서 우리를 소집했느냐?” “당신네 교회에서 무엇을 잘했기 때문에 교회가 성장했는지 이유를 발표해라. 그러면 그것을 전부 종합해서 책자를 만들어서 우리 교단의 12,000개 교회에 보내주면 그것을 보고 다른 교회도 그렇게 할 거 아니냐?” 

좋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마다 자기 교회에서 하는 것을 열심히 발표하는데 내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거 도대체 뭘 해야 되나?’ 우리 교회도 하는 일이 많이 있지만 미국 교회가 하는 사회활동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참 잘하더라고요. 그런데 ‘다른 모든 교회들이 하지 않는 것을 나는 발표해야 되겠다.’ 그래서 내가 새벽기도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예배드리는 사진을 찍어서 그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이게 새벽기도회 하는 모습이다.” 모두에게 보여줬습니다. 그랬더니 수백 명이 나와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는 겁니다. 

“질문할 거 있으면 질문하세요.” 그랬더니 질문을 막 하는 겁니다. 
“그러면 수백 명이 나와서 새벽기도를 하면 설교는 누가 하느냐?” 
“설교를 내가 하지 누가 하냐?” 
“날마다 하느냐?” 
“날마다 하지 하루만 하느냐?” 
“365일 하느냐?” 
“그렇다.” 
“그러다 죽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느냐?” 
“안 죽는다.” 그래서 다들 깜짝 놀라는 겁니다. 

그런데 한 두 교회가 나를 보고 자기도 해보겠다고 했지만 안 되거든요?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는 되잖아요? 영성 훈련이 된 겁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놀라운 겁니다. “이것이 있는 한 유럽 교회와 비교하지 말라. 유럽 교회는 기도를 안했지 않느냐? 영성 훈련이 안되었지 않느냐? 그러니 유럽교회와 비교하지 말라.” 제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 “목회자와 교인들이 모두 교회 성장을 위해 헌신적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에 유럽 교회나 미국 교회와 비교하지 말라.” 얼마나 평신도들이 열심히 하는지 선교사들 같습니다. 

지난번에 우리 교회는 군 사단 하나 맡았습니다. 결신자 수십 명이 나왔습니다. 매달 하기로 했습니다. 안 찾아가는 데가 없습니다. 군부대 안 찾아가나 교도소를 안 찾아가나 무슨 고아원을 안 찾아가나…. 다 선교사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은 평신도들이 다 해냅니다. 

그런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헌신면에 있어서도 서구 교회와 비교하지 말라. 한국 교회는 평신도 사역이 엄청나게 되고 있는데 왜 유럽화되고 있다고 하느냐? 절대로 유럽화 되지 않는다.” 저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외국에서도 목회를 27년 했으니까 잘 알잖아요? 한국 목회자들은 유럽 목회자들보다 세배나 일을 더합니다. 

우선 설교를 얼마나 많이 합니까? 유럽 목회자들은 주일날 낮 설교 한번 하고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의 수준 있는 교회 목사들은 일 년에 심방가서 설교할 때는 어린이 감기만 들어도 가서 설교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 년에 설교를 1천 번 해야 됩니다. 

미국 목사들은 깜짝 놀랍니다. “그렇게 많은 분량의 설교를 목사가 하느냐?” “그렇다. 우리는 특공대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너희들 믿음과 우리들 믿음은 다르다. 너희는 그냥「믿습니다.」그러지만 우리는「믿씁니다!」그러고 나가니 전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한국 교회는 유럽화 되지 않고 21세기에 계속 성장할 것이며 세계 교회의 빛이 될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미국과 한국 교회 아니면 세계 선교는 끝이 났습니다. 미국이 그동안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 선교가 이루어졌고 우리도 언더우드, 아펜젤러 같은 선교사들이 와서 선교가 이루어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미국은 선교의 열이 점점 내려옵니다. 한국은 점점 올라갑니다. 그래서 이것이 이렇게 되는 한 결국 한국 교회가 세계 선교를 책임져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 상황의 영적 판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 교회는 지금 세계 교회 앞에 우뚝 섰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중세기 때 교회가 한참 부흥했을 때 내리막길을 걸은 것과 똑같이 된다면 우리도 마찬가지가 되는 겁니다. 우리 모두다 기도하고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을 영적으로 해석하면서 사명을 잘 해나가면 하나님은 우리 한국 교회를 손에 붙들고 힘 있게 해주시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런 사명감으로 우리 앞을 내다보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이렇게 큰 사명을 주셔서 마침내 한국 교회가 세계 선교를 책임지는 시대를 저희들이 지금 살고 있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새롭게 우리를 정화 작업을 해가면서 더욱 새로운 주님의 복음의 역사를 이 땅에 이루어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시고, 한국 교회가 세계 선교에 가장 큰 역할을 감당하는 그러한 시대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교회도 그러한 일에 한쪽을 열심히 감당하고 있사오니 교인들에게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이 때 우리에게 주신 영적 사명을 잘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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