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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를 살피시는 하나님 (창 16: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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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창 16:7~16)
 
   
오늘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야기’ 가운데 한 토막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본문 이전의 아브라함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말씀으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종 엘리에셀에게 상속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정식으로 아브라함과 약속을 체결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확인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로 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을 정도로 큰 민족을 이루어줄 것이라고 말입니다.

1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또 흔들립니다. 때마침 아내 사라가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자기 몸종 하갈을 첩으로 들이자는 것입니다. 당시 관행이 첩을 통해 자식을 얻으면 상속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아내의 이름으로 입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말을 따랐습니다. 그들의 생각대로 하갈을 첩으로 들였고, 하갈은 어렵지 않게 임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임신한 하갈이 태도가 바뀐 것입니다. 주인이었던 사라를 멸시합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 사라의 아픈 상처를 건드립니다. 사라가 견딜 수 없어 아브라함에게 사실을 고하고 문제해결을 부탁합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일체의 권한을 양도합니다. 

사라가 하갈에 관한 모든 권한을 양도받았습니다. 분풀이를 하듯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합니다. 하갈이 견딜 수가 없어서 도망을 칩니다. 임신한 몸으로 대책없이 광야 길로 도망을 칩니다.

이제 본문에 와 보면 하나님께서 임신한 상태로 도망친 하갈을 만나주십니다. 위로해 주시고, 갈 길을 안내해 주시고, 그리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갈이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그 하나님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갈은 다시 아브라함의 집을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본문 창 16장의 하갈과 이스마엘 이야기는 아브라함 구원역사에 곁가지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 15장과 17장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시는 이야기 속에 끼어있는 곁가지입니다. 없어도 되는 곁가지입니다. 믿음이 흔들린 아브라함 때문에 생겨난 불필요한 곁가지입니다. 앞으로 두고두고 이스라엘 구원역사를 방해하는 곁가지입니다.

방울토마토 농사의 경우 가장 신경써야 할 것이 곁가지를 쳐주는 일이랍니다. 계속 곁가지가 나온답니다. 그 곁가지를 그대로 두면 방울토마토 열매가 작고 보잘 것이 없어서 상품으로 출하할 수 없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곁가지를 쳐주어야 한답니다. 그래서 방울토마토를 파종한 다음 수확할 때까지 15번 이상 곁가지치기를 해 준답니다.

사람의 눈에는 곁가지는 성가진 존재입니다. 늘 방해가 되는 존재요 그래서 쳐주어야 할 존재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이 하갈과 이스마엘 이야기는 쳐주어야 할 곁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다르게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을 보살펴주셨습니다. 그 뱃속에 잉태된 이스마엘도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하찮은 인생이라도 심지어 곁가지 인생이라도 살펴주십니다. 우리가 이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자신을 곁가지라 생각하며 살아온 분들이 계십니까? 나는 주류가 아니고 비주류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분들이 계십니까? 따돌림과 깊은 소외감 속에 마음 고생하며 살아온 분들이 계십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볼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살펴주십니다. 

 “성도를 살피시는 하나님” 이라는 말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 “엘 로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로이”는 “본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 “라아”와 목적어 “나를”이 합해진 말입니다. 그리고 문법적으로는 분사형입니다. 그러니까 직역을 해 보면 “나를 계속 살펴보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자를 친히 시야에 두시고 살펴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라는 분이 고고학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기자들이 고고학자와 결혼한 소감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성에게는 고고학자가 최고의 남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자가 늙으면 늙을수록 더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될 것이니까요“

사실 여인들은 나이 들어 늙어가도 계속 남편이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랍니다. 여인들 뿐이겠습니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를 알아주고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여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세밀한 관심을 보이시는 분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끝까지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고 살펴보시는 분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 10:29-31에서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해 주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참 놀라운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세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머리카락 숫자가 대략 10만개에서 15만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일 적게는 30개에서 많게는 100개 정도씩 빠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0만개가 넘는 것이 계속 빠지고 새로 나고 해서 매일 그 숫자가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세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우리에게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고 한 시도 눈을 띠지 않고 살펴보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주목할 것은 “너희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너희 아버지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자식을 세심하게 살피듯 그렇게 애정어린 관심을 가지고 살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이렇게 세심하게 살피고 계십니다. 세상에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보여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살피십니다. 오늘도 사랑어린 눈으로 여러분을 살피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의 보다 구체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위로해 주십니다.

본문 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사라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대책 없이 도망쳐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그 광야길에서 만나주신 것입니다.

이 때 하갈의 마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그의 마음은 상처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사라를 위해 몸종으로 오랜 세월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가문을 위해 그 늙은 아브라함의 첩이 되어 아이까지 잉태했습니다. “이런 나를 이토록 학대해서 쫓아내다니...” 그 마음 속에는 원망과 분노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교만했던 자기 태도에 대해 후회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 큰 것은 두려움입니다. 이제 잉태한 몸으로 혼자서 광야 길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앞길이 막막합니다. 아이를 낳을 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광야의 혹독한 날씨, 광야의 들짐승들, 게다가 먹고 살 일이 막막했습니다. 일단 사라를 피해서 도망쳐 나왔지만 이제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만나주셨습니다. 하갈은 더 할 수 없이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새 힘을 얻었습니다. 추스르고 새롭게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 그 우물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습니다. 이 말은 “나를 살펴주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우물”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로 새 힘을 얻은 그 자리를 잊을 수 없어서 이름을 지어 붙인 것입니다. “브엘라해로이!”

저는 할 수 있는 대로 상을 당한 가정은 찾으려 애를 씁니다. 이에 비해서 잔치집이나 결혼식은 시간이 허락할 경우만 찾습니다. 그 이유는 축하보다는 위로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위로하려고 상가를 찾을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드니다. 사람의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될까? 그래서 간절히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바로 그 자리가 “브엘라해로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힘들고 지쳐 있는 여러분을 살피고 계십니다. 아파하고 절망하는 여러분을 살피고 계십니다. 친히 여러분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가 브엘라해로이가 되게 해 주십니다. 이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2. 깨닫게 해 주십니다.

본문 8-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하나님께서는 지금 하갈이 잘못된 길로 나가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올바로 나가야 할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사실 지금 하갈이 겪고 있는 모든 문제는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힘들더라도 사라에게 복종하고 그 자리를 지켰어야 했습니다. 그동안 교만했던 것 사죄하고 그 집에서 아이를 낳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도망쳐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관계도 깨졌고, 앞으로 살 길도 막막해 진 것입니다. 어리석음이 문제입니다.

어떤 부잣집 주인이 가마꾼들에게 “개가 집을 나갔으니 개를 좀 찾아오너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가마꾼들은 “주인님, 우리는 가마를 메는 일을 하는 사람이지 개 찾는 심부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거절했답니다. 그러자 주인이 이렇게 지시했답니다. “그래? 그럼 내가 개를 찾을 테니 너희들은 가마를 메라” 하루 종일 들로 산으로 다니며 찾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또 나갔으나 헛수고만 했고, 사흘째 되는 날까지 찾았으나 힘만 들고 고생만 했습니다. 그제 서야 가마꾼들이 “주인님, 개는 저희가 찾을 테니 주인님은 앉아 계십시오.”

그렇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 인생의 문제는 어리석음에서 옵니다. 판단을 잘못하고, 생각을 잘못하고, 그리고 꾀를 잘못 내는데서 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합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우리의 원래 자리가 어디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려고 하는 목적지가 어디냐고 묻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리석음을 떨쳐버리려면 주님의 두 가지 물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는 “네가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입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나무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이 물음에 성실하게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하나는 “네가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입니다. 연어는 산란하기 위해 상류로 거슬러 올라야 합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물살을 헤치고 자기가 태어났던 그 자리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가 가야 할 곳으로 가고 있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물음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올바로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3. 새 힘을 주십니다.

본문 10-1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지금 잉태하고 있는 아이가 태어나게 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까지 지어주셨고 나아가 그 아이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룰 것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갈은 절망 중에서도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새로운 사명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이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던 길을 되돌아 갈 수 있게 됐습니다. 비록 자기를 학대하는 사라가 있는 곳이라 해도 되돌아 갈 수 있습니다. 새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스페인 마드리드에 장래가 촉망되던 축구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의 교통사고로 그만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 선수는 병상에 누워 그 누구도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절망하며 눈물을 흘린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지켜보고 있던 간호사가 가만히 이 선수 곁에 기타를 놓아 두었습니다. 며칠 뒤 이 선수가 그 기타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합니다. 제법 유능한 솜씨로 그 기타를 다룹니다. 그리고 노래를 부릅니다. 그 기타가 이 선수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해주었습니다. 그 기타가 새로운 힘을 얻게 해 준 것입니다.

이 선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이 사람은 축구 선수가 아니라 가수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살아야 할 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선수는 축구선수가 아니라 아름다운 음성의 가수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가 바로 스페인의 유명한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절망 가운데 주저앉고 있을 때 새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변화시켜 줄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힘은 내 안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십니다.

사 40:31에 이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얻으시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곁가지같은 하갈도 살피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의 본가지인 우리는 더욱 세심히 살피십니다. 우선 우리가 아픈 가슴으로 절망 중에 있을 때 말없이 살펴보시다가 브엘라해로이로 찾아와 만나주십니다. 거기서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위로를 얻게 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래서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힘들고 지켜 주저앉아있을 때 새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간 이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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