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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날] 의미있게 보내는 설 명절 (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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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있게 보내는 설 명절 (요 5:1~9) 


오늘은 구력으로 2008년도의 마지막 날이고 내일이면 이제 구력으로 새해를 맞는 설날 아침입니다. 우리나라는 설날이 있어서 새해를 두 번 맞이하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축복의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에 하나님의 큰 은혜와 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날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 아닙니까? 이 설이란 새해의 첫머리란 뜻이고 설날은 그 중에서도 첫날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데 이 설날에 대해 어느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설날의 설이란 의미는 '낯설다'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날은 '새해에 대한 낯 설음'이라는 의미와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들 합니다. 

그런면에서 설이란 어떻게 보면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기대하며 지난 묵은해에 우리가 못다한 것들을 돌아보며 새해를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면 이 설은 우리에게 매우 뜻 깊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력으로 새해를 맞는 특히 명절을 맞이하여 우리의 영적인 생활, 그리고 가족 간의 관계, 더 나아가 명절의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하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큰 명절이 있을 때 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명절을 맞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고 했습니다. 이 명절은 아마 오순절이 아니었겠냐고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다 예루살렘으로 향해 명절을 보내로 모여드는데 주님은 일부러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으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1. 명절을 선교적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을 자기 계시를 위한 사역의 기회로 여기시고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역을 하시기에 좋은 기회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설날은 세속적인 명절이며 우상숭배와 깊은 관련이 있는 명절입니다. 교리적으로만 본다면 우리는 이런 명절 자체를 지키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선교적 관점에서 보면 다릅니다. 설날이 되면 우리 민족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고향 집을 찾습니다. 흩어져 사는 가속이 모두 한 집에 모여 음식 잔치를 하는 때는 유일하게 두 번 있는데 구정과 추석입니다. 지난 구정에 고향 방문한 인구가 4,000만 명이었습니다. 차량 이동은 1,300만 대였습니다. 남부지방으로 가는 이들은 10여 시간 걸렸습니다. 힘들어도 이렇게 부모 형제 친척 친구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것도 마음 문을 열고 기쁨으로 자연스레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 때를 복음을 전할 기회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고향에 들러 그 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는 것까지는 좋은데 꼭 고민이 되는 게 바로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분은 “조상에게 절하는 것이 왜 죄가 됩니까? 나를 낳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에게 존경을 표하는 마음에서 절하는 것이지 무슨 신에게 히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이 우상 숭배일 수가 없지 않습니까?” “돌아가신 분에게 절하는 것은 존경의 표시이지, 무슨 신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성경에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고 했지, 죽은 분에게 제사하는 것을 금했다는 말이 어디 있는가?” 합니다. 

그럴듯 싶은 말입니다. 그러나 제사는 분명히 우상 숭배입니다. 돌아가신 분들에게 제사를 드림은 귀신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제사법에 의하면 죽은 사람을 위해서 신주(神主)로 모시거나 지방을 써 붙일 때 생전 벼슬을 못한 분에게 ‘현고학생부군 신위(神位)’라고 쓰고 여자인 경우에는 ‘현고학생 씨 신위’라고 쓴 후에 절을 합니다. ‘신위(神位)’란 말이 귀신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제사에 보면 신이 내리게 하는 강신과 내린 신에게 절하는 참신의 순서가 있습니다. 즉 분향재배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온다고 믿고 하는 의식인 것입니다. 

제사를 지내는 이유가 자기 조상이 돌아가신 뒤에 그 영혼이 여기저기 떠다니다가 제삿날이나 무슨 명절날에 와서 음식을 먹는다는 사상에 젖어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세상에 있는 식구나 친척들과 가까운 곳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죽으면 가야 할 곳으로 가고 맙니다. 예수님을 잘 믿던 영혼들은 천국으로 가고, 예수님을 믿지 않던 영혼들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조상의 영혼을 위하거든 제삿날이나 명절날 하나님께 추모 예배드리면서 인간의 온 영혼을 주관하시고 천국과 지옥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지은 죄 중에 가장 큰 것은 무슨 살인이나 간음보다도 우상숭배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이 가장 진노하시는 우상숭배는 어찌든지 거부해야 합니다. 

조선 후기 천주교가 제사문제로 한참 박해를 받을 때 이호영이라는 천주교인이 문초를 받게 되었습니다. “너는 부모께 제사를 왜 지내지 않는가? 누가 보든지 조상에게 제사를 안 지내는 자들은 개나 돼지만도 못한 것이니 이런 자들은 죽어 마땅하지 않은가?” 재판 관원이 호되게 꾸짖자 이호영은 대답하기를 

“그 제사라는 것은 헛되고 무익한 것입니다. 잠드신 부모님께 음식을 차려다 드리고 잠이 드신 채 그것을 잡수시리라고 생각한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음식을 잡수실 줄로 아는 것은 더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까? 영혼은 저 갈 데로 가고 육체는 무력한 송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영혼은 신령체이므로 물질적 음식을 먹고살지 못합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관원은 “이놈아,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 헛되다고. 그렇다면 천주(天 主)의 그림 앞에 무릎을 꿇는 것도 헛되고 무익한 일이 아니냐?”라고 호통을 치자, 다시 대답하기를 “천주는 전능하시고 무한히 선하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천주교에서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립니다. 죽은 이를 위한 특별 기도문이 있습니다.”고 대답할 때 더 할 말이 없어진 재판 관원은 그를 몹시 매질하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3년 후인 1838년 11월 25일 36세 나이로 순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순교 당하면서까지 제사를 반대하던 천주교가 최근에 와서는 제사를 허용하고 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복이 아니라 화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사를 잘 지내고 조상을 잘 섬기려는 마음의 밑바닥에는 복을 받으려는 계산도 깔려 있습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지 물질이나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고목나무의 속이 빈 것도 복 달라고 비는데 줄 복이 없어서 속이 타서 빈다고 합니다. 좋은 묏자리를 쓰기 위해 막대한 돈을 들입니다. 그러다가 집안이 잘 안되면 묏자리를 잘못 쓴 탓인 줄 생각하고 이장(移葬)하는 등 여러 가지 일들을 합니다.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자기들이 복을 받고 대대손손 복을 받으려는 노릇이 역으로 벌을 받고 화를 자초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바로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를 지혜롭게 대화하며 선교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2.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을 치유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있는 병자들은 한 마디로 ‘절망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마 유명하다는 병원, 용하다는 의사 다 찾아다녀 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좋다는 약은 다 써봤을 겁니다. 그러나 별 효험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인간의 의술로는 가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베데스다 연못가는 마지막으로 실오라기 같은 한 가닥 소망을 붙잡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얽힌 전설이 있었는데, 무슨 내용입니까? 3절(하)~4절. “ ...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그 연못은 가끔 물이 솟아오르는데, 천사가 내려와서 목욕을 하는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구든지 물 속에 뛰어 들어가면 무슨 병이든 고침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건 아마도 미신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요즘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간헐천(Intermittent Spring, 이따금 물이 솟아오르는 온천)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혹 그 온천수 때문에 병을 고친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당시 상황으로 추측컨대 물이 솟아오르는 것도 드문 일이고, 그런다 할지라도 불치병 환자를 고치는 치유의 역사가 나타날지는 미지수입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단 한 명만 고침 받는다는 겁니다. 마치 로또 복권 맞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이 815만분지 1이라고 하죠. 수학적으로 제로나 마찬가지의 확률입니다. 전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헛된 소망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현실이 어려워도 견딜 수 있습니다.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으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가장 비참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헛된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소망이라고 붙들고 있지만, 그 소망은 성취하기도 어렵고 성취해도 나중에 헛된 것임을 알게 될 때 더욱 더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그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밀리고 밀려 막장과도 같은 그곳에 온 사람들인데, 거기서도 자기들끼리 경쟁을 벌여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처럼 같은 처지끼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마땅한데, 살벌한 경쟁을 벌이며 서로를 경계해야 됩니다. 그것도 ‘헛된 소망’을 위해서 말입니다. 베데스다라는 이름이 무색합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이란 뜻이건만, 자비는커녕 살벌한 경쟁만 난무하는 곳입니다.

이 베데스다에 들어간 예수님은 그들 중의 특히 한 사람을 주목하셨습니다. 5-6절입니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오래된 줄 아시고--” 누구를 보셨다구요. 서른여덟 해된 병자를 보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 이틀, 1년 2년이 아닌 38년 동안 병을 앓면서 차도가 없었다면 절망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을 주목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누우신 것을 보시고---”. 그가 있었던 곳은 베데스다 못이라고 했습니다. 공교롭게 베데스다의 의미는 ‘자비(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의 마당 저 건너편에서 주의 자비와 은혜를 기다리는 이런 이웃들이 보이지 않으시나요?

38년 된 병자는 어렸을 때부터 육체적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심리적으로도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로 가득차 있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라는 생각 때문에 원망과 분노로 가득차 있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종교적 기대감을 가진 곳에서도 여전히 소외와 절망감만 경험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가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했습니다. 그는 누가 넣어 줄 사람이 없어서 나을 수 없다는 핑계만 대는 대도 불구하고 "일어나 걸으라"고 하심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그는 병 고침으로 인하여 모든 상처와 분노와 원망과 좌절이 한꺼번에 해결된 것입니다. 

우리도 명절에 모든 가속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38년 된 병자와 같이 실패로 인하여 상처와 분노와 좌절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더 큰 아픔과 좌절감을 주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을 위로해 주고 그들의 아픔을 치유해주고 그들에게 살 소망을 부여해 주어야 합니다. 아직 소망이 있음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살 소망이 있음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볼 때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십니다. 너무 사랑 받는 자녀이기에 우리에게 있는 모든 악과 죄와 모든 범죄를 예수의 십자가로 깨끗이 씻으시고, 이제는 죄와 흠이 하나도 없는 거룩한 자기 자녀들처럼 날마다 보시면서 그 머리터럭도 다 세시고,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고, 어디를 가나 동행하시고 모든 기도를 귀담아 들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은혜로 여기까지 오셨잖습니까? 아-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 역시, 이 더럽고 추악한 냄새가 나는 이 세상 한 복판에 당신의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악으로 물들고 오염된 나하나를 건지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뭐 자격을 따지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나의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나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내가 뭔데, 도대체 나란 인간이 뭐길래, 하나님께서 외아들 독생자를 아무 조건 없이 주셨는지, 어거스틴은 어느 날 이 은혜 앞에 눈물을 쏟으며 고백합니다. "내가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라 할찌라도 주님은 나를 위해 기꺼이 당신을 주셨을 것이다"

오늘 이 땅 한국은 전도가 후퇴하는 계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가 잊지 말 것이 있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예수 믿고 믿음을 통한 행복을 누리고 있음은 전적으로 우리의 선배들의 전도와 사랑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이 명절을 전도하는 계기로 삼아보시기를 권합니다.

이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빚진 심정을 갖고 산다면 그 빚을 갚는 현장이 어디입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간다면 이 명절 한복판에도 주님의 관심이 소외되고 그늘진 곳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그들을 구원하셨다면 이 좋은 명절 날 우리 역시 가족과 그리고 친지 더 나아가 이웃에게 예수를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신이 나지 않습니까? 생각만해도 가슴이 벌렁거리지 않습니까? 다시 믿지 않는 부모님에게, 친지와 고향 친구들에게 가서 전하십시오.

그런데 최근 한국의 기독교 인구가 18% 미만으로 추락하고 있는 이때에도 이 땅에서 최고의 복음화 율을 자랑하는 곳이 어디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전라도 신안군 증도라는 곳입니다. 증도는 90%의 복음화 율을 자랑하는 섬입니다. 최근에 이 섬의 스토리를 소개한 ‘천국의 섬’이라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섬은 섬 특유의 미신도 투전판도 놀음도 없고, 사찰도 굿당도 점집도 하나 존재하지 않고 주말이면 모든 식당이 문을 닫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섬 인구 2,200명 거의 전부가 주일에 교회 갈 준비를 하기 때문입니다. 11개의 교회는 모두 시골 교회이지만 그 중 6개 교회가 자립하고 있고 이 교회들은 서로를 도와가며 살기 좋은 천국의 섬으로 가꾸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섬의 복음화는 목사님도 선교사님도 아닌 한 불행했던 여인의 헌신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천국의 섬의 저자가 섬 할머니를 붙들고 물었습니다. “할머니, 이 작은 섬에 왜 이렇게 교회가 많지요?” 할머니는 주저 없이 대답합니다. “아, 그거야 다 문준경 전도사님 덕분이제”

1891년 신안군 암태도에서 태어난 문준경은 나이 17세에 증도로 시집을 오게 됩니다. 그러나 신랑 얼굴 한번 못보고 혼례를 치른 첫날밤부터 소박을 맞습니다. 이후 20년간 남편에게 버림받은 생과부가 되어 모진 시집살이를 하던 그녀는 우연히 집을 찾아온 전도 부인에게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된 후 유명한 이성봉 목사님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 나라에 헌신합니다. 그녀는 경성 성서 학원에 입학하여 전도부인이 된 후 다시 고향 신안에 내려와 섬들을 나룻배를 타고 다니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주민들의 부탁으로 짐꾼, 우체부, 약사, 의사 노릇을 하며 1년에 아홉 켤레나 고무신을 바꾸어 신고 이 섬 저 섬의 돌짝밭 길을 다니며 아이, 병자, 어른을 막론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찬양을 불러주고 기도를 해주며 복음을 전합니다.

섬마다 개척 교회들이 세워지고, 이 분의 영향을 받은 청소년들 가운데 김준곤 목사, 이만신 목사, 정태기 목사, 신복윤 목사, 이봉성 목사등 30여명의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생겨납니다. 그녀의 나이 59세가 되던 해 6.25전쟁 중 공상당원이 그녀를 체포하자마자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아, 죽어라”고 소리치며 몽둥이를 내리쳤다고 합니다. 문준경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기도하며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공상당원의 증언처럼 그녀는 수많은 영혼의 생명을 낳은 거룩한 씨암탉으로 주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당시 가장 큰 장례였던 김구 선생의 장례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였다고 합니다. 그녀에게 전도 받은 사람들, 그녀에게 성경을 배운 사람들, 기도 받은 사람들, 사랑 받은 사람들, 도움 받은 사람들, 그녀의 손으로 눈물을 씻김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 이 섬은 민족의 성지일 만큼 90%이상이 예수를 믿은 천국의 섬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우리 중에서 문준경 같은 거룩한 전도자들만 일어날 수 있다면, 우리가 이런 전도자들을 키워만 낸다면 사도행전의 부흥은 또 한 번 이 땅에서 멀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 비전을 실현하는 주인공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아니라면 누가 하겠습니까?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하겠습니까? 여기서부터 안한다면 어디에서 하시겠습니까?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명절 문화를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주 앞으로 인도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진정한 행복을 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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