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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과 신뢰의 형제애로 재건(건축)하라 (느 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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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신뢰의 형제애로 재건하라 (느 5:1~13)


❚진정한 재건의 단계

여러분,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은 무엇일까요? 지금은 건축기술이 워낙 발달해서 500미터를 넘는 빌딩도 수없이 많습니다. 이 가운데 현재 가장 높은 건물은 2004년 준공된 타이베이 금융센터 빌딩으로 높이가 509미터에 달합니다. 하지만 이 기록도 곧 깨질 전망입니다. 아랍 에미리트의 수도 두바이에 현재 건설 중인 ‘버즈 두바이’ 빌딩은 810미터라고 하니 참 대단합니다. 그런데 더 대단한 것은 이 빌딩을 짓고 있는 건설사가 바로 우리나라의 삼성물산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회사는 3일에 1층씩 올리는 최단 공기 수행으로 세계의 주목을 끌었는데 이렇게 우리나라 건설사들이 세계 곳곳에서 중요한 공사를 여럿 맡아 하며 이미 세계적인 건설기술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자부심에 큰 상처를 준 사건도 있었지요. 바로 ‘날림공사’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독특한 정서를 “빨리 빨리”라고 정의하는 분도 있습니다. 식당에 가서도 빨리 빨리, 뭘 해도 빨리 빨리를 외치며 살다보니 건설공사도 촉박한 공기에 쫓겨 무리하게 짓다가 순식간에 무너져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는 대형 사고를 참 많이도 겪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사고지요. 기술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인데 정신이, 자세가 따라가지 못한 것입니다. 급한 마음에 서두르다보니, 빨리 빨리 겉모양만 보기 좋게 만들면 된다는 생각에 기초부터 차근차근 튼튼하게 쌓아가지 못해서 엄청난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날림공사 안 하려면 기초부터 잘 세워야 합니다. 우리교회도 곧 성전건축을 시작해야 하지만 설계도대로 한 단계 한 단계 밟아가며 치밀하게 지으면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이게 안 되면 날림공사요 그렇게 지은 건물은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지금까지 몇 주 동안 살펴본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재건은 하루아침에 뚝딱 날림 공사하듯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전에 설명한 것처럼 이 국가재건 공사에는 율법학사인 에스라, 총독 느헤미야,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 총독 스룹바벨, 대제사장 여호수아 등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헌신해서 꽤 오랜 기간, 아주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서 신중하고도 견고한 공사를 하듯 이룬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을 세우거나 교회를 세울 때도 속성으로 하루아침에 날림으로 세워서는 안 되고 미리부터 잘 준비해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세워야 견고한 가정, 튼튼한 교회가 되고, 하물며 다리 하나를 세우고 건물 하나를 세워도 이렇게 단계를 잘 밟아나가면서 튼튼하게 세워야 하는데 한 나라를, 민족을 다시 세우고 그것도 완전히 망해서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든 몰락한 민족을 다시 세우는 일은 얼마나 신중하고 철저한 공사과정이 필요했겠습니까? 

그래서 새해 첫 주부터 지금까지 한 달 동안 살펴본 이스라엘 민족의 재건공사 과정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 설교를 잘 이해하려면 지금부터 귀로는 제 설교를 들으면서 눈으로는 저의 손 모양을 잘 보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재건공사의 첫째 단계는(손으로 표현하되 오른손은 주먹 쥐고 편 왼손 위에 올려서 표현할 것) 주전 516년경에 완공된 성전재건공사입니다. 민족의 영적인 중심지(센터)를 재건한 과정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재건공사의 두 번째 단계는(손으로 표현하되 둘레를 표현함) 느헤미야 총독에 의해 주전 445년 경에 완공된 성벽재건공사입니다. 국가와 사회의 외적인 형태와 외연(外緣)을 재건한 과정입니다. 나라를 보호하고 든든히 세울 틀을 세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재건공사의 세 번째 단계는(두 손을 펴서 손바닥을 아래 방향으로 한 뒤 수평으로 벌리면서 표현) 율법학사 에스라를 중심으로 한 말씀 운동,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건설로 말하자면 기초공사입니다. 무너진 이스라엘 공동체를 기초부터 든든히 다시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재건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재건공사의 네 번째 단계는(두 손을 펴서 손바닥을 위 방향으로 한 뒤 수평으로 벌리면서 위로 올려서 표현) 그 말씀의 기초 위에 백성들 간의 사랑과 신뢰감을 회복시켜 이스라엘 공동체라는 예쁜 건물을 지어간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말씀이 바로 이 네 번째 단계입니다.


❚공동체 안에 사랑과 신뢰의 회복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느헤미야 총독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벽공사가 거의 마무리 되어 가는데 그 와중에 심각한 문제가 하나 발생해서 느헤미야의 마음을 번민하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서로 원망하고 불신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가정도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고 풍족하게 살아도 집안에 다툼이 일어나고 불화가 생기면 절대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라도 아무리 잘 살면 뭐합니까? 아무리 부강한 나라를 이루어도 나라 안에 불화와 원망과 갈등이 가득하면 그 나라가 편할 리 만무합니다. 지금 성벽이 거의 완성되어 가는데, 그래서 성벽만 재건되면 지금까지 힘들고 어렵게 살던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힘을 얻고 재기할 수 있다고 희망에 들떠 있는데 막상 성벽을 아무리 잘 쌓아도 그 성벽 안에서 같은 민족끼리 서로 다투고 원망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민족의 재건이 완성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하는 분주한 일정 속에서도 지체하지 않고 그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진상조사에 나선 것입니다.

진상을 알아보니 이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가족 수가 너무 많아서 도저히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2절). 

여러분, 흥부 자식이 몇 명이었을까요? 어떤 책에는 열 명이라고 나오는데 당시에 열 명은 많은 축에도 못 낍니다. 흥부전에 보면 자식이 스물다섯입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많은 편에 속하지요. 이렇게 자식과 부양할 가족이 많으면 서민들은 아무리 벌어도 먹고 살기가 어려워 할 수 없이 동족 가운데 돈이 좀 있는 사람을 찾아가 돈을 꾸게 되는 것입니다. 

또 흉년 때문에 먹을 것이 떨어져 자기 밭과 포도원과 집을 저당 잡히고 곡식을 얻어먹은 사람도 있고(3절) 과도한 세금 때문에 돈을 꾸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백성도 있었습니다(4절). 그런데 이렇게 돈이나 양식을 꿔야 하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고리대금업을 해먹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해 12월 악덕사채업자들이 경찰에 구속되었는데 요즘 경제가 어려우니 급전이 필요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돈을 꿔주고는 자그마치 연 이자 2550%를 받아먹은 것입니다. 이자가 원금의 스물다섯 배입니다. 게다가 이자를 못 갚는 여성을 성폭행까지 했다고 하니 정말 이런 말 써서 안 되지만 “죽일 놈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이 어려울수록 이런 나쁜 사람들이 더 설치게 마련인가 봅니다.

성경은 분명히 동족끼리 고리대금을 하지 못하도록 엄하게 금지합니다(레 25:35~37, 신 23:19). 그만큼 최소한 동족끼리, 하나님의 백성끼리는 이런 짓(비록 법적으로는 문제없다 하더라도)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리대금이나 위험한 금전거래, 보증 등은 가급적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돈보다 더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서로의 신뢰가 깨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교회를 무슨 월급 받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교회는 돈이나 권력이나 세상적인 어떤 조건으로 묶여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같은 믿음 안에서, 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과 사랑으로 묶여진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 하나로 먹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 빼면, 신뢰 빼면 그야말로 시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는 생각,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믿어주는 형제애(兄弟愛), 자매애(姉妹愛)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흔히 서로 “형제님, 자매님” 하고 부르는데 이 호칭이 정말 서로 부를 말이 마땅치 않아서 쓰는 그런 호칭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말 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혈통으로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믿고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한 교회를 섬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서로를 친형제요 친자매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면에서 서로를 형제요 자매 대하듯 사랑하고 신뢰하고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 때문에, 사실 그까짓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인생이 끝납디까? 그 정도 가지고 서로 마음 상하고 신뢰가 깨지고 결정적으로 형제애 자매애가 다 무너져서 미워하고 원망하고 마음 상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위험한 돈 거래나 보증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득이 돈 꿔줄 일이 생긴다면 이자 받지 마세요. 그것은 기독교의 정신에 어긋납니다. 적어도 같은 교회 다니고 같은 하나님 섬기는 형제자매끼리는 그러지 마세요.

오늘 이스라엘 동족끼리 고리대금을 해서 어떤 일이 생깁니까? 1절에 보면 “그 때에 백성들이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했다”고 합니다. 이 “크게 부르짖다”가 히브리말로 ‘짜아크’라는 말이라고 수요예배 느헤미야 강해 때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신학교 때 히브리어 배우면서 이 낱말을 “입을 쫘악 벌린다”라고 외운 기억이 납니다. 

이 ‘짜아크’라는 말은 큰 고통과 어려움을 당할 때 사람들이 정말 입을 쫘악 벌리고 부르짖는 소리를 뜻하는 낱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죄악이 가득할 때 고통당하는 백성들이 ‘짜아크’ 하고 부르짖습니다(창 18:21). 느메미야 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을 쫘악 벌리고 ‘짜아크’ 했습니다. 하나님께 고통의 부르짖음을 외치고 있습니다. 바로 고리대금 때문입니다. 동족끼리 돈과 양식을 빌려주고는 가난한 사람이 갚을 길이 없자 그 집과 토지와 재산을 다 빼앗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자녀들까지 빼앗아 종으로 삼고 그 딸들을 빼앗아 첩으로 삼는 잔인한 짓을 하니 가난한 백성들이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개혁, 형제애의 재건

느헤미야는 이 비참한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합니다(6절). 그리고 그런 짓에 앞장 서는 지도자들을 먼저 불러 꾸짖고 다시는 그런 일을 못하게 합니다. 다시는 이자 받고 고리대금을 하는 일이 없어야 하고 빚을 못 갚는다고 재산을 빼앗거나 가족을 빼앗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엄하게 꾸짖습니다. 그리고는 백성들에게도 꾸짖으니 백성들이 순종합니다. 평상시에는 아주 세심하고 정이 넘치는 지도자이지만 이럴 때 느헤미야는 아주 단호하고 분명하게 행동합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잘못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고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 즉시 못 끊으면 이런 죄악이 암세포처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퍼지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원망하고 불평하고 화합이 깨지고 형제애가 파괴되어 이스라엘 공동체는 무너지고 맙니다. 성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멋지고 튼튼한 성벽을 재건했어도 그 성벽 속에서 서로 다투고 원망하고 갈라지면 이 민족은 절대 바로 설 수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어쩌면 나라나 민족보다 사회보다 교회가 이 문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하루에 삼천 명씩 세례를 받고 성도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게다가 분위기도 참 좋았습니다. 온 성도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모이기에 힘쓰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에 힘쓰고 심지어 자기 재산을 팔아 서로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쓰는 놀라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위기가 닥쳐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교회 안에 사로 원망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마치 느헤미야 시대에 있었던 일처럼 말입니다. 이번에는 무엇 때문에 서로 원망하게 되었는가? 예루살렘 초대교회 안에는 유대인의 혈통을 가진 히브리파 성도들과 이방인 출신의 헬라파 성도들이 있었는데 남편을 잃고 어려운 과부들을 돕는 과정에서 헬라파 성도들이 자기네 과부들이 소외된다고, 히브리파 과부들만 돕는다고 생각해서 원망이 일어난 것입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정말 편파적으로 구제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 여부를 떠나서 교회가 한창 분위기가 좋고 부흥하는데 이 문제를 해결 못하면 자칫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 교회가 송두리째 흔들릴 수도 있기에 사도들은 주저하지 않고 즉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 명을 뽑아 집사(오늘날의 안수집사)로 임명하고 이들에게 과부를 구제하는 일을 맡깁니다. 물론 이 일곱의 이름을 보면 히브리파와 헬라파 양쪽을 골고루 섞어 뽑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직분이 바로 집사입니다. 

여기 집사님들 많은데 집사는 ‘명예직’이 아닙니다. 본디 교회에서 섬기고 봉사하는 일, 특히 구제를 맡기려고 뽑은 직분입니다. 그래서 집사를 영어로 deacon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헬라어에서 ‘봉사’를 뜻하는 ‘디아코니아’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집사님들은 교회에서 다른 성도들을 잘 섬기고 잘 봉사해야 합니다. 특히 지역이니 출신이니 나와 가까우니 하는 것들 절대 따지지 말고 철저하게 공평하게 그리고 충성스럽게 봉사하고 남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 안에 진정한 신뢰와 섬김이 이루어지고 말로만 아닌 진짜 형제애, 자매애가 세워져서 참 좋은 교회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섬김과 봉사와 신뢰는 집사뿐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기독교의 기본정신입니다. 이런 형제애가 교회 안에 바로 세워져야만 진정 그 교회가 살고, 성도들이 살고, 교회가 말씀 위에 바로 세워져 건강한 교회, 부흥하는 교회를 이룰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교회인지, 정말 진정한 형제애의 기초 위에 성도들끼리 신뢰하고 섬기고 인정하고 아끼고 품어주는 그런 교회인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슬람교에의 모든 신자(무슬림)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다섯 가지 황금규칙이 있는데 그 중에 세 번째가 ‘자카트’라고 해서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모든 무슬림은 무조건 수입의 25%를 자카트로 바쳐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게 되어 있습니다. 같은 무슬림이 굶주리면 그것은 모든 무슬림의 수치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다섯 가지 사명 가운데 선교도 꼭 하고 교육도 꼭 해야 하지만 구제는 하면 좋고 안 하면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하지 않습니까? 구제와 나눔의 삶에서 이슬람교보다 못해서야 되겠냐는 말입니다. 형제사랑의 측면에서 우리가 이슬람보다 더 못한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과 전쟁이 일어나자 전 세계 무슬림들, 인근의 파키스탄 같은 나라뿐 아니라 심지어 저 멀리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의 무슬림들까지도 그 나라에 가서 함께 싸우겠다고 선언합니다. 물론 테러 자체에는 문제가 있지만 그 방법의 정당성을 따지기 이전에 나라나 민족 상관없이 우리는 한 종교를 믿고 한 알라신을 믿으니 형제요 자매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같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한 성도라고 하면서, 말로는 형제라고, 자매라고 부르면서 실제로는 돈 때문에 서로 마음 상하고 원망하고, 태어난 동네가 경상도니 전라도니 충청도니 하면서 편 가르고, 세상도 아니고 정치도 아닌 교회에서 말입니다. 또 어느 학교 나왔냐, 어느 직장 다니냐, 누구랑 친하냐 가지고 따지고 편 가르고 마음 상하고 원망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말로는 형제, 자매라고 부르면서 정말 서로를 진정으로 신뢰하고 아끼고 품어주고 용서하고 서로를 위해 섬기며 봉사하고 다른 성도의 기쁨을 진정 내 기쁨으로 여기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그들의 문제를 내 문제로 여기고 아파하는 모습이 부족하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이슬람교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부흥은 그 구성원들 사이에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돈 좀 잘 벌고 큰 집 살고 좋은 차 굴린다고 반드시 행복한 가정 되는 게 아닙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5:24)라는 말씀처럼 가족들 사이에 불화와 불신이 있으면 아무리 좋은 집도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나라와 민족도 아무리 부강해도 국민들 사이에 신뢰가 깨지고 신용이 통하지 않으면 후진국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잘 살게는 되었지만 아직 후진국입니다. 특히 교회는 정말 그렇습니다. 아무리 예루살렘 성벽을 잘 재건해도 백성들 사이에 신뢰가 깨지고 형제애가 무너지면 소용없는 것처럼 우리 교회가 아무리 성전을 잘 지어도 우리 성도들 사이에 진정한 형제애와 신뢰와 사랑이 세워지지 못하면 우리는 절대 좋은 교회 못 됩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전 12:26) 

그렇다면 나는 이 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집사로서, 목회자로서, 장로로 권사로 성도로서 말입니다. 우리 모두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찾고 실천하면 우리 교회가 정말 ‘잘’되는 교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가 이 진정한 사랑과 신뢰와 형제애를 바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세워져 나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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